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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교수님의 법보시를 염치없이 받기만 합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최요삼(프로복싱 WBC 전 챔피언으로 2007년 12월 25일 경기 직후 뇌출혈로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2008년 1월 2일 결국 숨졌다-편집자 주)선수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판정을 받고 장기를 기증하기로 하였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특수한 경우이지만 불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지요.
사람들은 장기 기증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혹은 경제적 이유로
혹은 무의미한 삶을 연장시킴에 반대하여 뇌사판정을 옹호하기도하고
생명의 존엄함을 강조 혹은 회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심장기능이 정지될 때가 사망이라는 보수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도 심장토대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과의 관련성은 어떻게 되는지요.
이것으로 심장사가 불교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도 의문입니다.
홈페지에 올려진 교수님의 논문 "배아연구와 생명윤리"에서는
"5.인식의 극한에서는 가치가 존재를 변화시킨다",
"일상의 한계를 벗어난 사안에서는 객관보다 주관을 중시한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필요에 따라서 혹은 윤리적으로 별 문제가 없으면-혹은 거부감이 없으면- 충분히 뇌사판정과 장기기증은 가능하다고 해석됩니다.
이렇게 여쭙는 것은 뇌사판정과 장기기증을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도리어 지지합니다만-
불교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바른 기준을 정립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답>
질문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1. 뇌사자의 장기이식에 대한 불교 윤리적 판단
2. 불교의 ‘심장 토대’와 뇌사의 관련성
여기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하나 더 덧붙여 답해 보겠습니다.
3. 뇌사자에게도 장기 기증의 공덕이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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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뇌사자의 장기이식에 대한 불교윤리적 판단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一卽一切)”라거나 “하나 속에서 무한을 해석한다(一中解無量)”는 화엄학
의 가르침에 의거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개념의 외연(범위)는 무한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홈페이지의 ‘연구 - 김성철 논문, 저서, 번역서’에 올려진 ‘21.일상에 대한 불교적 조망’(일상과 깨침)이라는 논문의 내용 가운데 ‘* 화엄적 해체와 구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이마' 라는 개념의 경우 이마 한 가운데가 이마인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주변으로 가면 그곳이 이마인지 아닌지 점점 애매해집니다.
왜냐하면, ‘이마’라는 개념이 실제 세계에서는 테두리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마의 ‘중심부’에서는 그 의미가 분명한 것 같지만 ‘주변부’로 갈수록 ‘이마’의 의미가 흐릿해질 뿐
이지 어느 지점에서 이마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통계학의 분포도 곡선에서, Y값이 점점 작아지면서 X 좌표에 근접하긴 하지만 결코 X 좌표와 만나지 않
듯이 ‘이마’라는 개념 역시 이마의 주변부로 가면서 그 선명도가 점점 옅어지기는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는 않습니다.
‘이마’라는 개념의 범위에 대해 미리 어떤 약속을 하지 않는 이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침’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고 ‘우주’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고, ‘시계’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이고,
미리 약속을 해 놓지 않은 모든 개념은 그 범위가 무한입니다.
이것이 화엄학에서 가르치는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그대로 무한이다)’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무한한 외연’을 갖는 모든 개념들에는 중심부와 주변부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의 경우도 이는 마찬가집니다.
‘어린아이, 청소년, 성인, 노인’ 등등은 모두 ‘인간’ 개념의 중심부에 속합니다.
그러나 ‘수정란, 배아줄기세포, 태아, 식물인간, 뇌사자’ 등등은 ‘인간’ 개념의 주변부에 속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율 조항을 인간 개념의 중심부인 ‘어린아이 … 노인’등에 적용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별 혼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정란 … 뇌사자’에 대해 그런 조항을 적용하려고 할 때에는 난감해집니다.
수정란이나 뇌사자도 인간으로 봐야 하는지 아닌지 …
수정란이나 뇌사자가 인간이라면
‘수정란을 이용한 의학기술’이나 ‘뇌사자의 장기를 다른 환자에게 이식하는 행위’
모두 '살인행위’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생명윤리와 관련한 갖가지 난제(難題)는 ‘인간’ 개념의 주변부에서 발생합니다.
