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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예레미야 23장 9-15절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 ①
구약에 보면 여러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지금 예레미야서를 보고 있지만 예레미야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된 선지자도 있었지만 거짓된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듣기에 좋아하는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레미야 14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10절에서 12절을 보시면 유다 백성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말을 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참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저들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확실한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14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즉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을, 16절에서는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23장도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인데,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먼저 9절을 보시면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 때문이라” 여기 보면 내 마음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린다고 되어 있는데, 거짓 선지자들 때문에 예레미야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취한 사람 같고 포도주의 잡힌 사람 같다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 여호와와 그의 거룩한 말씀 때문입니다.
여호와와 그의 거룩한 말씀은 이후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선지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을 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해야 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람들의 마음만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답답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주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주와 상관없이 말하는 그 일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통 받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을 보시면 “이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 백성을 위해 세워진 선지자입니다. 남유다 백성을 위해 세워졌다고 해서 남유다 백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활동 영역이 주로 남유다를 향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느냐 할 때 유다 땅에 간음하는 자가 가득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간음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하나는 육체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께서 7계명을 통해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위반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유다 땅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 소돔과 같다, 고모라와 같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그만큼 간음하는 일이 편만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영적인 간음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신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만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이방 신들을 섬기는 일들이 많았는데, 이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통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고 하나님만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하다고도 말하는데, 정직하게 말해야 할 자들의 입에는 거짓이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땅에는 간음과 거짓으로 온통 오염되어 있어서 악한 일 외에는 보이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간음과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해서 간음, 거짓만 행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온갖 악이 지금 유다 땅에는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에 대하여 아모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암2:4) 한 마디로 지금 유다 땅에 있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면서 그 율례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행한 바를 알고 그것에 대한 심판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조상들의 길을 따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저주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른다고 되어 있는데, 서두에 언급한 예레미야 14장에서도 유다 땅에 가뭄으로 저주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저주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이 땅은 어떤 땅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온갖 소출이 풍성한 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런 소출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저주하여 어떤 결실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만드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남유다 백성만 그러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9절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이 말씀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지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알리시는 것은 유다 백성의 죄악도 심각하지만 그들의 죄악보다 더 심각한 것이 그들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의 죄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10절은 선지자라고 하는 자들부터 간음을 행하고 거짓을 일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악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여기서는 선지자 외에도 제사장까지 포함하여 말하고 있는데,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사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참된 선지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예레미야가 이 글을 쓸 때 거짓 선지자의 무리 속에 예레미야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외에 제사장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할 때는 그만큼 종교지도자들 대부분이 악을 행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이 어디에서 악을 행하느냐? 내 집이라고 일컫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 종교지도자라 할지라도 점과 흠이 있습니다. 점과 흠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인 이웃 사랑에 있어 충분한 열매를 나타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악한 열매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 심각한 죄악인데,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사악한 짓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의 첫 번째 돌판 부분과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실시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모독한다는 것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척하면서 그것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매튜 헨리).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전에서 행한 제사장의 사악함이란 성직자라는 미명 하에 일종의 장사나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때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부패시키고 간음케 했다. 그들에게는 부정한 이득이나 수입 외에 과연 무엇이 신앙의 대상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섬김을 짓밟고,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위해 율법을 부패시키고 왜곡시킬 때 그들의 불경스러움은 일상생활의 습관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즉 성직을 행해야 하는 데에서까지도 볼 수 있다.”
이런 일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만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이 있었지만 그 성전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마태복음 21장 12절과 13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단순히 매매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지금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종교지도자들이 강도와 다를 바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일이 오늘날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간혹 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판을 보면 다 맞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장사하는 곳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교회를 향해 좋지 않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교회가 분명 있다는 것이고 세상이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모습을 분명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집이란 무엇입니까? 이사야 56장 6절과 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주님께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있는 곳,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곳입니다. 특별히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언약을 굳게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내용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거기는 결코 하나님의 집이라 일컬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어떤 장소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내용이 이러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의 말씀으로 하자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통 세상이 가자고 있는 정신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는데, 12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어두운 가운데 미끄러운 곳과 같이 되고 그들이 밀어냄을 당하여 그 길에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을 벌하는 해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걷는 그 길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항상 밝게 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길이 미끄러운 바닥 위에 있는 것을 발견케 하신다는 겁니다. 미리 볼 수 있다면 대비라도 하겠지만 어두운 가운데 있다가 갑작스레 미끄러운 곳을 만나기 때문에 전혀 대비할 겨를 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누가 미끄러운 곳을 향하여 밀어내는 것처럼 있어서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엎드러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날이 그들을 벌하는 해인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려 그들을 벌할 때가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을 들춰내고 계실 때는 모든 백성들의 죄악의 심각성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 때문에 백성들이 그러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물론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들 탓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선지자들의 가르침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가르침도 있고 거짓된 가르침도 있다고 할 때 참과 거짓 사이에 백성들의 선택이 거짓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 때문에 그 길을 갔다는 것으로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죄를 더 심각하다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을 가르치는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절에서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시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 하나님의 양식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것이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서 말씀하시는 바가 이것입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그런데 누가 앞서서 더하는가? 다름 아닌 말씀 사역자들입니다. 누가 앞서서 제하여 버리는가? 마찬가지로 말씀 사역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앞서서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겁니다.
