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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김 유 정
내가 주재소¹에까지 가게 될 때에는 나에게도 다소 책임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봐도 나는 조금치도 책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복만이는 제 아내를(여기가 퍽 중요하다) 제 손으로 직접 소 장사에게 판 것이다. 내가 그 아내를 유인해다 팔았거나 혹은 내가 복만이를 꾀어서 서로 공모하고 팔아먹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 동리에서 일반이 다 아다시피 복만이는 뭐 남의 꼬임에 떨어지거나 할 놈이 아니다. 나와 저와 비록 격장²에 살고 흉허물없이 지내는 이런 터이지만 한 번도 저의 속을 터 말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뿐이랴. 어느 동무고 간에 무슨 말을 좀 묻는다면 잘해야 세 마디쯤 대답하고 마는 그놈이다. 이렇게 귀찮은 얼굴에 내 천 자를 그리고 세상이 늘 마땅치 않은 그놈이다. 오죽하면 요전에는 제 아내가 우리에게 와서 울며불며 하소를 다 하였으랴. 그 망할 건 먹을 게 없으면 변통을 좀 할 생각은 않고 부처님 같이 방구석에 우두커니 앉았기만 한다고. 우두커니 앉았는 것보다 싫은 말 한마디 속 시원히 안 하는 그 뚱보가 미웠다. 마는 그러면서도 아내는 돌아다니며 양식을 꾸어다 여일히 남편을 공경하고 하는 것이다.
이런 복만이를 내가 꾀었다 하는 것은 번시가 말이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날 매매 계약서를 내가 대서로 써준 그것뿐이다.
점심을 먹고 내가 봉당에 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노라니까 복만이가 찾아왔다. 한 손에 바람에 나부끼는 인찰지³ 한 장을 들고 내 앞에 와 딱 서더니
“여보게 자네 기약서⁴ 쓸 줄 아니?”
“기약서는 왜?”
“아니 글쎄 말이야―” 하고 놈이 어색한 낯으로 대답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냐. 아마 곁에 다른 사람이 여럿이 있으니까 말하기가 거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날 전에 놈에게 종용히⁵ 들은 말이 있어서 오 아내의 일인가 보다 하고 얼른 눈치채었다. 싸리문 밖으로 놈을 끌고 나와서 그 귀밑에다
“자네 여편네가 어떻게 됐나?”
“응―.”
놈이 단마디 이렇게만 대답하고는 두레두레한 눈을 굴리며 뭘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저 물 건너 사는 소 장사에게 팔기로 됐네. 재순네(술집)가 소개를 해서 지금 주막에 와 있는데 자꾸 기약서를 써야 한다구 그래. 그러나 누구 하나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 자네에게 써 가지고 올 테니 잠깐 기다리라구 하고 왔어. 자넨 학교 좀 다녔으니까 쓸 줄 알겠지?”
“그렇지만 우리 집에 먹이 있나 붓이 있나?”
“그럼 하여튼 나하구 같이 가세.”
맑은 시내에 붉은 잎을 담그며 일쩌운⁶ 바람이 오르내리는 늦은 가을이다. 시든 언덕 위를 복만이는 묵묵히 걸었고 나는 팔짱을 끼고 그 뒤를 따랐다. 이때 적으나마 내가 제 친구니까 되든 안 되든 한번 말려보고도 싶었다. 다른 짓은 다 할지라도 영득이(다섯 살 된 아들이다)를 생각하여 아내만은 팔지 말라고 사실 말려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저를 먹여주지 못하는 이상 남의 일이라고 말하기 좋아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기도 어려운 일이다. 맞붙잡고 굶느니 아내는 다른 데 가서 잘 먹고 또 남편은 남편대로 그 돈으로 잘 먹고 이렇게 일이 필 수도 있지 않느냐. 복만이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도리어 나의 걱정이 더 큰 것을 알았다. 기껏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털어서 쪼개고 보니까 나의 몫으로 겨우 벼 두 말 가웃이 남았다. 물론 털어서 빚도 다 못 가린 복만이에게 대면 좀 날는지 모르지만 이걸로 우리 식구가 한겨울을 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고대로 캄캄하다. 나두 올 겨울에는 금점이나 좀 해볼까, 그렇지 않으면 투전을 좀 배워서 노름판으로 쫓아다닐까, 그런대도 밑천이 들 터인데 돈은 없고 복만이같이 내다팔 아내도 없다. 우리 집에는 여편네라곤 병든 어머니밖에 없으나 나이도 늙었지만(좀 부끄럽다) 우리 아버지가 있으니까 내 맘대론 못하고―
이런 생각에 잠겨 짜증⁷ 나는 복만이더러 네 아내를 팔지 마라 어째라 할 여지가 없었다. 나도 일찍이 장가나 들어두었으면 이런 때 팔아먹을걸 하고 부질없는 후회뿐으로.