‘줄기세포연구’에 대해 불교윤리적으로 모색해 본 논문이 본 홈페이지의 논문자료실 47번 항목에 올려
진 <불교의 생명관과 살생의 범위, 그리고 배아연구의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논문입니다.
그 논문에서는 ‘뇌사자의 장기이식’에 대해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본 게시판을 통해 답해 보겠습니다.
‘잠자는 사람’, ‘식물인간’, ‘뇌사자’는 겉보기에는 동일합니다.
‘잠자는 사람’의 경우 흔들어 깨울 수 있지만, ‘식물인간’이나 ‘뇌사자’는 인위적으로 깨울 수가 없습니다.
깨어나지는 못하지만, 심장도 뛰고 뇌도 계속 활동하는 환자가 식물인간입니다.
심장은 뛰지만 뇌의 활동이 완전히 정지된 경우 뇌사(腦死) 판정을 내립니다.
심장은 기계적으로 작동하지만, 뇌(腦)는 이미 사망(死亡)한 것입니다.
개구리를 해부하여 심장을 떼어 낸 후 적정 농도의 소금물에 담그면 몇 분 동안 심장이 계속 뜁니다.
이 때 겉보기에 심장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단백질 기계’일 뿐입니다.
심장은 뛰지만 뇌파는 정지된 뇌사자의 몸 역시 ‘단백질 기계’와 같습니다.
식물인간의 경우, 몇 달이나 몇 년 뒤에 의식이 돌아와 깨어날 수도 있지만
뇌사자의 경우는 인공호흡기 등으로 연명해도 길어야 1주일 이내에 심장박동이 멈춘다고 합니다.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뇌사자를 소생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장이 작동하기에 아직 장기가 부패하지 않은 뇌사자의 몸을 해체하여
심장이나 간, 신장, 눈 등을 떼어내어 다른 환자에게 이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언젠가 의학기술이 발달하여 뇌사자를 소생시키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때가 되면, 장기이식을 위해서 뇌사자를 해체한 분들은 모두 ‘살인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식의 극한에서는 주관적 가치가 존재를 변화시킨다.”는 불교생명윤리의 ‘원칙’은
뇌사자의 장기이식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뇌사자’라는 개념의 경우 ‘인간 개념’의 극한에 위치한 ‘개념’이기에, ‘인간’인지 ‘시체’인지 모호합니다.
즉, <인식의 극한>에 위치한 개념입니다.
이때는 뇌사자를 해체하여 장기를 떼어내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고통 받는 환자를 살리기 위한 자비심은 <선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한 것’(탐욕)이나 ‘명예를 날리기 위한 것’(교만심)이 그 동기와 목적이라면
이는 <악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전자와 같은 목적에서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할 경우,
그 뇌사자는 ‘인간’의 범위 밖으로 벗어납니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목적에서 장기이식을 할 경우, 그 뇌사자는 ‘인간’의 범위 내에 들어옵니다.
즉, 그 동기에 따라 뇌사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 되기도 하고, ‘죽은 시체’가 되기도 합니다.
<존재의 범위>에 변화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식의 극한에서는 가치가 존재를 변화시키기에 뇌사자 장기이식의 경우도
그것에 관여한 분들 개개인의 동기와 목적에 따라 선행과 악행 여부가
각각 다르게 판가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불교의 ‘심장토대’와 뇌사의 관련성
‘심장토대’란 말은 ‘the basis of the heart(hadaya-vatthu)’란 말의 번역어입니다.
질문에 쓰셨듯이, 남방 상좌부 전승의 불전 주석서에서는,
"눈이 시각작용의 토대이고, 귀가 청각작용의 토대이듯이 심장이 정신활동의 육체적 토대"
라고 가르칩니다.
심장토대(hadaya-vatthu)란, ‘생각과 의식의 토대인 심장’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의학기술이 발달하여 심장을 이식할 수 있기에,
‘심장토대’란 것이 단순히 ‘살덩어리로서의 심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심장을 마음(아뜨만)의 거주처로 보는 이론은 우빠니샤드에 기원을 둡니다.
