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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위선과 허위의 바다-어니스트 헤밍웨이(3)
헤밍웨이는 자신의 부모의 종교와 윤리적 문화로 대표되는 그릇된 세상을 물려받았으며, 그 세상을 진실한 세상으로 대체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가 말한 “진실”은 무슨 뜻일까? 그가 노골적으로 물려받은 부모의 기독교적인 진실은 아니었다(그는 그 진칠을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과거로부터 도출된 그 모슨 신념이나 이념이 주장하는 진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정신을 반영한 진실도 아니었다. 그가 말한 진실은 그 스스로 보고 느끼고 듣고 맡고 맛본 것이었다. 그는 콘래드의 문학 철학과 방법 -“나 자신이 느낀 진실에 철저히 충실할 것”-을 자신의 목표를 집약한 것이라며 동경했다. 그것이 헤밍웨이의 출발점이엇다. 그런데 진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전문 작가를 포함한 대부분은 글을 쓸 때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생기 없는 말씨와 단어의 조합, 빈약한 메타포, 클리셰와 문학적 착상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반복적이고 평법한 사건들을 급하게 취재하기 일쑤인 저널리스트들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캔자스시티 스타>에서 빼어난 훈련을 받는 혜택을 누렸다. 이 신문의 편집자들은 기자들이 명료하고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클리셰가 없는 영어를 사용하도록 110가지 규칙을 담은 독자적 스타일의 책을 편집해 놓고는, 그 규칙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훗날 헤밍웨이는 그 규칙들을 “내가 글쓰기 분야에서 터득한 최고의 규칙”이라 칭했다. 1922년에 제네바회의를 취재할 때, 그는 링컨 스테펀스로부터 전보 문체라는 냉혹한 문체를 배워서는 환희에 겨워 빠른 속도로 그 문체를 터득했다. 그는 스테펀스에게 그가 쓴 첫 성공작을 보여주며 탄성을 질렀다. “스테펀스, 이 전보를 보세요. 군살도 없고, 형용사도 없고, 부사도 없어요. 피와 뼈와 근육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이건 새로운 언어예요.”
헤밍웨이는 이런 저널리스틱한 토대 위에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그 나름의 새로운 방법을 구축했다. 그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 <아프리카의 푸는 언덕>, <오후의 죽음>, <바이 라인>을 포함한 여러 작품에서 글쓰는 법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그가 스스로 규정한 “글쓰기의 기초 원칙”은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그는 한때 콘래드의 뒤를 이어 소설이라는 예술을 이렇게 규정했다. “당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 당신에게 흥분을 안겨준 행동을 찾아내라. 그리고 독자들 역시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명료하게 글로 옮겨라.” 모든 것이 간결함, 경제성, 단순성, 강렬한 동사, 짧은 문장, 불필요한 요소나 겉치레의 제거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그는 “산문은 건물이지 실내장식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는 끝이 났다”고 썼다. 헤밍웨이는 정확한 표현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샅샅이 뒤졌다. 신문 스타일의 형성기에 그가 시인이기도 했다는 것을 명심하라. 에즈라 파운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파운드로부터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밝혔다. 파운드는 “정확한 단어-사용할 수 있는 딱 하나의 정확한 단어-를 신뢰한 사람이었으며, 형용사를 믿지 말라고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그는 조이스도 꼼꼼하게 공부했는데, 조이스는 그가 존경하고 모방하려 했던 정확한 언어를 파고들었던 또 다른 작가였다. 문학적 선조를 따져 보면, 헤밍웨이는 사실상 키플링과 조이스의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진실은 헤밍웨이의 문체가 독자적으로 탄생한 문체라는 것이다. 1925-1950년의 4반세기동안 그가 사람들의 글 쓰는 법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끼친 영향력은 너무나 압도적이고 결정적이었다. 이후로도 계속된 그의 영향력은 너무나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쓰는 산문, 특히 소설에서 헤밍웨이적인 요소를 빼 버리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 그런데 그의 글은 1920년대 초반에는 세상의 인정을 받기 어려웠고, 심지어는 출판하기도 힘들었다. 