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피랑
비가 와도 정한 날이어서 떠났다. 내리니 멎고 떠나면 쏟아지는 고마운 빗줄기다. 그러다 언덕에서 내려올 때 그만 흠뻑 두들겨 맞았다. 잘 피해 다니는데 멈췄다 퍼붓던 것이 혼 좀 나 봐라 덮어씌웠다. 윗도리는 작은 우산으로 덜하지만 아래는 다 젖었다. 그렇게 종일 후줄근하게 내리는 궂은 날씨를 무릅쓰며 헤매고 다녔다.
달랑 열한 명이 커다란 버스에 듬성듬성 앉아 갔다. 비오니 어설펐던가. 이런저런 까닭으로 빠졌다. 하기야 웬 비가 이리 자주 오나 올핸 가물었단 말을 듣지 못했다. 해마다 마른장마에다 모심기 철 가뭄으로 야단인데 그런 게 하나도 없다. 올 장마는 한 달이나 길게 내내 흩뿌렸다.
장마가 끝났는데도 부슬부슬 사흘돌이로 내린다. 그 바람에 가려 했던 사람도 빠져 이 모양이 됐다. 차 내가 헐렁하다 이렇게 가 본 적이 있었나. 갈 때마다 꽉 차서 이리저리 우 몰려다니고 했는데 이게 뭔가. 그래도 회장 인사말에다 사무국장의 자세한 안내가 소홀하지 않았다. 입추와 말복이 끝나고 처서도 지나 곧 백로와 추분이 오려는 때인데 질금질금 자주 내려 궁상스럽다.
버스 대는 곳이 서면에 있다가 없어지고 동래 교대 앞과 예총회관에서 탔는데 오늘은 해운대이다. 집에서 멀다. 몇 시간 전에 나와서 버스와 전철을 타야 닿을 수 있다. 아파트 주위라 해서 물어물어 찾았다. 제시간에 겨우 왔지만 뛰다 보니 숨차고 땀이 났다. 서쪽에서 동쪽 백 리가 넘는 끝에서 끝이다.
자주 갔던 곳 충무 아니 통영이다. 올해 가을 문학 나들이는 처음이어서 전염병으로 오래 못 만났던 사람들을 보고자 나섰다. 그사이 늙어선가 아슴푸레하다. 어기적어기적 걷고 주글주글 주름진 얼굴이 낯설어 선뜻 내키지 않아 누군가 머뭇거리는데 친구가 일러줘서 반갑다 인사하게 됐다.
수술로 얼굴이 반쪽이고 백신을 맞아 팔다리가 굳어져서 고생했다는 사람 등 살아서 만나는 게 좋았다. 옹기종기 앉아 이런저런 얘길 하며 가는 게 참 정다웠다. 누구누구 갔다는 말이 찡하다. 비 오면 어떤가. 오든지 말든지 온통 차내가 뜨겁다. 통영 초중고를 졸업했다는 정 회장의 구수하고 질펀한 얘기가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귀로 쏙쏙 들어왔다.
토지 작가는 대하소설을 쓰면서 최 참판이 사는 하동 평사리 지역을 한 번도 가 보지 않고 썼단다. 친구 얘기만 듣고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집 나간 바람난 아버지와 삶에 찌들어버린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경리는 첫 남편을 잃고 연하의 젊은 남자와 동거하다가 헤어졌다. 뒤돌아보기도 싫은 통영을 떠나 서울과 강원도를 헤맸다.
통영 시장이 원주를 여러 번 찾아가 고향에 모시겠다 간곡한 부탁이었다. 한번 가 보기로 했다. 깜짝 놀랐다. 입구에서부터 시내 곳곳에 토지 작가 박경리 환영 현수막이 가로등 가로수 집집 문마다 걸려 있었다.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 것은 다니던 학교 어린 학생들이 입구 좌우에 서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고향의 봄’을 불렀다.