큰길로 빠져 나와서
“그럼 자네 먼저 가 있게. 내 먹 붓을 빌려가지고 곧 갈게.”
“벼루서껀 있어야 할걸 ―”
나 혼자 밤나무 밑 술집으로 터덜터덜 찾아갔다. 닭의 똥들이 한산히 늘어놓인 뒷마루⁸로 조심스레 올라서며 소 장사란 놈이 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가 하고 퍽 궁금하였다. 소도 사고 계집도 사고 이럴 때에는 필연 돈도 상당히 많은 놈이리라.
지게문을 열고 들어서니 첫때 눈에 띈 것이 밤볼⁹이 지도록 살이 디룩디룩한 그리고 험상궂게 생긴 한 애꾸눈이다. 이놈이 아랫목에 술상을 놓고 앉아서 냉수 마신 상으로 나를 쓰윽 쳐다보는 것이다. 바지저고리에는 때가 쪼루룩 묻은 것이 게다 제딴에는 모양을 낸답시고 누런 병정 각반¹⁰을 치올려 쳤다.
이놈과 그 옆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는 영득 어머니와 부부가 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좀 덜 맞는 듯싶다마는 영득 어머니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 처분만 기다린단 듯이 잠자코 아이에게 젖이나 먹일 뿐이다. 나를 쳐다보고 자칫 낯이 붉는 듯하더니
“아재 나려오슈!” 하고는 도로 고개를 파묻는다.
이때 소 장사에게 인사를 붙여준 것이 술집 할머니다. 사흘이 모자라서 여호가 못 됐다니만치 수단이 능글차서
“둘이 인사하게. 이게 내 먼 촌 조칸데 소 장사구 돈 잘 쓰구.”
하다가 뼈만 남은 손으로 내 등을 뚜덕이며
“이 사람이 아까 그 기약서 잘 쓴다는 재봉이야.”
“거 뉘 댁인지 우리 인사합시다. 이 사람은 물 건너 사는 황거풍이라 부르우.”
이놈이 바로 우좌스럽게¹¹ 큰 소리로 인사를 거는 것이다. 나두 저 붑지않게¹² 떡 버티고 앉아서 이 사람은 하고 이름을 댔다. 그 리고 울아버지도 십 년 전에는 땅마지기나 조이¹³ 있었단 것을 명백히 일러주니까 그건 안 듣고 하는 수작이
“기약서를 써달라구 불렀는데 수고스러우나 하나 잘 써주기유.”
망할 자식 이건 아주 딴소리다. 내가 친구 복만이를 위해서 왔지 그래 제깟 놈의 명령에 왔다 갔다 할 겐가. 이 자식 무척 시큰둥하구나 생각하고 낯을 찌푸려 모로 돌렸으나
“우선 한잔 하기유.” 함에는 두 손으로 얼른 안 받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복만이가 그 웃음 잊은 얼굴로 씨근거리며 달려들 때에는 벌써 나는 석 잔이나 얻어먹었다. 얼근한 손에 다 모지라진 붓을 잡고 소 장사의 요구대로 그려놓았다.
매매 계약서
일금 오십 원야라.
위 금은 내 아내의 대금으로써 정히 영수합니다.
