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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恨)으로 이룬 민족 고유의 서체(東國眞體) - 김세곤 ( 목포지방노동사무소장) 완도 신지도 - 이광사의 유배지 지난 주말에 목포, 해남지역에 폭설이 내렸다. 산에 흰 눈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완도 신지도를 간다. 조선 후기 명필로 알려진 원교 이광사(1705 숙종 31년 -1777 정조1년)를 만나기 위하여서이다. 원교 이광사. 전주 이씨 왕족의 후손이며 몇 대째 내려오는 명필 집안으로 아버지와 백부가 경종시절에는 판서를 지낸 소론의 핵심인물이었으나, 경종이 재위 4년(재위 1720-1724)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재위 1724-1776)하면서 노론이 득세하자 하루아침에 몰락한 가문의 후예. ( 숙종의 아들인 경종은 장희빈이 낳았고 , 영조는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가 낳았다.) 벼슬 한번 해보지 못한 야인으로서 평생을 살면서 일찍이 백하 윤순(1680-1741) 으로부터 서예를 배우고 하곡 정제두(1669-1736)에게 양명학을 배운 명필이요 문인. 그러다가 불운하게도 51세에 귀양살이를 시작하여 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한(恨) 많은 생을 마감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완성자. 그리고 보니 올해가 그가 탄생한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흔적을 보러 완도 신지도 가는 길은 마음이 설렌다. 강진을 지나면서 같이 동행한 분에게 원교의 기구한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대대로 소론이었던 그의 집안은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이 정권을 잡자 아버지 이진검은 강진으로, 백부 이진유는 추자도로 유배되고, 23세 되던 해(1727) 유배지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병사(病死)하고, 26세에는 백부가 옥사하고, 27세에는 첫째 부인 권씨가 여 쌍둥이를 낳다가 난산하여 죽게 된다. 1755년 51세에 전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국문(鞠問)을 받게 되자 둘째부인 유씨는 원교가 극형에 처해졌다는 헛소문을 듣고 처마에 목을 매달아 자결을 하고, 원교는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을 가서 8년을 지낸다. 그러나 주변에 글과 글씨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유로 다시 1762년에 진도로 이배된 뒤에 또 다시 절해고도(絶海孤島) 완도 신지도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1777년 8월에 죽는다. 유배지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도는 정말 한이 많은 곳이다. ‘사는 것이 한을 쌓는 것이고, 한을 쌓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의 한 대목처럼, 유배지의 삶이란 한을 쌓는 일 그 자체이다. 신안 흑산도에서 유배되어 하늘만 바라보다 죽은 손암 정약전의 삶과 완도 신지도에서 푸른 바다를 보면서 글씨에 혼을 불사르다 죽은 원교 이광사의 삶 모두 다 그렇다. 해남을 지나 완도에 이르자 ‘건강의 섬 완도’ ‘장보고의 고장 완도’라는 현수막이 자주 보인다. 그리고 해신(海神)깃발이 도로변에 줄줄이 꽂혀있다. 완도(莞島). 장보고의 해상왕국 청해진.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일본을 넘나드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흥성하였으나, 장보고가 살해당한 뒤로는 완도 주민들은 모조리 김제의 벽골지로 강제 이주 당하였으니. 그리고 후백제시대에 와서야 다시 돌아와서 빙그레 웃었다하여 ‘완(莞)’ 이란 말이 붙었다는 한(恨) 많은 섬이 완도이다. 이윽고 완도읍에 도착하여 선착장에서 배를 탄다. 신지도까지는 7분정도 걸린다. 신지도 도선장에 도착하여 신지면사무소로 간다. 가는 도중에 유명한 명사십리 해수욕장 팻말이 보인다. 면사무소에서 원교 이광사의 유배지에 대하여 잘 아는 분을 만나 그분의 안내로 이광사가 살았다는 금곡리(옛 지명은 金實村)마을로 간다. 이광사가 살았다는 집은 금곡리 경로당 바로 옆에 있다. 옛날에 황희 정승의 자손인 황치곤이 살았던 집이라 한다. 황치곤은 이광사와 친하게 지낸 친구이다. 허름하게 생긴 꽤 오래된 가옥 한 채. 지붕은 비가 새어 새로 수리를 했다 하나 집 자체는 고색(古色)이 짙다. 아, 여기가 1762년 9월에 원교 이광사가 귀양을 와서 호를 수북이라고 하고 글씨를 쓰던 곳이구나. 유명한 <원교서결>이란 서법 책을 쓴 곳이구나.(이광사의 원교란 호는 1737년에 그가 서울 동그재(원교)근처에서 살았을 때 지명을 따서 붙인 호이다.) 이 집이 바로 원교가 둘째아들 영익과 북쪽 변방에서 유배살이 할 때 낳은 주애(珠愛)란 이름의 서녀(庶女)와 같이 살던 집이구나.( 일몽 이규상(1727-1799)의 ‘병세재언록’책의 서가록에 의하면 그 딸은 글씨를 하도 잘 써서 아들 영익보다 나았다는 데 이광사가 죽자 섬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한다. 