몇 해 뒤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말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무덤 아래 기념관도 세워졌다. 그녀가 살았다는 좁은 골목집도 들렀다. 꽤 높은 서피랑에 올라 보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뵌다. 작은 항구와 빙 둘러선 시가지가 다닥다닥 쌓여있다. 중앙시장에서 고소한 전어회 점심을 하고 충무김밥과 꿀빵을 사서 가족과 저녁 먹을 것을 챙겼다.
삼도수군통제영 충무 이순신의 제승당이 있는 한산섬이 가깝다. 시내엔 저 아래 세병관이 왼쪽에 큼직하게 세워졌다. 임진왜란으로 들끓었던 곳이다. 옥포해전도 통영 아래 거제도 동남쪽에 있다. 왜군과 싸워 어려움을 겪은 곳이 서북쪽 칠천량해전이다. 목포에서 부산포까지 노 저어 다니는 꾸물거리는 수십 척의 범선이나 거북선으로 수백 척 왜선을 맞아 싸웠다.
4월에 쳐들어와 한 달만인 5월에 서울에 닿는다. 전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평양의 소서행장과 함경도에 주둔한 가등청정이다. 의주와 강계 쪽으로 피신한 선조의 왕실과 군병을 더 쫓지 못하고 겨울을 맞았다. 매서운 날씨다. 맞닥뜨린 추위와 싸워야 했다. 조선에 오니 제일 무서운 게 이장군과 동장군이란다.
공방이 보인다. 군수 물품과 진상품, 생활용품을 만든다. 조개껍질을 예쁘게 붙인 나전칠기로도 유명하다.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수용소도 거제도 가운데 있었다. 많을 땐 수십만 명이었다니 관리와 숙식이 엄청났을 것이다. 지금은 거대한 조선소가 두 곳이나 세워졌다. 여러 해 주문이 들어와 일감이 넘쳐난다. 4만 달러에 이르는 가장 부유한 남녘 지역이다.
‘토막’ 희곡을 쓴 유치진 극작가가 나온 곳이다. 사향 시조를 쓴 초정 김상옥도 이곳 사람이다. 저 건너 커다란 집이 윤이상의 국제음악당이고 기념관이다. 깃발과 바위를 쓴 유치환의 청마기념관이 태어난 집 주위 요 아래 거제도에 있고 대통령도 두 분이나 이 섬에서 나왔다. 통영을 나서면 맞붙은 미륵도와 한산섬, 거제도에다 옹기종기 수많은 섬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꽃을 쓴 김춘수 시인과 늪과 통영항을 그린 전혁림 화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문학과 음악, 미술의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예향이다. 거리에 윤이상 이름이 곳곳에 나 있다. 공원도 있어 그를 그리고 있다. 작곡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이다. 자유국가뿐 아니라 공산권에도 그의 음악이 자자하게 울려 퍼진다.
부산항이나 인천항처럼 크지 않고 자그마하다. 종일 오다 그쳤다 하는 비바람으로 피어오른 자욱한 안개 속의 아기자기한 항구이다. 산꼭대기의 북피랑 정자가 보이고, 동쪽 언덕에 자리한 사각 정자가 동피랑이다. 가파른 언덕이나 벼랑을 이르는 말로 통영항은 빼곡한 산과 섬으로 둘러싸여서 오막조막하다. 부둣길을 한 바퀴 돌아보니 뜻밖에 도로가 널찍해 참 아름다웠다.
첫댓글 문학 기행으로 통영 다녀 오셨군요
밀양 문협에서 봄 기행으로 같은 곳
둘러 왔어요 전혁림 미술관도 , 동,서피랑
아련합니다
사모님 생각에 통영 꿀빵 챙기시는 모습
너무 경겹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 번 갔는데 갈 곳이 마땅치 않았는가 통영으로 갔습니다.
봐도 그곳은 좋습니다.
차 안에서 그렁저렁 얘기하는 게 좋았습니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런 곳 입니다 통영은..
친구랑 사진 찍었던 기억도 그립고, 같이 걸었었던 바닷길도 생각납니다.
이름 마져도 이쁜...
거제도 학교에 근무해서 통영과 뱃길을 많이 다녔습니다.
통영 앞의 이 섬 저 섬도 가 봤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습니다.
어찌 볼 곳이 그리 많은지요.
성도님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