갑술년 시월 이십 일
조복만
황거풍 전
여기에 복만이의 지장을 찍어주니까 어디 한번 읽어보우 한다. 그리고 한참 나를 의심스레 바라보며 뭘 생각하더니 “그거면 고만이유. 만일 나중에 조상¹⁴이 돈을 해가지고 와서 물러달라면 어떡허우?” 하고 눈이 둥그레서 나를 책망을 하는 것이다. 이놈이 소 장에서 하던 버릇을 여기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벙벙히 쳐다만 보았으나 옆에서 복만이가 그대로 써주라 하니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 아내는 물러달라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그제야 조끼 단춧구멍에 굵은 쌈지끈으로 목을 매달린 커다란 지갑이 비로소 움직인다. 일 원짜리 때묻은 지전 뭉치를 꺼내 들더니 손가락에 연신 침을 발라가며 앞으로 세어보고 뒤로 세어보고 그리고 이번에는 거꾸로 들고 또 침을 발라가며 공손히 세어본다. 이렇게 후줄근히 침을 발라 셌건만 복만이가 또다시 공손히 바르기 시작하니 하마 지전은 침을 발라야 장수를 하나 보다.
내가 여기서 구문¹⁵을 한 푼이나마 얻어먹었다면 참이지 성을 갈겠다. 오 원씩 안팎 구문으로 십 원을 답센¹⁶ 것은 술집 할머니요 나는 술 몇 잔 얻어먹었다. 뿐만 아니라 소 장사를 아니 영득 어머니를 오 리 밖 공동묘지 고개까지 전송을 나간 것도 즉 나다.
고갯마루에서 꼬불꼬불 돌아내린 산길을 굽어보고 나는 마음이 적이 언짢았다. 한 마을에 같이 살다가 팔려가는 걸 생각하니 도시¹⁷ 남의 일 같지 않다. 게다 바람은 매우 차건만 입때 홑적삼으로 떨고 섰는 그 꼴이 가엾고一
“영득 어머니! 잘 가게유.”
“아재 잘 계슈.”
이 말 한마디만 남길 뿐 그는 앞장을 서서 사랫길¹⁸을 살랑살랑 달아난다. 마땅히 저 갈 길을 떠나는 듯이 서두르며 조금도 섭섭한 빛이 없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섰는 복만이조차 잘 가라는 말 한마디 없는데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승같이 뻐적 서서¹⁹는 눈만 끔벅끔벅하는 것이 아닌가. 개자식, 하루를 살아도 제 계집이련만. 근 십 년이나 소같이 부려먹던 이 아내다. 사실 말이지 제가 여지껏 굶어 죽지 않은 것은 상냥하고 돌림성²⁰ 있는 이 아내의 덕택이었다. 그런데 인사 한마디가 없다니 개자식 하고 여간 밉지가 않
았다.
영득이는 제 아버지 품에 잔뜩 붙들려 기가 올라서 운다. 멀리 간 어머니를 부르고 두 주먹으로 아버지의 복장을 들이두드리다간 한번 쥐어박히고 멈칫한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다시 시작한다.
소 장사는 얼굴에 술이 잠뿍²¹ 올라서 제멋대로 한참 지껄이더니
“친구! 신세 많이 졌수. 이담 갚으리다.” 하고 썩 멋들어지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뒤툭뒤특 고개를 내리다가 돌부리에 채키어 뚱뚱한 몸뚱어리가 그대로 떼굴떼굴 굴러버렸다. 중턱에 내뻗은 소나무에 가지가 없었다면 낭떠러지로 떨어져 고만 터져버릴 걸 요행히 툭툭 털고 일어나서 입맛을 다신다. 놈이 좀 무색한지 우리를 돌아보고 한번 빙긋 웃고 다시 내걸을 때에는 영득 어머니는 벌써 산 하나를 꼽들었다.
이렇게 가던 소 장사 이놈이 닷새 후에는 날더러 주재소로 가자고 내끄는 것이 아닌가. 사기는 복만이한테 사고 내게 찌다위²²를 붙는다. 그것도 한가로운 때면 혹 모르지만 남 한창 바쁘게 거름쳐내는 놈을 좋도록 말을 해서 듣지 않으니까 나도 약이 안 오를 수 없고 골김에 놈의 복장을 그대로 떠다밀어버렸다. 풀밭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내 멱살을 바짝 죄어잡고 소 다투듯 잡아끈다.