따라서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이론이 후대에 편집된 남방상좌부 전승의 불전 주석서에 혼입되어
‘심장토대’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 아함경이나 빠알리 삼장 등 초기불전 어디에서도 심장이 마음의 거주처가 된다는 설명을 본
적은 없습니다.
<구사론> 등 북방으로 전해진 아비달마 문헌에서는 마음의 토대, 즉 의근(意根)은 ‘앞 찰나의 육식(六識)’이라고 설명합니다.
안식의 토대는 안근이고, 이식의 토대가 이근이듯이, 마음과 생각인 의식의 토대는 의근인데,
의근은 ‘눈동자나 귀, 혀와 같이 몸으로 이루어진 색법(色法)’이 아니라 ‘심법(心法)’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심장이나 뇌와 같은 물질 역시 의근이 될 수 없습니다.
앞 찰나의 육식이 지금 나에게 일어난 ‘생각’의 토대입니다.
‘앞 찰나에 체험한 육식의 내용’에 ‘지금 지각된 육경’을 오버랩시켜 비교함으로써
지금 지각된 육경의 의미가 ‘현재 찰나의 육식’으로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 동굴에 들어가면 시원한 느낌(身識)이 드는데,
이는 동굴 밖의 더운 느낌과의 비교를 통해 발생한 느낌입니다.
겨울에 동굴에 들어가면 반대로 따뜻한 느낌이 듭니다.
동굴의 온도는 한 가지인데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지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동굴 밖 느낌에 의존하여 비교를 통해
동굴 안 느낌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앞 찰나의 느낌에 의존하여 뒤 찰나의 느낌이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서 앞 찰나의 느낌(身識)이 뒤 찰나의 느낌(身識)을 발생하게 한 의근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북방 아비달마 전승에 의거할 때 심장은 결코 마음의 거주처가 될 수 없습니다.
3. 뇌사자에게도 장기 기증의 공덕이 돌아갈까?
뇌사자가 생전에 기증의사를 밝혔다면 분명히 장기기증의 공덕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생전에 그런 의사를 밝히지 않은 뇌사자의 장기를
가족들이 이식용으로 기증할 경우 어떻게 될지 문제가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남은 가족들이 재(齋)를 지내는 경우,
그 공덕이 돌아가신 분에게도 돌아갈지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업자득이라는 인과응보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빠드마삼바바 스님 역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공덕이 돌아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뇌사자나 돌아가신 분의 경우, 중음신이 되어 자신의 시체나 가족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가족들이 뇌사한 자신의 몸을 남에게 기증하거나,
절에서 자신을 위해 재를 지내는 것을 보고서
그 중음신이
기쁜 마음을 내면 공덕이 그 중음신에게 돌아가고
불쾌한 마음을 내면 공덕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음신이 ‘의업(意業)’을 지음으로써 공덕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 김성철 교수 홈 페이지에서 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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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석 명절 잘 보냈셨습니까
명절 잘 쇠고 뇌사, 장기 기증 얘기가 나와 죄송한데 얼마전 장기 기증 말씀이 카페에 나온 적이 있고 사후 육체에 대한 집착 말씀도 있었고 해서 여기에 대한 불교학자의 견해를 한 번 올려봅니다. 오늘 공양올린 글은 일전에 소개해드린 100문 100답의 저자 동국대 김성철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말씀입니다.
“인식의 극한에서는 주관적 가치가 존재를 변화시킨다.”는 불교생명윤리의 ‘원칙’에 대한 말씀은 참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인식의 극한일까
판단하기 모호한 부분은 인식의 극한일까
인식의 한 가운데(이마 한 가운데)에서는 주관적 가치가 존재를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_()()()_
김성철교수님은 나름대로 불교와 과학을 접목시키키 위해 매우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마 물리학자로 물리학과 불교의 접목을 꾀하려는분이 고려대 양형진교수님와 김성구교수님이라면, 불교학자로서 과학을 불교에 접목시키려 노력하는 분은 김성철교수님이 아마 대표적이라 할것입니다. 그런데 좀 아쉬운것은, 김성철교수님의 글은 비교적 교학에 치중하는 면이 강합니다. 사실 이런 일을 하려면 불교나 과학의 교학 못지 않게 수행도 동반되어야 하거든요
수행을 하면 안목이 열리면서 학자들이 표현하는 세계 이상의 세계를 보게 되지요. 선지식들의 법문이 깊은 것도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요.교학만으론 한계가 있지요..
