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보 총각 김 선생의 소녀시대 해후 스토리
강병철(작가)
76년 11월 3일 ‘학생의 날’,
그 2급 정교사 발령장으로 첫 출근하게 된 날짜부터 숙명일까, 그는 꿈나무들과 지지고 볶는 드잡이를 업으로 평생을 보내는 팔자인 줄만 알았었다. ‘하루 인생의 시계추’로 오후 여섯 시도 훌쩍 넘었는데 그는 출석부 든 채 분필을 먹고 도시락 검사를 하면서 아이들 눈동자 꿰맞추는 꿈을 버린 적이 전혀 없다. 모두들 사라진 그리움의 추억일까, 불안했던 기억도 늘상 옆구리에 끼고 살긴 했다. 총각 선생이었던 그가 순식간에 60대 중반을 넘겼으니 세월이 빛의 속도다.
온다던 비가 달포 째 오지 않던,
그 초여름은 지리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첫 발령지 태안여중으로 41년 만의 ‘등짐 진 환향’이랄까, 그렇게 옛 발령지에 두려움과 설렘이 혼재된 가슴으로 입(入)하면서, 무심히 교실 문을 열었을 뿐이다. 이상하다, 돌아온 빈 교실에서 판도라 상자처럼 술렁이는 촉감을 느낀 것이다. 출입문이 열리는 순간 빈 교실 어디쯤에서 아, 하는 탄성을 감지했던 것도 같다.
무엇일까, 연출된 드라마 같은 감탄사,
‘아’, 하는 탄성이 엄청난 울림으로 지축을 흔드는 것이다. 제자들이다. 교탁 가운데 쪽으로 장년의 아낙이 된 옛 소녀들이 숨은 그림으로 옹기종기 웅크려 있다가 짠, 하고 ‘깜짝 쇼’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랬다. 그미들의 이마에서도 마찬가지로 40년의 흔적이 선명하게 나타났으니 그게 세월이다. 젖은 눈시울과 웃는 입술, 어디선가 많이 만났던 그 스크린은 TJB 방송의 연출이 아니라 왠지 오랜 숙명으로 예고된 재회 풍경 같다.
모범생 영희, 애교쟁이 명숙, 깻잎머리 정옥, 요조숙녀 옥자, 귀염둥이 혜경 ……어느새 갱년기 아낙이 된 사춘기 소녀들의 재상봉이라니, 울보 스승의 눈시울이 먼저 젓는데 어느새 그 옛날 소녀들의 발갛게 상기된 볼도 그렁그렁 울음보가 터질 것 같다. 초로의 스승은 더듬더듬 아득한 시국을 떠올리다가.
“지금 어디 계시나?”
“저는 근흥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선생님.”
장년의 아낙이 말문을 간신히 꺼낸 채 어깨를 떨고 있는데.
“지금 내 앞에 있잖아.”
하필 흘러간 아재개그로 모처럼 추억의 스크린을 되새김질하는 중이다. 이번에는 수수꽃다리 후리늘씬 여인에게.
“뭐 하시나?”
“조그만 마트 해요.”
수수꽃다리 새까만 눈망울도 그렁그렁 넘치는데.
“지금 나랑 악수 하고 있잖아.”
또 설렁 멘트다. 쨍그랑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웃음보 터트리던 소녀들이 40년 연륜답게 수탉 같은 목청을 구구구 털어내면서 한꺼번에 화답의 예를 표한다.
‘큰 바위 얼굴’ 두상과 보름달 웃음, 수시로 변조되는 저녁놀 두 뺨 색깔까지 필시 토종 국산이지만, 기실 그의 전공은 영어과목이다.
“attention”
“bow”
40년 전처럼 반장 콩쥐가 원조 발음으로 인사를 올리자 나머지 장년의 아낙네들 그림자가 동시에 휘청 고개를 숙인다. 황홀하다.
“good morning teacther.”
“good morning girls”
칠판 앞에 선 스승의 자세가 전혀 녹슬지 않았으니 그는 뼛속까지 오리지널 평교사 체질이었음이 틀림없다. ‘참회록’ 영작 시간이라 더 리얼했었고.
“Let me introduce todays poem written by youn dongju.”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얼마나 사무치면 ‘잎새에 이는 바람’조차 심장이 빠개지게 흔들어놓을 수 있을까. 사춘기 시절부터 아리고 시리던 그 문장이 초로에 접어들수록 강철처럼 튼튼하게 자리 잡는다. 그런데도 스승께선 예전의 꿈나무들에게 자꾸만 한물 간 유머를 재생시키느라 낑낑 애를 쓴다.