혹 여러분에게 제가 말씀에 합당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만 전할 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말씀에 여러분의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안에서는 헛되고 잘못된 것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내용을 접했지만, 그것도 오랫동안 접했지만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교회를 옮겨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할 수만 있다면 이런 내용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라고 고백한다면 반드시 합당한 말씀을 전하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거리가 좀 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냥 일반교회를 가게 될 때 처음에는 우리의 내용으로 비판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비판도 무뎌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찾을 수 없는 어떤 요구를 해도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저희 교회는 특별한 절기를 드리지 않습니다. 지난주가 부활주일이었다고 하는데, 부활주일 성탄주일 이런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고,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내용은 사실 주일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부활절과 같은 절기들을 성경이 명하고 있는가? 전혀 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드리지 말라는 말씀도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그런 뜻으로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관련된 절기들이 중요하다면 왜 성경이 침묵하고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탄생이 중요하다면, 그것을 기념해야 할 날이라면 왜 사도들이 그 날을 지키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의 정신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부활만 있느냐? 그리스도의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내용도 있습니다. 주일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성경이 명하고 있지 않는 절기들을 지킵니다. 그것도 주의 이름으로 지킵니다. 이것이 말씀과 상관없는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계속해서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을 보시면 “내가 사마리아 선지자들 중에 우매함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고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앞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남유다 백성을 위해 세워진 선지자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13절에서는 사마리아 선지자들, 다시 말해 북이스라엘을 위해 세워진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고 14절에서는 예루살렘 선지자들, 다시 말해 남유다 백성을 위해 세워진 선지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언제 활동했느냐 하면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째 되는 해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렘1:3). 이미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활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선지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비교적인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마리아 선지자들에 대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 가운데 우매함이 있음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 즉 바알을 의탁하고 예언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반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가증한 일을 있음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들이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죄악을 지적하는 것이고, 후자는 이웃 사랑의 실천과 관련된 죄악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떤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죄에 대하여 큰 죄 혹은 작은 죄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라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째 돌판 내용이 하나님 사랑과 관련되어 있고 둘째 돌판 내용이 이웃 사랑과 관련 있다고 할 때 우선시 되는 것은 분명 첫째 돌판 부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도록 만든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죄가 더 큰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의도는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남유다의 죄를 말하고자 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죄도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들과 비교해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죄도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교하기를 저들은 우매한데 반해 너희는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웃 사랑의 정신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단지 이웃 사랑의 정신만 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마음도 없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북이스라엘의 우매함이 북이스라엘의 우매함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의 우매함으로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 선지자들의 죄는 더 심각한데, 너희는 사마리아 선지자의 우매함과 함께 가증한 일까지 행하고 있다는 것이 지금 13절과 14절의 비교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선지자의 의도인 것입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거짓 선지자들의 죄가 무엇인가? 우매함입니다. 하나님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모든 것을 미신이라고 했습니다. 남유다 선지자의 우매함은 미신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미신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를 드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된 길 가운데 어떤 모습까지 나타나고 있느냐 할 때 가증함까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그들이 맺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웃 사랑과는 먼, 이웃을 해하는 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예가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선 내용을 통해서도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악을 행하는 자를 공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서 그들이 더 이상 돌이키지 못하도록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무엇과 같다고 하시느냐?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과 다름이 없고 그 주민은 고모라와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 시대 때 소돔 성이 멸망하게 되는데, 멸망할 만큼 그 죄악상이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할 때의 남유다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 임해도 아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일이 누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냐? 너희 거짓 선지자들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데, 16절만 보시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6절 이하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할 것인데, 분명한 것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거짓 선지자들보다 지금 남유다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선지자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좋은 것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너희를 벌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벌하시는가? 사악함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3절과 14절의 비교 속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북이스라엘의 경우는 예배 자체가 거짓된 예배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성전에서 예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이스라엘의 예배는 한번도 바른 예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온통 거짓된 예배로 가득했습니다. 반면 남유다의 경우는 바른 예배를 드리는 외적인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 때 들려지는 말씀은 무엇이냐? 너희가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선지자들로부터 나오는 말은 온통 거짓된 것으로 있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악함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이 부분입니다. 형식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외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형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받을만한 것으로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만을 듣는 자로 있는가? 나아가 듣고 있다면 그것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경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이 아닌 것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때로는 성경으로부터 확인 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식법의 폐지 안에 다윗의 규례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분명 거절해야 할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예배는 드리지만 거짓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심각성이 어떠하겠습니까?
남유다의 경우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 형식은 거짓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더더욱 심각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목회자들은 그들의 길을 돌이키지 않는 이상 야고보서 3장 1절의 말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리고 그만큼 목회자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다만 이런 말씀 때문에 여러분이 선택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마치 목회자 때문인 것처럼 핑계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7장 11절의 말씀도 있기 때문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목회자로 있는 저는 이 말씀으로 자신을 더욱 살펴야 할 것이고, 또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의 무오한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이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들은 배제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