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지난 호에 이어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이별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이 이곳을 떠나신다는 것은 소록도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세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분도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듯한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빈 손으로 떠나신 두 분의 뒷모습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완전한 겸손과 비움을 보았습니다.
2005년 11월에 떠나신 두 분을 제가 다시 만난 것은 십 년이 흐른 뒤인 2015년 7월이었습니다. 한 분은 양로원에, 한 분은 자택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공통적으로 두 분 다 자기 방에 한자로 ‘無’(없을 무) 자를 붙여두고 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분의 변함없는 마음이 그대로 깊이 새겨져 있는 듯하여 더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소록도를 비춰준 두 빛줄기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이 소록도에 미친 영향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두 분은 소록도 한센인들의 어머니셨습니다.
한센병은 틴에이지 디지즈(Teenage-disease) 곧 ‘십대병’이라고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한센병은 초기 발병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서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극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기에 누구보다 모성이 필요했습니다. 두 분 수녀님이 그 몫을 하셨습니다.
당시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끼리 결혼을 하면 많은 경우가 소록도 밖의 정착마을로 이주했습니다. 두 수녀님은 종교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시며 한센인들이 가정을 잘 꾸려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셨습니다. 이 일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떠나시는 날까지 40여 년간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로, 한센인들의 인권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해주셨습니다.
국립소록도병원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5월에 개원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한센인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고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해방 뒤에도 그 전통은 이어져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연세있는 어르신이어도 병원의 젊은 직원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했고, 병원 직원은 종종 나이와 상관없이 한센인들에게 반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님은 병원에 입원한 한센인들에게 깍듯한 존댓말과깊은 겸손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한센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셔서 한센인과 병원 직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자연스레 직원과 환자들이 한 가족임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었고, 나병의 전염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농부의 딸과 의사의 딸로
셋째로, 40여 년간 한결같은 봉사를 하셨습니다.
두 분은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5시가 넘으면 치료실에 도착하여 환자들에게 줄 우유를 데울 물을 끓이셨습니다. 병동에서 아침식사를 마치면 바로 따뜻한 우유를 병실 어르신들에게 손수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난 뒤 치료실에 찾아온 어르신들께는 우유를 드리며 한센병 치료제인 람프렌과 주치약을 투약해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어르신들과 간호 직원이 요구한 물품을 드리면서 어르신들의 상처를 치료하며 가족처럼 대화를 나누십니다. 치료하는 가운데 어르신들 개개인을 잘 살펴 그분들이 따로 요구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미리 챙겨주셨습니다.
넷째로, 소록도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시고는 오스트리아 지인들에게 호소하여 소록도 사람들의 삶의 복지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초창기 영아원과 결핵 병동, 정신과 병동, 목욕탕 건물 등은 두 수녀님 덕분에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섯째로, 종교인들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소록도에서 두 분 수녀님께서 계시던 집은 많은 종교인이 찾아와서 친교를 나누는 평화의 집이었습니다. 신부님이나 목사님, 원불교 교무님이나 스님들을 한결같은 맘으로 대하셨습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 수녀님은 누구보다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으로 오로지 성체성사의 힘으로 사는 분이었지만, 다른 종교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여섯째로, 소록도 사람들에게 귀한 의약품을 지원하신 덕에 환자들과 직원들이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님은 농부의 딸이었고, 마가렛 수녀님은 의사의 딸이었습니다. 마가렛 수녀님의 아버지는 의대교수를 지내셨고 남동생도 의사였으며 언니는 약사였습니다. 수녀님까지 간호사였으니 그야말로 의료인의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자연스레 아버지와 가족은 소록도에 있는 마가렛 수녀님에게 많은 의약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님을 잘 아시는 신부님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님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두 분은 한국 천주교회의 큰 어른이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을 비롯하여 주교님,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 목사님과 스님, 그리고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한센인의 방문에 최대한의 친절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병사지대의 환자들도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하셨고, 소록도 어르신들의 생일날에는 손수 빵을 구워 선물하셨습니다. 거의 날마다 빵을 구운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직원이나 간호사들의 축일에는 케이크를 손수 배달해 주고 함께 기뻐했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고 검소하게 사신 마리안느 수녀님의 방 안 철제금고는 언제나 돈이 나오는 마술 상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곳 응접실의 소파는 모든 이를 편견 없이 받아주는 사랑의 방석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43년간 소록도에서 이루어진 두 분의 삶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질서가 파괴되는 현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뉴스를 접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두 분 수녀님은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자신을 내어놓은 삶이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인간다우며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두 분은 우리의 영웅입니다.
그런 두 분 수녀님이 편찮으셔서,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어 소록도를 떠나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정말로 죄송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노후를 챙겨드리지 못했습니다.
희망의 열매를 맺으며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 주십사 하는 간곡한 우리의 초대에 응해서 마리안느 수녀님께서는 2016년 4월 13일 드디어 한국을 찾아오셨습니다.
지난날 이 수녀님과 소록도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감격스러운 만남을 지켜보았습니다. 감동은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소박한 이들이 소박함을 알아보고 겸손한 이들이 겸손한 이를 알아봅니다. 만나는 사람들이나 찾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잔치를 베풀고 그것을 누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정을 지켜보며 저는 다시금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이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된다는 진실을 말입니다.
두 분의 행적과 사랑에 감동하여 여러 가지로 희망의 결실을 거두고 있습니다. 두 분의 이름으로 법인이 설립되었습니다. 공식 이름은 ‘사단법인 마리안마가렛’입니다. 이 법인은 현재 볼리비아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마리안마가렛 기술학교’를 설립하려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 연말 즈음 극장에서 상영할 목표로 두 분 수녀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고, 또한 전기를 출판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無)를 추구한 두 분의 삶이 이제 세상을 향해 희망을 노래합니다. 결국 사랑이 ‘모든 것’입니다.
김연준프란치스코광주대교구신부.
2001년에사제품을받았다. 2005년에는소록도본당보좌신부로,
현재는소록도본당의주임신부로사목하고있다.
<경향잡지 7월호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