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관련 주요 연원과 어원 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바이지만 진도아리랑이 만들어진 것은 1900년 경 절대(大笒, 젓대) 명인 박종기(朴鐘基 1879~1941) 국수(國手)와 당시 읍에 신청(神廳)을 드나들던 박진권, 박동준, 채중인, 양홍도 등이 함께 모여, 그간에 ‘아리랑 타령’ ‘아롱 타령’ ‘산아지 타령’등으로 각기 다른 후렴들과 함께 여러 가지로 전하던 타령들을 <진도 아리랑>으로 정형화시킨 곡을 만들어 오늘날 진도아리랑이 되게 했다는 설이 유력한 진도아리랑의 정립설입니다.
한편 진도아리랑의 유래 설에 옛날(일부는 영조 때라고도 함) 꿀재(굴재, 아리랑 고개)를 배경으로 한 지산면 목장의 감목관 딸 ‘설이향’과 진도 원님 아들 ‘소영’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 얘기와, 진도 출신 총각이 문경(일부는 대구라고도 함) 대갓집에 머슴살이를 갔다가 그 주인 딸과 눈이 맞아서 문경새재를 넘어 진도로 들어오면서 ‘문경새재 웬고갠가’ 했다는 두 가지 설을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후자인 진도 총각의 머슴살이 얘기는 너무나 엉터리로 그것도 근래에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 이유로는 예부터 진도에서 나는 곡식으로 진도군민만 먹는다면 3년을 먹는다고 했었고, 전라도가 곡창지라서 머슴살이를 굳이 머나먼 경상도나 산골 깡촌인 문경까지 갈 이유가 없으며, 문경이나 대구에서 진도를 오려면 서남방향으로 내려와야지 어째서 좋은 길 버려두고 하필 험하고 훨씬 길게 돌아서 다시 내려와야 할 북쪽 문경새재를 넘어서 위로 올라갔다는 점도 이해 불가의 허구적 이야기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불과 100년도 넘지 않은 이야기이므로 좁은 진도에서 어느 동네 누구인지는 금방 확인이 가능한 일인데 밝히지 못하는 점도 허구라는 확신이 듭니다.
허구인 이 이야기를 진도에서 더 이상 하지 말자고 제가 주장하는 뜻은 가뜩이나 교과서에 진도아리랑의 대표가사가 ‘문경새재는 웬고갠가’라는 가사로 올라 있어서 외지 사람들이 가락은 진도아리랑 가락을 부르면서도 정작 곡의 제목은 문경아리랑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우리 진도에 득이 안 되는 문경 머슴 얘기는 이제 진도에서 다시 보거나 더 들을 수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후렴구도 진도아리랑비에는 ‘아리 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로 올라 있으며, 교과서에는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 응 응 아라리가 났네’로 적혀 있어서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기에, 표준이 없다면 이 기회에 진도에서 대표 표준 진도아리랑 곡이나 표준 후렴구를 지정해서 각 관련 부처와 교과서 집필진에게도 배포하고 알려 줌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교과서는 검인정이기에 군청이나 문화원등 관이 나서서 집필진에게 표준 후렴구도 알려 주고, 왜곡과 오해를 낳는 ‘문경새재’를 ‘문전세재’나 제3의 다른 가사로 바꿔달라고 요청하기를 바랍니다.
진도아리랑의 표준은 당연히 진도 안에 있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라고
그 허구에 문경 머심땜시로 요즘 내내 공부를 하니라고 아리랑 기록과 어원을 찾다가 알게된 앞선 연대의 10여개를 알려드립니다. 물론 과문한 저보담 더 잘 아시는 분덜도 많이덜 계시겄제만 학계에서 보는 50개의 중요 어원설에 설이 낭자설과 문경 머슴설은 끼지 못하고 나머지 200여 개의 아류설 중에 하나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어짜믄 고만큼 우리 진도 얘기가 학계 중앙에 덜 알려졌다고도 보겄지람짜.
1) 南師古(1509-1571)의 格庵遺錄(격암유록) 제60장 甲乙歌 亞裡嶺설.
조선 명종 때 예언가인 본관 영양(英陽). 호 격암(格庵)인 남사고의 격암유록 제60장 갑을가에 실린 亞裡嶺이라는 이 글이 아리랑 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亞裡嶺有停車場 苦待苦待多情任
(아리령유정거장 고대고대다정임)
亞亞裡嶺何何嶺 極難極難去難嶺
(아아리령하하령 극난극난거난령)
亞裡亞裡亞裡嶺 亞裡嶺閣停車場
(아리아리아리령 아리령각정거장)>
2) 李承薰(1790)의 蔓川遺稿(만천유고)에 啞魯聾(아로롱)설.
조선 영조 때 성호학파의 녹암계 학자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만천유고 농부사에 실린 권농가 중에 아리랑과 관련된 글귀가 있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事育生涯 努不憚
(사육생애 노불탄일세)>
3) 1865(고종 2, 乙丑)년에 경복궁 중수 공사와 관련해
전국에서 많은 노역자들이 오게되어 각 지역의 아리랑들이 그곳에서 많이 불려지고 서로 섞이게 되었으며, 그들에 의해서 전국으로 퍼졌다는 설이 아리랑의 전파와 정립에 대한 유력설이다.