첫 작품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는 요행수를 노린 전형적인 아방가르드 작품으로, 파리 지역에서만 출판됐다. 대형 잡지들은 그의 소설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1925년에 모험적이라고 자인한 <다이얼>은 뛰어난 소설 <패배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을 여전히 거절하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진정으로 독창적이었던 위대한 작가들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자신만의 시장을 스스로 창출해서, 독자들에게 그의 취향을 전염시켰다. 꾸밈없고 정확한 사건 묘사를 그 사건에 대한 정서적 반응에 대한 미묘한 암시와 탁월하게 결합시킨 헤밍웨이의 방법은 1923-1925년에 모습을 드러냈고, 1925년 <우리들의 시대>의 출판과 더불어 크게 약진했다. 포드는 헤밍웨이를 미국의 일류 작가로 호명할 수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글 솜씨에 가장 성실하고 통달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가” 에드먼드 윌슨에게 이 책은 “두드러지게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예술적 품위”를 지닌 “최상급”의 산문을 보여줬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1926)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무기여 잘 있거라>(1929) 등 두 편의 생기 넘치고 비극적인 소설이 재빨리 첫 성공작의 뒤를 이었다. 이 책들은 수십만 권씩 팔려나갔다. 독자들은 읽고 또 읽었고, 온갖 종료의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음미하고 토해냈으며, 시기심을 느끼며 꼼꼼히 파고들었다. 1927년에 도로시 파커는 <뉴요커>에 기고한 헤밍웨이의 단편집 <남자들만의 세계>의 비평에서 헤밍웨이의 영향력이 “위험하다”고 밝혔다. “그가 한 간결한 일들은 꽤나 따라 하기 쉬워 보인다. 그런데 그것을 모방하려 기를 쓰는 젊은이들을 보라.”
헤밍웨이의 수법은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성공적으로 모방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주제, 특히 작품의 도덕적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목표는 노골적인 계몽주의는 무엇이든 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담긴 그런 요소들을 비난했다. 위대한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인간에 대한 경이적이고 날카로우며 진실한 묘사 때문에 나는 <전쟁과 평화>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나는 위대한 백작의 생각은 결코 믿지 않는다……그는 지금껏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통찰력 있고 진실한 작품을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장황한 구세주적인 사고는 다른 많은 복음주의적인 역사 교수를 능가하지 못한다. 나는 그로부터 내 자신의 ‘사고’를 불신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가급적 충실하게, 솔직하게, 객관적이고 겸허하게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헤밍웨이는 그의 최고작에서 독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항상 기피했다. 등장인물의 행동에 관심을 끌기 위해 독자를 자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들은 시종일관 세속적인 신흥 윤리학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다. 이 윤리학은 헤밍웨이가 사건과 행동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부터 직접 솟구쳐 나왓다.
헤밍웨이가 그토록 원형적인 지식인이 된 것은 그가 품고 있는 윤리관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윤리관의 본질은 미국인의 정신을 반영했다. 헤밍웨이는 미국인을 원기 넘치고 활동적이며 힘찬, 때로는 폭력적인 사람들로 봤다. 미국인은 행동가, 성취자, 창조자, 정복자, 조정자, 사냥꾼, 건축가였다. 헤밍웨이 자신이 원기 넘치고 활동적이고 힘찼으며, 때로는 폭력적이어/ㅆ다. 그는 파운드와 포드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야기를 끊고 새도우 복싱을 하면서 포드의 스튜디오를 돌아다닌 적이 잦았다. 그는 광범위한 육체적 활동에 숙달된 거구의 강인한 남자였다. 미국인이자 작가인 그가 행동하는 삶, 그리고 행동을 묘사하는 삶을 살아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행동은 그가 천착한 주제였다.
