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도 펄롱이 있다
반년 사이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네 번 읽었다. 처음 다 읽은 후에 바로 다시 한번, 서너 달 뒤 또 한 번, 그리고 이번까지. 소설인데다 책 두께가 무척 얇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같은 책을 두 번 읽기가 쉽지 않은 현실에서 내게도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다시 읽을 때마다 조금 더 깊이 느껴지는 표현과 감정들. 간결한 문장으로 쓰인 짧은 글에 담긴 묵직한 느낌. 등장인물을 향한 감정이입. 나의 존재와 현실에 대한 인정과 위로까지. 모든 게 좋았다.
소설 속 장소와 시대적 배경이 지금 나의 현실과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일린과 펄롱의 가정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보았고 미시즈 윌슨과 미시즈 케호, 수녀원에서는 우리의 이웃을 떠올렸다.
20년째 주부로서의 내 삶도 아일린처럼 평온한 가정을 꾸리는데 집중하는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다. 간혹 생기는 불안과 걱정 속에서도 이 일상이 오래오래 잘 유지되기를 매 순간 간절히 바라는 삶.
내 남편은 소설 속 펄롱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인권착취의 현장인 수녀원 세탁소에서 세라를 구츨해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없겠지만, 아직도 종종 불시에 날아오는 후원증서나 연말정산 기부금 내역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우리는 교회도 안 다니는데 이건 거의 십일조 수준이야. 솔직히 좀 과한 것 같아.”
“당신 것도 많은데? 나는 서로가 알아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혹시 나중에 중단해야 되는 일이 생기면 어떡할지 생각해 봤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하는 데까지는 하는 거고. 괜찮을 거야. 암튼, 알았어.”
이러다 보니 같은 단체에 둘 다 후원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 시작 이후에 중단한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도 새삼 놀랍다. 아이들은 출생신고 후 그 이름으로 바로 초록우산 후원부터 시작했다. 남편은 정치나 사회적 약자(자립 청년,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위안부등)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관련 후원과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특히 신체나 정신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사연에는 안타까움이 너무 커서 그냥 가볍게 듣고 보아 넘기지를 못한다. 나는 나대로 여기저기 마음을 쓰다 보니 후원의 개수도 금액도 계속 늘었다. 그런 마음을 일상에서 크고 작은 행동으로 실천하며 자신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사람. 현실 펄롱이 내 옆에 있다.
그리고 내 주변으로는 알게 모르게 나에게 선한 영향과 도움을 주었을 미시즈 윌슨,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돕고 현실 조언을 하는 미시즈 케호, 부정과 반인륜적 행동을 숨긴 채 위선과 성스러움으로 포장한 수녀원 같은 이웃도 존재한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29
우리 부부는 가끔 질문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그럼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고. 우리는 서로에게 “아니.”라고 한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설사 돌아간다고 해도 삶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고. 인간의 생은 한 번뿐이라고 믿지만 설사 아니라고 해도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마 똑같이 살게 될 거라고. 어쩌면 지금 이 삶도 이미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이미 지나온 삶을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난날 나의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되어있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게 남은 요즘, 자주 남은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매일을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보다는 제발 별일만 없기를 바라는 날들 속에서도 나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조금 다른 생각과 마음, 행동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걸 날마다 느끼는 요즘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과거로 돌아가도 나는 지금처럼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 이 책을 만났다. 그리고 이제 나의 인생에 몇 가지 다짐을 더해본다.
—남은 삶 동안 예기치 못한 일과 마주하고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조금 더 용기 내어 행동할 것.
—나 자신과 타인에게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할 것.
—내가 만난 좋은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눌 것.
내가 사는 방식이 그렇게까지 별난 건가 싶어 부쩍 외롭고 힘든 요즈음.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내가 만난 좋은 책을 되도록 많은 사람과 함께 읽고 싶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꼭 두 번 이상 읽으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