“애국자의 반대는? 정옥이 학생 말해보세요.”
깻잎머리 정옥 아줌마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국노입니다.”
재빨리 대답하는 바람에 스승의 기획된 덫에 우히히, 또 걸려버렸다. 나머지 아낙네들이 그게 정답이 아니라, 며 화들짝 소맷자락 당겼지만 이미 늦었다.
“어른국자요. 이히히.”
모두들 피싯피핏 엉성한 웃음을 지을 판인데 정옥이 혼자 어리둥절 멍 때리다가 뒤늦게 ‘애와 어른의 반의(反意) 관계’를 파악하고 걀걀걀 배꼽을 잡다가 딸꾹딸꾹 침방울 튕긴다. 그러더니.
“선생님의 침방울을 너무 많이 맞아서…….”
앗! 쬐끔은 민망한 옛 필름을 상기시킨다. 그랬다. 첫 발령 총각 선생의 열정 강의에선 입술 파편이 물총처럼 터지기도 했단다. 그래봤자 번번이 앞자리를 넘지 못한 채 콩나물콩 소녀의 단발머리에 찰랑찰랑 얹혔을 뿐인데.
“그걸 받고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키가 컸어요.”
아닌 게 아니라 첫째 줄 단골이던 꼬맹이 소녀는 입학하자마자 미루나무처럼 쑥쑥 크더니 지금은 해바라기 아낙이 되어 장년의 그늘자락 펼쳐주는 중이다. 그게 스승의 침방울 덕분이라니 후덕한 심성은 예나 지금이나 초록빛 절개다. 객쩍은 농담 속에서도 스승의 눈이 벌개 진 것은 체질적으로 여린 심성 탓이다. 아, 40년 넘게 수고가 많으셨다. 모두들.
“옛날에도 잘 울었잖아요. 우리 선생님.”
그 70년대 여중생들은 왜 그리 슬픔이 많았을까.
아프다. 그것은 여자였고 가난이었고 시국과 생존의 싸움이었다. 고등학교에 보내달라는 딸내미 머리채 당기며 종아리 치던 아비의 빗자루 사연뿐이 아니다. 장학금 통지를 받고도 여고에 진학하지 못한 미자는 석별의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졸업식을 거부한 채 가발공장으로 떠나기도 했다. 담임이 찾아갔을 때 그미네 할머니는 갯바람 받으며 그물코를 꿰다가 허리 짚은 채 간신히 일어섰다. 손등에 조개껍질처럼 묻어있던 굳은 피 핥던 혓바닥 사연은 더 이상 은유로 표현할 수 없으니, 그 스크린을 떠올릴 때마다 장맛비 장독대 동치미국물이라도 퍼서 시린 속 달래야 할 것 같다. 그가 열혈청년의 낭만을 포기하고 세상의 변혁을 새기게 된 이유다.
부설학교로 떠난 금자는 뜻밖으로 울지 않았다. 기숙사 처우개선을 위한 삐라를 뿌리다가 학교를 쫓겨나서도.
“세상이 모두 학교인 걸요.”
생글생글 미소로 의연하게 위로하는 바람에.
‘네가 내 스승이구나. 나도 이 땅의 아이들 미래를 위해 각오를 다져야겠다.’
철렁한 가슴 다독이기도 했다.
날쌘돌이 그미의 달리기 저력도 삼삼하다.
400미터 계주에서 2위 주자로 뛰다가 마지막 바퀴에서 1위 주자와 간극을 좁히던 서스펜스가 격하게 가슴을 두들긴다. 결승 테이프 바로 앞에서 아슴아슴 따라잡아 마침내 뒤집기 우승을 차지할 때는 운동장이 환호성으로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교단의 기억들은 그렇게 미소와 눈물이 시계추처럼 오가던 주마등의 연장이다.
또 있다. 파도리 어디쯤 가정방문 가는 늦봄이었던가. 어디선가 ‘선생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두리번거리는데.
“선생님, 여기요.”
모내기 품앗이 농군 틈에 웅크려 있던 순임이가 논두렁 한가운데서 벌떡 일어서더니 물기가 철철 흐르는 볏모 한 뿌리 흔들며 파안대소 웃음 짓던 풍경이다. 대처 어디쯤 공장지대로 떠난 볏모 제자를 떠올릴 때마다 오월 논두렁으로 떨어지던 푸짐한 뻘흙 미소가 오버랩 되곤 했다. 스승은 그렇게 배경으로 지켜보면서 쌀과 등록금을 조달해주었고 더러는 출석부에 빨간 줄 그으며 남 몰래 눈물 감추는 법을 터득했었다. 지금은 그 옛 소녀들과의 해후 중이다.