이광사의 큰 아들은 실학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연려실기술’ 을 편찬한 이긍익이다. ) 이곳이 바로 주변 사람들이 병풍, 족자, 서첩등 글씨를 써 달라는 요구가 많아 하루 날을 택하여 글씨를 썼던 요즘 말로 하면 개인전(展)인 서장(書場)이 열린 곳이구나. 그런데 이광사의 유배지를 잘 아신다는 분이나 동네 이장인 황치곤의 후손에게 물어보아도 이 집에서 원교 이광사의 흔적은 어느 하나 찾을 수 없다. 집안에 이광사의 글씨 한 획도 발견할 수 없고 벽이나 나무에도 글씨 흔적은 없다. 금곡리 마을에도 이광사의 유품은 말할 것도 없고 원교의 글씨나 병풍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지금 가 본 집이 정말 이광사가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곡리 경로당에서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려고 관계자의 말을 듣는다. 안내를 해준 분과 동네 이장의 말로는 예전에는 원교가 쓴 병풍을 이 마을 황씨 후손이 소지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병풍이 해남에 있는 어느 분에게 있단다. 황치곤의 초상화는 인천에 사는 황씨 문중 어느 분이 소장하고 있다 한다. 그러면서 장수황씨 족보에서 황치곤의 내역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숙종 기축생 무술 3.18 졸’이라고 써 있고 ‘이광사 편기당왈(扁其堂曰) 괴괴(怪魁)’ 라고 써 있다. ‘원교가 황치곤의 모습이 하두 괴이하여 그를 괴괴(괴이의 으뜸)라고 부르고 괴괴당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는 이완우의 글(원교의 생애와 예술)과 일치한다. ‘황치곤의 초상화’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그렇다면 1774년 겨울원교가 70세 되던 해에 도화서의 화원(畵員) 신한평이 신지도에 와서 원교의 초상화를 그렸을때 같이 그린 그 초상화가 아닌가.( 신한평은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이것이야말로 귀중한 자료가 아닌가. 며칠 전에 유홍준의 ‘완당평전 1’책에서 원교 이광사의 초상을 본적이 있다. 머리에 사각의 두건을 쓰고 흰 도포를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단정하게 모은 초상. 그런데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20년 이상의 유배생활과 자기의 기구한 처지가 얼굴에 나타나 있다. 한이 많이 서려 있다.(이 초상화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나는 금곡리 동네 분들에게 황치곤의 초상화라도 복사하여 마을에 비치하라는 권유를 하면서 또 다른 것은 없는 지를 다시 물어본다. 하기야 이광사가 죽은 다음해에 그의 유해는 이장되어 선영이 있는 경기도 북부의 유씨부인 묘와 같이 합장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묘역이 지금은 군사분계선 지역이라 하니 이 또한 기구한 운명이다. 당대의 동국진체 명필가의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니. 매우 처량한 기분이 든다. 완도로 돌아가는 길에 신지도 앞 바다를 본다. 바다가 정말 맑고 푸르다. 청정(淸靜)이란 말이 딱 어울린다. 서유구(1764-1845)의 <임원경제지> 책에 의하면 “원교는 적거인 섬에서 매번 행초와 해서로 작은 서첩을 만들어 호로박에 넣어 물에 띄우면서, ‘바다 밖 다른 지방에서 모두 내 글씨를 얻도록 함이다’ 고 하였다 한다.” (이완우 글에서 인용) 바로 이 바다에 호로박을 띄웠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벼슬은 못했으나 글씨로서라도 세상에 자기를 알리고 싶은 원교의 심정을 이해하여 본다. 다시 도선을 타고 완도읍으로 오면서 이 배도 오는 12월 14일이면 운행이 그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완도읍에서 신지도까지 연륙교가 개통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원교가 신지도에서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날 밤 목포 집에서 <동국진체>와 <원교서결>에 관한 책을 본다. 조선중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18세기 초는 한국 서화사에서 민족 특유의 자각이 싹트던 시기였다. 서예에는 동국진체가 , 그림은 정선(1676-1759)으로부터 동국진경(東國眞景) 화풍이 전개된 때였다. 가장 조선색이 나는 민족의 진정한 글씨체인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1662-1723)와 서화가이며 옥동의 친한 친구인 해남윤씨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합작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공재의 이질인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수된 후에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이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옥동 이서는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형임). 