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왜란과 호란
[1] 임진왜란의 발발
1)16C 조선의 정세:
① 사회적 혼란 가중 + 국방력 약화
② 중종 때 3포 왜란 등 왜구의 소란 빈번 -> 비변사 설치, 이이의 십만 양병설 주장
③ 그러나 적극적인 대책이 강구되지는 못함
* 당시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파악하자는 주장이 있어, 서인 출신의 황윤길과 동인 출신의 김성일이 사신으로 갔다. 그런데, 당시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일본은 전혀 그럴 예정이 없다고 보고하여 혼선이 있었다. 이때 동인 일파는 " 서인들이 공연히 전쟁 이야기를 꺼내 국가에 혼란을 주려고 한다"고 하며 서인측을 비난했고, 선조역시 이에 동조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반대로 나타나게 되었다....
2) 일본의 정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통일 -> 불평세력의 무마를 위해 대외 전쟁을 감행
명분: "정명가도(整明假道=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뜻)"
3) 임진왜란의 전개
1592년 4월 13일 pm 05시.. 왜군 침략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 -> 끝내 함락됨.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으로 북상-> 신립이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배.
조선 정부 의주로 피난
왜군은 침략 20일만에 한양 점령, 북상 -> 평양, 함경도까지 침입
[2] 수군의 승리
이순신-전쟁의 기운을 이미 느끼고,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저장.
옥포 해전 승리-> 사천(거북선 처음 사용), 당포, 당항포 승리-> 한산도 대첩 승리 -> 남해의 제해권 장악->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수호 -> 왜군의 수륙 병진작전 좌절
[3] 의병의 항쟁
1) 의병항쟁의 이점: 향토 지리에 익숙하여 향토 조건에 맞는 전술과 무기로 왜군에 타격을 줌 (유격전술, 기습 작전 활용)
2) 의병장들의 활약-고경명, 곽재우, 조헌, 정문부 등
의병장-주로 전직 관리, 유학생, 승려 출신 / 구성원 - 주로 농민 출신
3) 의병항쟁의 의의: 이순신의 수군의 활약과 함께 전황을 반전시킴, 관군에 투입되어 관군의 전투력을 강화. 더욱 조직화됨
[4] 왜란의 극복
1) 극복 요인: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승전
2) 명에 원군 요청 -> 평양성 수복, 왜군을 남으로 내침 & 권율의 행주산성 승리
3) 휴전회담-3년간 계속되었으나 결렬
4) 정유재란 발발
-육지전: 진산에서 조,명 연합군의 승리
-해전: 이순신의 명량 해전 승리 (왜군 133척 Vs 조선군12척)
-일본의 국내 정세: 도요토미의 사망
5) 정유재란 결과-왜군의 패주, 노량해전에서 최후의 일격(500척중 50척 도주), 이순신의 전사. -> 7년간의 전쟁 종결.
[5] 왜란의 영향
1) 승리의 요인:
민족의 잠재적 역량 우월 (관군 차원의 능력은 뒤졌으나, 전 국민 차원의 국망 능력이 일본을 능가 = 의병의 활약이 컸다는 뜻. ^^)
문화적 우월감으로 자발적 전투 의식을 가짐
뛰어난 정신력.
2)왜란의 영향
▷ 대내적 영향
① 인구 격감
② 농촌 황폐화
③ 국가 재정 궁핍
④ 식량 부족 해결을 위해 공명첩 발급
*공명첩이란? 이름(이름 명)란이 공(빌 공)란인 첩지(신분증명서), 즉 국가가 발행하는 백지 양반 신분증이다. 막대한 돈을 주고 00의 벼슬자리를 내린다는 내용의 공명첩을 사면, 그 빈 성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으면 되는 것이다. -> 단기적으로 국가 재정확보에 기여했으나, 장기적으로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역할을 했다. -> 결국, 이러한 신분질서의 문란이 원인이 되어 "삼정 문란"의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⑤ 이몽학의 난 등 민란이 도처에서 발발
⑥ 토지 대장(양 안)과 호적 소실-> 조세, 요역의 징발과 신분의 구분이 곤란해짐
▷ 대외적 영향
①조선과 명이 전쟁에 지친 틈을 타 북방 여진족이 성장
②문화적 후진국이던 일본이 조선에서 각종 문화재와 기술자, 학자를 데려가 일본의 문화가 급속히 발전함.
[6] 광해군의 중립 외교
1) 광해군의 전후 복구 사업
① 양안과 호적을 새로 작성 -> 국가 재정확보 목적
② 산업 복구 : 성곽과 무기 수리, 군사 훈련 실시
③ 동의보감 편찬: 전란 중 질병과 전염병 만연을 수습하려는 목적 (허준)
2) 중립외교 정책
① 배경: 누르하치의 등장과 여진의 강성, 명 약화 -> 명이 조선에 출병을 요구
② 광해군의 태도: 강홍립으로 하여금 출병하게 한 후, 정세를 보아 향배(명을 도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게 함.
③ 결과: 전화가 조선에 미치지 않음
* 광해군은 왕위에 오를 때부터 적자인 영창대군이 어리다는 이유로 서출로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반대파가 많았다. 광해군의 지지세력은 북인이었고, 서인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서인들은 광해군의 이러한 중립외교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여 비난이 심했는데, 얼마 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결국 "유교적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하여 서인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되었다.
-> 인조반정
[7] 호란과 그 영향
1) 배경:
광해군이 밀려난 뒤, 인조의 서인 정권이 적극적인 "친명 배금" 정책을 취함
*서인은 의리와 명분을 앞세워 명이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와주었으므로, 조선도 명을 도와 금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의 요동을 탈환하기 위해 철산 앞바다 "가도"에 주둔함으로써 후금을 자극함
인조 반정 후 논공행상(공을 논해 상을 행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킴.
2) 정묘호란 발발(1627)
: 후금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옴. 정봉수, 이립등이 공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싸웠으나, 역부족 -> 후금을 본래 명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쉽게 화의가 이루어짐 -> 양국이 "형제관계(후금이 형, 조선이 아우)"를 맺기로 하고, 후금은 철수함
3) 병자호란의 발발(1637)
배경: 후금이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며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 조선 조선은 다시 주전, 주화의 양론으로 갈라져 싸움-> 척화 주전론의 승리-> 병자호란 발생.
전개: 청 태종이 한양을 점령-> 인종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대항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에 따라 화의
결과: 국토 황폐화, 청에 대한 적개심 고조 -> 후일 북벌론으로 이어짐
[8] 북벌론과 나선정벌
1) 북벌론
내용: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
주장자: 송시열, 송준길, 이완, 임경업
결과: 효종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림
*사실 북벌은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2) 북학운동 :청이 강희, 옹정, 건륭 3대를 거치며 융성하자, 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주장 (북벌론과는 정 반대..)
3) 나선정벌
배경: 러시아가 시베리아 지방에서 성장하여 청의 국경지방을 침략
전개: 청이 조선에 출병을 요청, 러시아와 함께 싸워줄 것을 요구
결과: 북벌을 하려고 키웠던 군사들(조총부대)을 동원해 청을 도와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