자, 윤동주 수업이 끝났고 점심시간이다.
장년의 제자들이 책상 서랍에서 저마다 도시락 하나씩 꺼내드는 신바람 표정들이 어럽쇼, 40년 전 그때 교실의 복제판이다. 마늘짱아찌, 오이지, 조개젓, 짠지……맨밥 도시락까지 완전히 추억의 메뉴판으로 맞춰온 것이다. 반찬을 쏟고 옥자 아줌마네 맨밥까지 섞어 양푼에 흔들어먹는 비빔밥 성찬도 의미 있겠다, 며 센티하게 젓가락 드는 순간 혜인이 아줌마가 불쑥 소라무침을 가져온다. 이건 너무 고답적 도시락 반찬이라며 황홀하려는 판인데, 어럽쇼, 애교쟁이 정숙이가 어디선가 버너를 꺼내더니 딸그랑딸그랑 가스불을 조립하는 것이다. 아이쿠, 금세 바지락이 팔팔 끓고 낚지도 두 마리 꿈틀거리는 해물종합세트 냄비탕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아줌마 제자들의 빗발치는 수다.
선생님, 이것 좀 드시며 저 좀 바라보세요, 명숙이만 보지 말고 저 좀 보세요. 여기요, 여기 선생님. 이젠 떠들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 순자가 내 숙제 베낀 건 차순이도 봤다구요. 내일부터는 입술에 반창코 붙인 채 열심히 할 테니 화장실 좀 보내 주세요. 선생님, 깻잎에 장아찌도 싸서 드셔야 힘이 좋아져서 사모님이 행복하다구요, 푸하하. 얼굴이 빨개지니 낮술은 안 되구요. 선생님. 숟가락에 조개젓 좀 올려드릴 게 우리 모두 파도리로 산보 가요.
그랬다. 40여 년 전 한 달에 몇 차례씩 함께 나왔던 그 바닷가다. 그렇게 옛날 초짜 교사로 회춘하는 순간 스승의 여린 눈시울 본색이 들통이 났으니. 아이쿠. 또 글썽글썽의 이유는.
조개젓 사연이 가장 크다.
소년은 말수 적고 얌전한 성품의 유년을 보냈다. 딱 한 차례 면사무소 숙직당번의 가루 치약으로 이빨을 닦고 도망쳤을 뿐 숙제가 끝나면 빗자루 들고 마당 청소 잘하는 조신한 성품이었다. 문제는 허약한 몸이었다. 6.25 직후의 태생들이 대개 영양실조에 시달렸듯 그도 바탕 체력이 약했다. 소아마비 벗들도 많았고 기계총과 도장병은 필수였다. 홍역, 볼거리는 차치하고라도 감기 한 번만 걸려도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에 시달렸으니 개근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느 날 하굣길, 오후의 태양이 유난히 작열해서 책보가 등짐처럼 무겁던 날 간신히 사립문에 도착해서 쓰러졌던 것 같다.
비몽사몽 와중에 외할머니의 손길이.
서늘하게 목덜미 녹여주는 촉수로 느껴지는 것이다. 20리 길 소문을 종이비행기로 수소문한 채 어떻게 먼 걸음 걸어와 조개젓을 만들었을까? 할머니의 익모초 즙이 숟가락에 담기더니 신열이 잉잉 오르는 외손자의 입술에 넣어주셨는데 좌우지간 무지하게 쓰디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도리질 칠 때마다 억지로 떠먹이던 약숟가락 뒤로 재빨리 밀어주시던 ‘외할머니의 조개젓’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지금도 식당에서 조개젓이 눈에 띄면 가까이 당겨놔야 마음이 놓인다.)
비린 생선은 엄두내기 힘들었다.
내륙에서는 갯것들이 비싸기도 하지만 천안 장터까지 걸어갔다가 올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냥 된장, 청국장, 묵은 김치, 오이지 같은 식물성에만 익숙한 입맛이었다. 애호박에 된장국이면 보리밥 한 사발을 단숨에 비웠다. 장맛비에는 호박잎 넣고 칼국수를 먹었고 빨랫줄 널면 고양이가 따라다니며 모처럼 소금기 비린내를 핥으러 따라다녔다. 갯것은 그렇게 아무리 맵짭이라도 새로운 입맛이었다. 나중 얘기지만 익모초 쓴맛을 달래주던 조개젓도 우연히 할머니와 마주친 삼거리 등짐장수에게 어렵게 구한 것이란다.