'모든 개념의 외연(범위)는 무한'이란 것은, 제가 보는 바로는 화엄학이 그런게 아니라, '전체를 부분으로 표현'할 때 오는 한계 현상입니다. 예로 든 이마의 경우, '얼굴 전체' 중의 일부를 표현하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한계를 가지는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 인간이라 할때 뇌사자가 인간이냐 아니냐의 의문이 생기는 것도, 뇌사자는 인간의 일부를 표한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이와같이 우리는 전체를 표현하지 못하고 대개는 전체의 일부를 표현하면서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 때문에 미세한 경계,협의의 경계로 들어가면 개념의 혼란이 오는 것이라 저는 봐요...
그러니 개념을 처음부터 '전체'로 표현하면 개념의 혼돈은 오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혼돈이 자꾸 오는 것이지요. 화엄은 이런 우리의 습관을 옳은 것이 아니라 지적하고, 언제나 전체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습을 길러주기 위해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 화엄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화엄은 언제나 전체적 관점에서 설합니다.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또 보이지 않는 세계뿐 아니라 보이는 세계까지 모두 포함해서 세상을 보기에 화엄의 표현은, 알아차리기만 하면 정말 여실지견의 반야안을 생기게 하지요...
각설하고, 마음이 뇌에 있느냐 심장에 있느냐의 문제는, 과학은 뇌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불교, 그리고 동양의 일반적 개념은 심장에 있다고 보지요. 실지로 티벳불교 같은 경우, 제 기억에는 불성이 심장에 여섯겹인가로 꽁꽁 묶여 있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 묶여진 불성이 해체되는 것이 진짜 죽음이라 정의하지요. 그리고 실제로 밀교에서는 이런 해체 훈련을 합니다. 그러다 못 돌아오는 수도 있는데, 그 때는 스승이 옆에서 얼른 도와줘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학은 뇌사를 이제는 죽음으로 정의하지만, 아직 동양이나 보수적 죽음관은 심장 정지가 진짜 죽음이라 정의합니다. 미묘한 차이지요...
뇌사자의 장기 기증에 대한 답변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명 드릴 내용이 매우 많아 제가 보완 설명 드리는 것은 생략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각자 깊이 생각해 보시고 혹시 오프 라인에서 기회 있으면 이야기 나누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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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자의 장기 기증도 재보시의 경우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재보시할 때 무주상 보시가 강조되는 이유도 그 공덕의 차이가 있음을 의미할테니 말입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보시에 아무 공덕이 없는(?)것 처럼 장기 기증도 육체에 착을 두고 있거나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때 그 공덕은 아주 미미해지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재물에 대한 착을 끊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을 끊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일테고 섣부른 장기 기증의 서약은 산 영가, 죽은 영가 모두에게 당혹스러운 일일수 있을겁니다. 지금 생각에야 죽어서 쓸모 없어진 육체 아까울 것 없다고 생각하겠지만요..._()()()_
또한 장기라는 것, 육체라는 것은 사실 나의 것이 아니라 임시로 내가 쓰고 있는 물질에 다름 아니라는 가정을 할때 재보시와 다름 없는 물질적인 보시가 아닐까 합니다. 기증자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도
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이 크겠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또는 육체에 집착을 끊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보시는 공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뇌사자를 사망한 것으로 볼 것인지 심장이 정지해야 사망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뇌에도 심장에도 마음이 없는 것이라면 현재의 의학수준에서 뇌사가 판정된다면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_()()()_
고맙습니다. 많이 생각하다 갑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