이 서체는 중국서예와의 차별성을 확보하기위하여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성을 토대로 조선적인 자연스러운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한편 원교의 서결은 이곳 완도 신지도에서 만들어진 서법 책이다. 서결 전편은 1764년 6월에 원교가 직접 썼고, 후편은 1768년 정월에 둘째아들 영익에게 글을 쓰게 하고 자기가 교정을 본 후에 완성하였다. <원교서결>은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 비교하고 조선특유의 서법을 밝혔으며, 동국진체라고 하는 조선 고유의 서체의 형성과정과 이론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러움과 근골격, 전서와 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왕희지체를 본받았으나 우리민족 고유의 생명력을 강조하였다.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 <만경루> 다음날에 강진 백련사를 들른다.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를 감상하기 위하여서 이다. 백련사 가는 동백숲 길은 언제 걸어도 운치가 있다. 어느덧 백련사 만경루를 지나 대웅보전에 이른다. 먼저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편액 글씨를 본다. <대웅보전>은 <대웅>과 <보전> 두 줄 세로로 쓴 글씨를 2개의 널빤지에 붙인 행서를 가미한 해서체 편액이다. 글씨가 마치 살아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대(大)자 글씨는 사람이 활개를 치고 걸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대웅보전 글씨를 찬찬히 보니 <대웅> 글자가 약간 비스듬하다. 이규상의 책에 보면 “원교의 글씨는 비록 해서(楷書) 글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우울한 심기를 떨치듯 삐딱하고 비스듬하다. 연기(燕岐)원으로 있는 황운조는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광사의 글씨의 경악할 만한 면을 흠잡는 일이 많으나, 내 생각으로는 그의 기이한 기세로서 쌓인 울분을 털어 놓은 것으로 반드시 편안하지 못한 심기가 붓끝에서 울려나온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은 것 같다.”라는 글이 있다. 글씨체가 사람 마음의 표현이요 기(氣)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 가지로 한이 많은 그의 글씨체가 비스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 당시에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너무 유행하여 서예를 배우는 일반 사람들도 모두 원교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글씨를 비스듬하게 썼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원교가 기를 추구한 글씨를 썼다는 일화는 ‘도보(道甫: 이광사의 字임)는 글씨를 쓸 때에 노래하는 사람을 세워 두었는데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일 경우에는 글씨도 우조(羽調)의 분위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으며, 노랫가락이 평조(平調)일 경우에는 글씨에 평조의 분위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한다.(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 같은 글씨라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글씨가 달라지는 것은 누구나 경험 하는 일이다. 한편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만경루 편액을 본다. 만 가지 경치가 보인다는 뜻의 <만경루(萬景樓)> 편액은 반듯하게 정자로 쓴 전형적인 해서체이다. 글씨도 두툼하게 먹이 잘 묻어있다. 문득 다산 정약용이 지은 이광사에 대한 시가 생각난다. 1807년 다산과 혜장선사가 자주 만나던 시절에 다산이 백련사에 걸려 있는 이광사의 편액을 보면서 쓴 칠언시이다.(觀李道甫題額白蓮寺) “우리나라 글씨는 뛰어난 작품이 적은 데 근래엔 이광사가 있어 그 사람만 홀로 세상에 유명하다. 북쪽 변방 끝에서 남쪽 섬으로 귀양살이를 옮겨서 미개한 천민들에게는 예악과 제도 가르쳐 배우게 했다네. 거룩하다. 일개 포의(布衣)로 귀양을 살았지만 우레 같은 명성이 백세를 울리네. 그가 쓴 백련사 편액을 볼라치면 꿈틀대는 용의 기세 붙잡아 헌걸 치구나. 거칠고 질박한 김생은 헛이름만 얻어 시골 백성들 계약서나 써 줄만한 글씨였다오. ... 큰 인재 외진 바닷가에서 불우하게 죽다니 남긴 자취 처량해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후략 “ 이렇듯 다산 정약용은 원교 이광사를 명필로 칭송하고 있다. 이는 원교의 글씨를 가혹하게 비판한 추사 김정희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해남 대흥사에서 백련사를 구경한 후에 해남 대흥사를 간다. 여기에도 원교의 글씨가 여러 개 있다. <해탈문> <침계루> <대웅보전> <천불전> 편액이 그것이다. 피안교를 건너고 두륜산 대흥사라고 쓰인 일주문과 부도탑을 지나서 해탈문에 들어선다. 이곳을 지나면 대흥사 경내이다. 해탈. 번뇌와 망상의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되는 성불(成佛)의 길, 뜨거운 정진(精進)을 촉진시키는 길로 들어선다는 의미의 해탈문. <해탈문>이라는 원교의 편액 글씨는 문 안쪽에 걸려 있다. 