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 병문안을 갔던 오 진사가
부인을 처가에 남겨두고 혼자서 집으로 오다 비를 맞았다.
대문을 두드리자
고된 일로 머슴들은 곯아떨어졌는지
초당에 있는 침모가 나와서 문을 열었다.
“여보게, 내 옷이 흠뻑 젖었네. 갈아입을 옷 좀 갖고 오게.”
침모가 부리나케 오 진사의 바지저고리를 가지고 와
사랑방 앞에 놓고
“나으리, 문밖에 새 옷을 놓아뒀습니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오 진사가 불러세웠다.
“여보게, 젖은 옷이 달라붙어 팔이 빠지지 않네.”
침모가 조심스럽게 사랑방으로 들어가자
오 진사는 촛불을 꺼버리고 침모를 끌어안았다.
밖에는 가을비가 끝없이 내리는데
사랑방에는 오 진사의 가쁜 숨소리만 가득했다.
오 진사가 긴 숨을 토하고
방바닥에 여덟팔자로 드러눕자
주섬주섬 제 옷을 챙긴 침모가 사랑방을 나가
초당으로 돌아갔다.
서른한살 침모는
열일곱살 때 중농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이날 이때껏 아이가 없어 애만 태우다
무자식 팔자소관으로 돌렸다.
남편은 법 없이도 살아갈,
세상 둘도 없이 착한 데다
보릿고개 걱정 없이 곳간은 차 있어
등 따뜻하고 배부른데
단 하나, 자식 없는 게 한이 됐다.
침모는 친정으로 가고
남편이 한달간 함께 살도록 씨받이를 마련해줬다.
감감무소식에 다른 씨받이를 붙여줘도 역시나 허사라
침모가 석녀가 아니고
남편이 씨 없는 수박이라는 게 밝혀졌다.
원체 바느질 솜씨가 좋아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여기저기 대갓집에서
겨울 한철 그녀를 침모로 데려갔다.
올해는 오 진사 댁에 침모로 들어와
불과 보름도 안돼
오 진사로부터 겁탈을 당한 것이다.
석달이 지나 세밑이 다가오자
헛구역질을 하더니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착한 농사꾼 남편 전 서방은
마누라가 남의 씨를 받았다는 걸 알았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마누라 배를 쓰다듬으며 싱글벙글했다.
이듬해 초가을에 옥동자를 낳았다
. 남편 전 서방은 그 바쁜 농사철에도
틈만 나면 산모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하늘로 추어올렸다.
하루는 대처에 나가 작명소에 들러
‘전도읍’이란 이름을 지어왔다.
침모는 착잡했다.
세상에 여자로 태어나 씨를 받아
뱃속에서 열달을 키워
제 새끼를 낳았다는 감격은 작아지고
아비 아닌 아비가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노라니
괴롭기만 했다.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소문을 듣고 서당에 오 진사가 찾아왔다
. 훈장님과 오 진사는 서로 아는 사이지만
새삼 훈장님은 깜짝 놀랐다
. 학동인 전도읍과
오 진사의 눈 매무새랑 긴 인중 등이
너무나 닮았던 것이다.
오 진사도 도읍을 자세히 보고 놀랐다.
학동들을 자습시켜놓고
두사람은 건넛방으로 가 술잔을 주고받았다
. 훈장님이 말했다.
“도읍은 신동입니다.
이제는 제가 가르칠 게 없어요.”
겸손의 말이 아니었다.
“저의 스승인 붕흔 선생에게 더 배워야 하는데
삼십리나 떨어져 있고….”
이튿날 훈장님과 오 진사와 도읍이
붕흔 선생을 만나고 왔다.
며칠 후 오 진사가 보낸 하인이 말잡이가 돼
도읍이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붕흔 선생을 찾아갔다.
그 집에서 기숙하며 글공부를 하다
한 장날 터울로 당나귀가 도읍을 데려오면
오 진사 댁에선 백숙으로 보신하도록 했다.
그러곤 오 진사와 사랑방에서 하룻밤 자고
제 집에는 잠깐 들렸다가
다시 당나귀를 타고 붕흔 선생 댁으로 갔다.
오 진사 자신은 여덟번이나 과거 시험을 봤고
아들 셋도 몇번 보다가 포기했다.
도읍은 열다섯살 때 장원급제를 했다
. 오 진사는 소식을 듣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오 진사 댁 넓은 안마당에 가림막이 쳐지고
뒤뜰에는 소 한마리 돼지 일곱마리를 잡은 고기로
따당 따당 칼질하는 소리가 요란하고
가마솥은 펄펄 끓었다.
백마를 타고 어사화 꽂은 복두를 쓴 도읍이
고개를 넘어 동네로 들어서자
고을사람들로 길이 막혔다.
도읍을 태운 백마는
오 진사 댁으로 가지 않고 침모 집에 갔다.
말에서 내린 도읍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임금님이 하사한 감로주를 따라
아버지(?) 전 서방에게 올리고
복두를 벗어 아버지 머리에 씌운 뒤
큰절을 올렸다.
전 서방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어머니 침모는 전 서방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쏟았다.
저녁나절 복두를 집에 벗어놓고
도읍은 오 진사 댁으로 갔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른 오 진사는
사랑방에서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도읍이 사랑방으로 들어가 큰절을 올리며
“오 진사 어른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자 오 진사가 “내가 아비야, 너의 아비!”
라며 집이 떠나갈 듯이 고함을 쳤다.
“진사 어른, 고정하십시오.”
도읍은 끝내 아버지 소리를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