내가 구문을 받아먹었다든지 또는 복만이를 내가 소개했다든지 하면 혹 모르겠다. 기약서 써주고 술 몇 잔 얻어먹은 것밖에 나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 놈의 말을 들어보면 영득 어머니가 간 지 나흘 되던 날 즉 그저께 밤에 자다가 어디로 없어졌다. 밝는 날에는 들어올까 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영 들어오질 않는다.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사방으로 찾아다니다 비로소 우리들이 짜고 사기를 해먹은 것을 깨닫고 지금 찾아왔다는 것이다. 제 아내 간 곳을 아르쳐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와 죽는다고 애꾸 낯짝을 들이대고 이를 북, 갈아 보인다.
“내가 팔았단 말이우? 날 붙잡고 이러면 어떡 할 작정이지요?”
“복만이는 달아났으니까 너는 간 곳을 알겠지? 느들이 짜고 날 고랑때²³를 먹였어 이놈의 새끼들!”
“아니 복만이가 달아났는지 혹은 볼일이 있어서 어디 다니러 갔는지 지금 어떻게 안단 말이우?”
“말 말아, 술집 아주머니에게 다 들었다. 또 속이려구, 요 자식!”
그리고 나를 논둑에다 한번 메다꽂아서는 흙도 털 새 없이 다시 끌고 간다. 술집 아주머니가 복만이 간 곳은 내가 알겠으니 가보라 했다나. 구문 먹은 걸 도로 돌라놓기²⁴가 아까워서 제 책임을 내게로 떠민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소 장사 듣기에는 내가 마치 복만이를 꾀어서 아내를 팔게 하고 뒤로 은근히 구문을 뗀 폭이 되고 만다.
하기는 복만이도 그 아내가 없어졌다는 날 그저께 어디로인지 없어졌다. 짜정 도망을 갔는지 혹은 볼일이 있어서 일가집 같은데 나닐러 갔는지²⁵ 그건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동리로 돌아다니며 아내가 꾸어온 양식 돈푼 이런 자지레한 빚냥을 다 돈으로 갚아준 그다. 달아나기에 충분할 아무 죄도 그는 갖지 않았다. 영득이가 밤마다 엄마를 부르며 악짱을 치더니 보기 딱하여 제 큰집으로 맡기러 갔는지도 모른다.
복만이가 저녁에 우리 집에 왔을 때에는 어디서 먹었는지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안뜰로 들어오더니 막걸리를 한 병 내놓으며
“이거 자네 먹게.”
“이건 왜 사와. 하여튼 출출한데 고마우이.” 하고 나는 부엌에 내려가 술잔과 짠지 쪼가리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둘이 봉당에 걸터앉아서 마시기 시작하였다.
술 한 병을 다 치우고 나서 그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지껄이더니 내 앞에 돈 일 원을 꺼내놓는다.
“저번 수고를 끼쳐서 그 예일세.”
“예라니?”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 얼굴을 이윽히 쳐다보았다. 마는 속으로는 요전 대서료로 주는구나 하고 이쯤 못 깨달은 바도 아니었다. 남의 아내를 판 돈에서 대서료를 받는 것이 너머²⁶ 무례한 일인 것쯤은 나도 잘 안다. 술을 먹었으니까 그만해도 좋다 하여도
“두구 술 사 먹게. 난 이거 말구두 또 있으니까―” 하고 굳이 주머니에까지 넣어주므로 궁하기도 하고 그대로 받아두었다. 그리고 그담부터는 복만이도 영득이도 우리 동리에서 볼 수가 없고 그뿐 아니라 어디로 가는 걸 본 사람조차 하나도 없다.
이런 복만이를 소 장사 이놈이 날더러 찾아놓으라고 명령을 하는 것이다. 멱살을 숨이 갑갑하도록 바짝 매달려서 끌려가자니 마을 사람들은 몰려서서 구경을 하고 없는 죄가 있는 듯이 얼굴이 확확 단다. 큰 개울께까지 나왔을 적에는 놈도 좀 열적은지 슬며시 놓고 그냥 걸어간다. 내가 반항을 하든지 해야 저도 독을 올려서 욕설을 하고 겯고틀고 할톈데 내가 고분히 달려가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 저의 원대로 주재소까지 가기만 하면 고만이니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앞서고 뒤서고 십 리 길이나 걸었다. 깊은 산길이라 사람은 없고 앞뒤 산들은 울긋불긋 물들어 가끔 쏴 하고 낙엽이 날린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에 먼 봉우리는 자줏빛이 되어가고 그 반영에 하늘까지 불콰하다. 험한 바위에서 이따금 돌은 굴러내려 웅덩이의 밝은 물을 휘저어놓고 풍 하는 그 소리는 실로 쓸쓸하다. 이 산서 수꿩이 푸드득 저 산서 암꿩이 푸드득 그리고 그 사이로 소 장사 이놈과 나와 노량으로²⁷ 허우적허우적.