행서체로 쓰여진 글씨를 보니 명작중의 명작이다. 글씨라기보다는 미술이다. 글씨의 오르내림, 끝마무리가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특히 문(門)자는 용이 트림을 하는 느낌이다. 이 글씨를 보고 있으니 원교의 글씨는 ‘ 용이 날고 호랑이가 날뛰는 듯하다 ’라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는 너무 부족하다. 차라리 이 편액을 직접 사진으로 감상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해탈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간다. 대웅보전은 북원이라고 불리는 경내 왼편에 있다. 심진교 다리를 두고 계곡 물이 흐르고 있고, 정문에는 <침계루> 라고 써진 편액이 붙은 누각이 있다. ‘계곡을 베개 삼은 누각’ 이라는 이름의 침계루. 계곡물이 잔잔히 흐르는 금당천 옆 누각에 걸려있는 행서와 초서를 합친 이광사의 글씨는 마치 계곡물이 흐르듯 유려하다. 침계루를 지나니 바로 앞에 대웅보전이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백설당’ 승방이다. 대웅보전에는 <대웅>, <보전>이라고 세로 두 줄로 쓴 원교의 해서체 편액이 붙어 있다. 그리고 백설당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 김정희는 이광사가 죽은 지 10년 후에 태어났다.)가 쓴 <무량수각> 편액이 붙어 있다. 이조 후기 서예의 양대산맥인 원교와 추사의 글씨를 대흥사 대웅전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다니 정말 흥미롭다.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는 뼈대가 있고 깔끔하고 말쑥한 해서체이다. 반면에 추사의 <무량수각>은 획이 기름지고 두툼하고 묵직한 예서체이다.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를 한참 보고 있자니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생각난다. 1840년 추사가 55세 되던 해 병조참판까지 한 당대의 권세가인 추사 김정희는 어느 순간에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완도에서 제주도행 배를 타러 가는 길목에, 그는 평생지기 초의선사를 만나러 해남 대흥사를 찾는다. 그리고 추사는 대웅보전에 걸려 있는 원교의 글씨를 보고 속기(俗氣)가 있다고 생각하여 떼어 내라 하고, 자신이 쓴 대웅보전 글씨와 무량수각 글씨를 초의에게 써준다. 그로부터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이후 해배된 추사는 서울로 가던 도중에 다시 초의를 만나러 대흥사를 들른다. 그리고 떼어진 원교의 편액이 아직도 있는 지를 초의에게 묻고, 초의는 그 편액이 어디 있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추사는 원교의 편액을 대웅보전에 다시 붙이라고 한다. 자신의 글씨에 자만하였던 추사도 수년간의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야 원교의 글씨에 대한 이해를 하여서일까. 한때, 추사는 그의 나이 50세 시절에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라는 글을 써서 원교의 서법에 대하여 혹평을 한 적이 있다. 청나라의 문물을 경험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글씨를 논하였던 개화된 신세대의 선두주자 추사로서는 소위 조선 안에 머물고 있는 원교의 동국진체는 우물안 개구리로 보였으리라.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추사가 원교를 혹평한 것은 그만큼 그 시대에 원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고 , 추사가 同時代 사람을 혹평한 것은 조금 지나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교의 글씨는 귀양지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때로는 그의 아들과 딸이 대신 글씨를 쓰기도 했다 한다.) 대흥사 경내 중앙에 있는 <천불전> 편액도 원교의 글씨이다. 그리고 천불전을 들어가는 문 위에 써진 <가허루> 편액. 이것은 원교의 제자이며 호남의 명필인 전주의 창암 이삼만(1770-1845)이 쓴 글씨이다. 이외에도 대흥사는 당대의 명필들 글씨가 수두룩하다. 정조대왕이 직접 쓴 글씨도 있다. 한편 원교의 편액은 호남지방의 사찰에 널리 걸려 있다. 구례 천은사, 전북 부안의 내소사, 고창 선운사에도 원교의 편액을 볼 수 있다. 원교의 편액글씨는 기존의 설암체 편액과는 달리 글자가 너무 비만하지 않으며 획법이 가늘고 획 사이의 간격이 넓다. 그 가운데 화기(火氣)를 막기 위하여 물 흐르듯 썼다는 구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 일주문 편액은 이러한 그의 편액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은사 일주문 편액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지리산 기슭에 천은사가 있다. 창건 무렵 절 앞뜰에 감로천 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이슬처럼 맑은 이 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졌는데 당시의 이 절의 이름도 감로사였다. 