물론 새로운 것이라곤 없었다. 행동은 키플링이 다룬 주제였다. 키플링의 주인공이나 소재는 군인, 강도, 엔지니어, 선장, 크고 작은 영역의 통치자들로, 사실상 긴장감과 폭력적 행동에 주기적으로 휩싸이는 경향이 있는 사람이나 사물, 심지어는 동물과 기계도 등장했다. 그런데 키플링은 지식인은 아니었다. 그는 천재이고 귀재였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 그 자신의 지력만으로 세상을 개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지혜의 많은 부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기는 커녕 보잘것없는 인간은 기존의 법률과 관습을 수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열렬히 주장했으며,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존재들을 재미있게 그려냈다. 헤밍웨이는 행동을 갈망했고, 열정적인 수법으로 그 행동을 묘사했던 또 다른 작가인 바이런에 가까웠다. 바이런은 친구 셸리의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계획을 믿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셸리의 사상은 활용 가능한 관념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인 이상이었다. (셸리는 자신의 작품 <줄리안과 마달로>에서 바이런의 주장을 공격한다). 그렇지만 바이런은 그 나름의 윤리학 체계를 형성했다. 이 체계는 그가 아내와 영국을 영원히 떠날 때 거부했던 기존의 윤리 규범들에 대한 대응책으로 고안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고 순전히 이런 관점에서만, 그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윤리 체계가 충분히 논리적이었음에도 바이런은 그 체계를 정식으로 글로 옮기지는 않앗다. 하지만 그의 윤리관은 그가 쓴 편지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위대한 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과 <돈 주안>의 페이지마다 흠뻑 스며들었다. 바이런의 윤리관은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행동으로 표현된 명예와 의무의 체계였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바이런이 선과 악을 어떻게 보았는지, 특히 영웅적 행위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명료하게 알게 된다.
헤밍웨이도 예증을 들면서 비슷한 태도로 일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은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그레이스(기품)”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묘사했다(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떠올려 보면 이상한 문장이다). 그렇지만 그는 개념을 정의하는 데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윤리관은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가 불가능했고, 그런 개념 위에서 체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면 그의 윤리관은 훼손되고 위축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헤밍웨이는 예증은 끝없이 들 수 있었고, 그 예증이 헤밍웨이의 작품 전체의 배후에 있던 추진력이었다. 그의 소설은 행동의 소설이었고, 헤밍웨이에게 있어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행동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이념의 소설이기도 햇다. 그가 보기에는 식사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조차도 도덕적인 표현이었다. 먹고 마시는 것에도 옳고 그른 것이 있고, 먹고 마시는 법에도 옳고 그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행동이 적절하게 또는 부적절하게, 고상하게 또는 비열하게 행해질 수 있었다. 작가 자신은 도덕을 지적하지 않지만, 그는 세상만사를 잠재적인 윤리의 틀 안에 넣어 보여 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개개인의 행동은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윤리의 틀은 개인적이었고 무종교적이었다. 기독교적인 틀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헤밍웨이의 부모, 특히 어머니는 아들의 소설이 비도덕적이며, 종종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는 소설에 담긴 강한 윤리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보기에 그 분위기는 그릇되고 불경했다. 헤밍웨이가 말한 것, 또는 내포한 것은 간통과 도둑질과 살인에도 옳고 그른 방식이 있다는 것이었다. 헤밍웨이의 소설의 정수는 권투 선수, 어부, 투우사, 군인, 작가, 스포츠맨, 그리고 일정하게 정해진 숙달된 행동을 수행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착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보통은 실패하고 마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비극이 발생하는 것은 가치관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거나 오해됐기 때문에 또는 그들이 내면의 결점이나 외부의 악의에 의해 배신을 당하거나 객관적 사실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실패자들도 진실의 목도를 통해, 진실을 감지하는 능력과 진실의 면전에서 떳떳이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용기로 인해 구원을 받는다. 헤밍웨이의 캐릭터들은 그들이 진실한가 아닌가에 따라서 의연하게 세파를 이겨내거나 세파에 무릎을 꿇는다. 진실은 그의 산문의 필수 요소이고, 그의 윤리 체계와 논리적인 원칙들을 꿰뚫는 한 가닥의 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