이후 1930년 金志淵이 총독부 기관지≪조선≫에 자신의 박혁거세의 부인 閼英(알영)설을 말하며 경복궁 중수 당시 노역의 고통으로 南道山의 我耳聾(아이롱)설. 姜大鎬의 我難離(아난리)설. 金德長의 我離娘(아이랑)설... 등의 설에 배경이 되었다고 기술했다.
4) 호머 B. 헐버트(1886 육필본, 1896 인쇄본 악보)남편을 사랑한다의 뜻으로 기술.
<육필본 후렴은 ‘아라렁 아라렁 아라디오’ 인쇄본은 A-ra-rúng a-ra-rúng a-ra-rio 아라릉 아라릉 아라리요 로 실려있음.>
5) 1894년 일본 유우빈호우치신문(郵便報知新聞)의 ‘아리란’
1894년 5월 31일자 일본의 유우빈호우치신문(郵便報知新聞)에 ‘朝鮮의 流行謠’에 조선의 아리랑에 관한 사설과 해석이 실렸다.
‘아리란(아리랑)’을 “산간벽지나 포구의 아이들까지도 입에 담고 있다”고 하여 당시 아리랑이 아이들까지도 부를 정도로 유행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인 등살에 나는 못살아 흥
에이구 데구 흥 귀챦고 성가시다 흥
단 두리만 살자꾸나 에구데구 싫다 싫어 흥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얼쑤 아라리야
산도 싫고 물도 싫은데 누굴 바라고 여기 왔나.>
6) 黃玹(황현, 1894)의 매천야록에 阿里娘(아리랑) 기술.
<임금은 매일 밤마다 전등불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케 하였는데 그것은 ‘아리랑타령’이라는 것이다. ‘타령’이란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참판 민영주(閔泳柱)를 원임각신으로 하여 뭇 광대들을 거느리고 아리랑타령을 부르는 것을 전담하여 광대들의 실력을 평가해 상방궁에서 금과 은을 내어 상으로 주도록 하였다.
이는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대궐을 침범할 때에서야 중지되었다.>
7) 플래쳐(1896)의 미국 체류 조선 유학생의 최초 육성 ‘아라랑(Ar-ra-rang) 녹음’. 미국의 여류 인류학자 플래쳐(Alice C. Fletcher, 1838~1923)가 1896년 7월 24일 미국 워싱톤에서 조선 사람이 부른 11곡의 조선민요를 원통형 음반에 녹음하였는데, 그 중에 안종식(Jong Sik Ahn)과 양손(Rang Son), 이희철(He-chel-ge)이 부른 ‘아라랑(Love Song: Ar-ra-rang)’이 있다.
8) 崔鳴煥(1908)의 我農(아농)설. ‘我農歌’의 이두성 표기 관련설.
1908년 6월 대한학회월보(5)에 실린 최명환의 아농가(我農歌) 속소위(俗所謂) ‘아르렁타령’
我農焉 我農焉 我我利
(아농언 아농언 아아리)
我農焉 我芽秀 我我利
(아농언 아아수 아아리)
9) 李尙俊(1914)의 朝鮮俗曲集 ‘아르렁타령’
1914년에 조선인에 의한 최초의 서양 오선보의 아리랑 기보. 황해도 재령 출신의 이상준(李尙俊, 1884~1948)이 우리 민요를 서양 오선보로 채보한 『조선속곡집』(1914)을 편찬. 이 책 상권에 ‘아르렁타령’이라는 제목으로 아리랑을 채보하였는데 당시 경서지방에서 유행하던 경기토리의 ‘경기자진아리랑(구조아리랑)’으로 오늘날 ‘서도아리랑’으로 불리는 아리랑이다.
10) 1916년 독일학자가 녹음한 러시아 고려인 2세 아리랑.
1차 세계대전 독일과 러시아 전투에서 러시아 병사로 참전한 고려인 2세 김 그리고리(김홍준, 당시 27세)와 안 스테판(한국이름 미상, 당시 29세) 두 사람이 독일군 포로가 되어 프로이센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에, 빌헬름 알베르트 되겐(1877~1967) 등 언어학자들이 왁스판에 녹음해 두었다가 1933년 에스피판으로 옮겼으며 현재 디지털 음원으로 원본과 함께 라우트 아카이브에 보관하고 있다. 당시 본국인 조선에서 유행되었던 경기아리랑(구조아리랑)인데, ‘아리랑’과 ‘아라랑’이란 발음이 함께 들어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자
아라랑 고개 집을 짓고
오는 이 가는 이 정들어 주지>
이상 아리랑에 관해서 학계에 발표된 중요 연원과 어원설 50여 개 중에서 10개만 올립니다. 중요 50여 개 외에 아류설도 200여 개로 수많은 설들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어느 것도 정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 합니다.


<진도 송현 출신 조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