또 한 고개를 놈이 뚱뚱한 몸집으로 숨이 차서 씨근씨근 올라오니 그때는 노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풀밭에 펄썩 주저앉아서는 숨을 돌리고 담배를 꺼내고 그리고 무슨 마음이 내켰는지 날더러
“다리 아프겠수. 우리 앉아서 쉽시다.” 하고 친절히 말을 붙인다. 나도 그 옆에 앉아서 주는 권연을 피워 물었다. 인제도 주재소까지 시오 리가 남았으니 어둡기 전에는 못 갈 것이다.
“아까는 내 퍽 잘못했수.”.
“별말 다 하우.”
“그런데 참 복만이 간 데 짐작도 못하겠수?”
“아마 모름 몰라두 덕냉이 제 큰집에 갔기가 쉽지유.”
이 말에 놈이 경풍을 하도록 반색하며 애꾸눈을 바짝 들이대고 끔벅거린다. 그리고 우는소리가 잃어버린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런 계집을 다시 만나기가 어려워서 그런다. 번이 홀아비의 몸으로 얼굴 똑똑한 아내를 맞아다가 술장사를 시켜보고자 벼르던 중이었다. 그래 이번에 해보니까 장사도 잘할뿐더러 아내로서 훌륭한 계집이다. 참이지 며칠 살아봤지만 남편에게 그렇게 착착 부닐고²⁸ 정이 붙는 계집은 여지껏 내 보지 못했다. 그러기에 나도 저를 위해서 인조견으로 옷을 해 입힌다 갈비를 들여다 구워 먹인다. 이렇게 기뻐하지 않았겠느냐. 덧돈을 들여가면서라도 찾으려 하는 것은 저를 보고 싶어서 그럼이지 내가 결코 복만이에게 돈으로 물러달랄 의사는 없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복만이 갈 듯한 곳은 다 좀 아르쳐주.” 놈의 말투가 또 이상스리 꾀는 걸 알고 불쾌하기가 짝이 없다. 아무 대답도 않고 묵묵히 앉아서 담배만 빠니까
“같은 날 같이 없어진 걸 보면 둘이 짜구서 도망간 게 아니우?”
“사십 리씩 떨어져 있는 사람이 어떻게 짜구 말구 한단 말이우?”
내가 이렇게 펄쩍 뛰며 핀잔을 줌에는 그도 잠시 낙망하는 빛을 보이며
“아니 일텀²⁹ 말이지 내가 복만이면 제 아내가 어디 간 것쯤은 알 게 아니우?”
하고 꾸중 맞는 어린애처럼 어리광조로 빌붙는다. 이것도 사랑병인지 아까는 큰 체를 하던 놈이 이제 와서는 나에게 끽소리도 못한다. 행여나 여망³⁰ 있는 소리를 들을까 하여 속 달게 나의 눈치만 글이다가³¹
“덕냉이 큰집이 어딘지 아우?”
“우리 삼촌댁도 덕냉이 있지유.”
“그럼 우리 오늘은 도루 나려가 술이나 먹고 낼 일찍이 같이 떠납시다.”
“그러기유.”
더 말하기가 싫어서 나는 코대답³²으로 치우고 먼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마악 떨어지니 산골은 오색 영롱한 저녁노을로 덮인다. 산봉우리는 숫제 이글이글 끓는 불덩어리가 되고 노기 가득 찬 위엄을 나타낸다. 그리고 나직이 들리느니 우리 머리 위에 지는 낙엽 소리 ―
소 장사는 쭈그리고 눈을 감고 앉았는 양이 내일의 계획을 세우는 모양이다. 마는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복만이는 덕냉이 제 큰집에 있을 것 같지 않다.
-끝-
2016년 6월 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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