“아들을 못 낳아 한이 된다.”
그 외할머니의 한숨도 ‘여자의 일생’이다. 어머니조차 무남독녀인지라 외할머니의 늘그막에 집 가까이 모셔와 곁에 사시게 된 게 오히려 소년에겐 행운이었다. 천안시 풍세면 골짜기에서 아버지 형제와 할머니, 어머니, 삼촌댁까지 열네 식구가 네 칸짜리 집에서 살았지만 덕분에 유년의 감성이 풍요로워진 것이다. 아무튼 외할머니는 외손주 지철이를 특별히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한풀이라도 실컷 들어주고 싶은데, 좋은 풍경 구경시키고 밥상 한번 딱부러지게 차려드리고 싶은데……아차, 스승의 눈시울이 또 이슬 젖으려 한다. 그때.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선생님.”
그렇게 상념의 방향키를 돌려준 장년의 제자 혜경이의 센스가 다행이다. 그랬다. 예전의 단발머리 소녀들은 수업도 뭉갤 겸 사춘기 빈 가슴도 채울 겸사해서 스승의 첫사랑 추억을 졸라대곤 했다. 장대비가 쏟아져도 첫사랑, 낙엽이 떨어져도 첫사랑 사연을 꺼내라며 지지고 볶아대면 총각 선생은 팩트를 우려내고 허구를 생산해야 했다. 지금은 그 모든 게 감사할 뿐이라, 며 초로의 스승이 서해바다에 조약돌을 던지자 장년의 제자들도 오그르르 물수제비 뜨는 연습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 첫 사랑 양현옥.
청년 김지철은 70학번 사범대 신입생이었고 17세 양현옥은 가방 속에 시집과 철학책을 넣고 다니던 문학소녀 여고생이었다. 그러니까 대학생과 고교생이 함께 하는 천안권 흥사단 모임에서 처음 만났고 회합에서 얼굴을 익히면서도 몇 차례 쓰뭉하게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다가 여고생들의 군입대한 선배들 면회 코스로 동행하다가 서로 눈빛 오가는 선후배로 진화하다가 사범대 캠퍼스 선후배로 재상봉하면서 사랑이 깊어졌다. 언제부터였나, 순식간에 둘만 남고 이 세상 모든 물상이 자취를 감추었다.
딱 한번 이 사내와의 혼인을 주저하며.
숨은 그림이 되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다. 사범대 청년 학도들이 교직을 천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내의 교육자적 자존감은 두렵도록 유별나다. 자취방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날마다 사회과학 탐닉하는 자세도 평범하지 않고 모든 삶이 실천으로 직결되어야 한다는 강박증도 쬐끔은 부담스럽다. 마침내 작별의 한 문장을 보냈으니.
‘차마 잡을 수 없어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헤어짐의 상처를 감당할 수 없어서 석별의 뒷모습만 점점이 바라보았다니 사나이 냉가슴 드라마도 적절히 겪어본 셈이다. 마침내 그 태극기를 예식장에 걸어놓고 신랑 신부 입장 때 ‘일송정 푸른 물결’로 행진했단다. 그미의 젊은 한 때 ‘투사의 아내’가 되어 모든 걸 다 받아주듯이 지금 ‘교육감의 아내’도 소리 없이 판단하고 묵묵히 점검해야 한다. 숨어서도 안 되고 나대서도 안 되는 동반자의 역할이 만만치 않다.
89년 그해 하필 어머니 입원 때,
불법단체 전교조 충남지회 초대 회장의 명함으로 구속되었다. 이른바 신새벽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아내 양현옥은 예견했다는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했던 것 같다. 후일담이지만 틈입객 형사들도.
“체포하러 간 집에서 인삼차 대접 받기는 처음이라우.”
얼핏 ‘따뜻한 동행’처럼 경찰차에 끌려갔다나, 그러거나 말거나 금세 돌아오겠다는 남편이 99일간 수감되었으니……우리들 모두 참교육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직되고 투옥되는 시련을 감당해야 되는 시국의 운명인 줄만 알았다. 제자들 역시 스승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장면을 떠올리면 울컥 목이 멘다. 벽보가 붙고 스승의 구속이 사발통으로 전파되면서 청년 학도의 애국심이 불끈불끈 솟아올랐다니, 미안하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