고려 충렬왕 때 남방제일선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후 중건하면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감로천이 말라버렸다. 그래서 절 이름도 ‘샘물이 숨어버렸다’라는 뜻의 천은사(泉隱寺)가 되었다. 그런데 절집을 중건한 후 이상하게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자주 일어났다. 사람들은 절의 수기(水氣)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이곳에 들른 원교는 이 사연을 듣고는 불을 막기 위해서는 물이 항상 흘러야 한다며 <지리산 천은사> 글씨를 물 흐르듯이 써주고 일주문에 걸게 했다. 그 뒤로 천은사 절은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 한다. 최준호 책을 참고함)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예실 주말에 서울에 가서 국립중앙박물관의 2층에 있는 미술관 서예실을 다시 찾는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서예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한 게시판과 중국과 한국의 서예 역사를 비교 설명한 게시판이 있다. 이 설명문을 읽어보니 조선 중기이후는 석봉 한호와 원교 이광사, 추사 김정희가 가장 유명한 명필로 기재되어 있다. 이광사는 옥동 이서와 공재 윤두서를 거처, 백하 윤순에게 전수된 동국진체를 완성한 사람으로, 추사 김정희는 조형미가 뛰어난 추사체를 완성한 사람으로 적혀 있다. 이곳에 전시된 이광사의 작품들을 찾아보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도연명(도잠 365-427)의 오언시를 쓴 12폭 병풍이다. ‘큰 글씨의 행서로 시원시원하게 붓을 휘둘러 썼고, 강한 필치와 글씨의 여백을 살려 감각미를 높였다’는 설명이 있다. 다른 한쪽 벽면에는 원교 이광사와 그의 스승 백하 윤순이 쓴 글씨가 같이 배치되어 있다. 백하는 부친인 이진검과 친구로서 같은 소론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의 문하가 되었고 글씨를 배웠다. 원교 5언시 행서에는 ‘조선적인 글씨를 이루고자 노력했던 원교가 왕희지로 대표되는 중국 육조시대의 서풍을 바탕으로 자신의 글씨를 빠른 붓놀림과 힘찬 필치로 흥취를 이루었다’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백하 윤순의 7언시는 원교의 글씨 오른편에 있다. 스승과 제자인 두 사람의 글씨가 나란히 한 곳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미술관 관계자의 이 뜻 깊은 배치에 찬사를 보낸다. 마치면서 원교 이광사. 내가 그분을 알게 된 것은 대흥사에 걸려 있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편액과 관련한 추사의 일화 때문이었다. “남도에 남긴 추사의 흔적” 글을 쓰면서 원교가 누구인지를 조금 알았다. 그런데 한 달 전에 최근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을 구경하면서 미술관 서예실을 가보니 원교는 추사와 같이 조선 후기 서예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다. 또한 남도의 한을 가득 안고 완도 신지도에서 생을 마감한 점. 그의 한 많은 삶의 역정. 동국진체라는 민족고유의 서체를 완성한 독자성, 그리고 공재 윤두서, 다산 정약용, 혜장선사와도 연관을 가진 점 등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원교 이광사에 대한 평가는 추사 김정희에 비하면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직도 원교가 진도에서 유배되어 죽었다는 오기(誤記)를 하고 있는 자료도 많다.(국립중앙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의 인명사전 검색, ‘18세기 조선 인물지 - 병세재언록’ 책의 인명 해설 등). 올해가 그가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그가 귀양을 살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완도의 지역 인사들로 구성된 ‘원교 이광사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을 한다 하니 기대를 가져 본다. <참고문헌> o 목정배등, 대흥사(대둔사), 대원사, 1994 o 예술의 전당, 원교 이광사 전(展) -원교 서예의형성과 전개, 1994 11.24-12.10 o 유홍준, 완당평전 1, 학고재 ,2002 o 유홍준, 화인열전 1, 역사비평사, 2001 o 이광사등 원저, 김남형 역주, 옛날 우리나라 어른들의 서예비평, 한국서예협회, 2002. o 이규상, 18세기 조선인물지 -병세재언록 , 창작과비평사,1997 o 이완우, 원교의 생애와 예술, 예술의 전당 ,1994 o 이완우, 서예 감상법, 대원사, 1999 o 전종주, 동국진체의 완성과 완도, 전라남도지, 1991 o 정약용 지음, 박석무 정해렴 편역, 다산 시 정선(하), 현대실학사, 2001 o 최준호,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한얼미디어, 2005 ( 2005. 12. 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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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