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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인과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12월 부산에는 거리마다 붉은 동백꽃이 피었다. 선원 앞에도 두 그루 동백나무가 있어서 기대했지만 아직은 온도와 햇빛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꽃은 감감 무소식이고 이파리는 윤기도 보통이었다.
큰스님은 내려오시자마자 법공양실로 가셔서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점검하셨다.
마침 복도에 책박스를 차에 싣고 돌아오는듯 푸른색이 선명한 핸드트럭을 보시며 우리 차인지 물으셨다.지혜월 보살님이 우리 차가 맞다고 하셨다.
“내가 가서 직접 산 건데”
올해 벌써 몇 번이나 이 고마운 물건에 대해서 각별한 눈길을 보내시는 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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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에는 2017년 새해 미니 달력도 두 가지나 있고, 선물이 많았다.
남화사 화엄탑 개막식 법문씨디도 있고, 가사체 불교경전과 이번에 큰스님이 새로 만드신 독송용 보현행원품이 놓여 있었다. 책 표지에는 단단한 단주 사진이 또렷했다. 큰스님 자리에는 특별히 108개로 꿰어진 연씨 염주가 실물로 놓여 있었다.
“이거 봐, 내가 요즘 염주를 좋아하니까 염주가 이렇게 쏟아져. 잘익은 연씨 염주.” 하시면서 손목에 몇 바퀴나 둘러보시고 목에도 걸어보셨다.
이미 손목에 두르고 계신 율무 염주도 빼내서 보여주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염주를 돌리면서 ‘화엄성중’을 부른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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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스님이 남화사 법회에서 찍은 사진을 앨범으로 만들어 오셨다. 사진첩을 열자마자 돌에 새겨진 ‘대방광불화엄경’ 글자가 훅 튀어나와서 모두들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발했다.
“보통 잘한 게 아니야. 나도 하나 받았어.” 하고 큰스님도 앨범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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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기도 해서 몇 년만에 새로 정리했다고 혜일성보살님이 문수법공양회 회원명부를 가져오셨다.
“잘했어요. 추릴 것은 추리고. 입재 열 명 해서 둘 셋만 와도 잘 오는 거야.”하셨다.
보살님이 이 봉사를 하신지도 벌써 오년이 되었다고 하셨다. 오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고 하시면서 큰스님이 “수고하셨습니다.”하고 합장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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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에서 오신 스님” 하고 멀리서 오신 비구니스님을 반기셨다. 사중의 여러 스님들 소식을 물으셨는데 이런 저런 안타까운 일을 겪게 되신 스님들 소식을 전해주셨다.
“다 인과 따라서, 인과 법칙대로 돌아가는 거야. 뭐든지 모르면 인과법칙으로 돌아가는 줄 알면 돼. 부당하게 처우를 받으면 자기가 또 보상을 받아. 부당한 것은 받게 되어있고 덜 받은 것은 더 받게 되어 있고. 걱정할 것 없어. 그거 알면.”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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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에 대해 여쭙자 9월 20일에 넘어지신 것 때문에 아직도 고생이라고 하셨다.
다리를 다쳐보고 나서야 늘 다니던 모든 길들이 울퉁 불퉁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씀드리자 '울퉁불퉁 안하게 보이던 길이 다 울퉁불퉁해 보이지?' 하셨다.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고생했겠어. 나는 지금도 정상적으로 가볍게 잘 걷는 사람들 보면 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걷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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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짜를 물으시고 12월에 받는 화엄경 강설책에 선근회향(善根廻向)이라고 써주셨다.
“선근회향, 선근회향보다 더 좋은 건 없다. 그럼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다.”라고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오늘도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 33권이 우리들 손에 들어왔다. 길고 긴 십회향품이 십회향품 11로서 끝나는 책이다. 본강의 들어가기 전에 언제나 하듯이 서문을 마음을 담아 읽는 것으로써 점안을 대신하겠다.
서문
지혜 있는 사람의 회향하는 법을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다 열어 보이고
가지가지 선근을 다 회향하나니
그러므로 보살도를 능히 다 이뤘도다.
불자들이 이 회향을 잘 배우고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원만히 성취하여
법계 중생 남김없이 다 거두었을새
그러므로 부처님의 힘을 능히 이루었도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보살의
광대하고 수승한 행(行)을 성취하려면
마땅히 이 회향에 잘 머무를지니
이 모든 불자를 보현(普賢)이라 부르도다.
오히려 일체 중생 다 셀 수 있으며
삼세의 마음들도 또한 알 수 있으나
이와 같은 보현보살 모든 불자의
그지없는 공덕은 측량 못하리라.
작은 터럭 하나로 허공 끝을 다 재고
많고 많은 세계 먼지 다 헤아려 알지만
이와 같은 큰 신선(神仙) 모든 불자의
머무는 행원(行願)은 측량하지 못하리라.
2015년 10월 1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마침 행원이야기도 나오고 보현보살 이야기도 나왔다. 불교의 최고 목적은 결국 보현행원을 세상에 펼치자는 것이다. 행원, 보살행이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화엄경은 81권이나 되는 경전인데, 그 가운데 11권을 할애해서 회향품을 길게 설한 것도 회향품이 행원의 구체적인 실천행이기 때문이다.
‘회향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십회향품을 공부하면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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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책 가운데는 ‘독송용 보현행원품’이 있다. 평생 순박하고 단순하고 지극한 신심으로써 한 권의 책을 수지독송한다면 단연 이 보현행원품을 꼽는다. 물론 개인의 취미에 따라서 금강경이나, 보문품, 간혹 보안장을 읽는 분들도 있다. 유명한 3대 서문인 왕복서나 일물서나 규봉스님의 원각경서를 즐겨 읽는 이들도 있다. 그런 것은 개인취향이고 보통 불교에서 평생 수지독송할 만한 책은 보현행원품을 제일로 친다.
나는 일찍부터 보현행원품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보현행원품에 대한 해설서인 ‘이와같이 살았으면’ 하는 책도 냈다. 지금 읽어봐도 거의 80퍼센트를 만족할 정도로 좋은 내용인데 그 책은 구구한 설명이고, 오늘 나눠드린 책은 단순하게 독송할 수 있는 책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여행을 가나 뭘 하나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그야말로 손에 염주를 항상 놓지 않듯이 수지할만한 책이다.
티벳 사람들은 마니차를 돌리는데 그 안에는 경전도 들어있고 주로 ‘옴마니반메훔’이 라는 주문이 새겨져 있다. 얼마나 지독하게 일상생활에서 마니차를 놓지 않는가 하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도 한쪽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한 쪽 손은 마니차를 돌린다. 그 정도로 신앙이 몸에 꽉 배어있으니 티벳사람들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도 부러운 것이 없고 불편함도 느끼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오로지 지극한 신심 덕분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티벳불교에 대해서 서양사람들이 찍고 BTN에서 우리말로 더빙을 해놓은 29꼭지짜리 유튜브 영상이 있는데 나는 수시로 그 영상을 보면서 신심을 다진다. ‘아 이렇게 불법을 믿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보현행원품 역시 그렇게 우리가 마음속에 지녀야 할 책으로 생각한다. 보현행원품이
화엄경의 마지막 81권에 들어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화엄경의 결론이고 불교의 결론이다. 행원이 없는 불법수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화엄경을 여러 해 동안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이 보현행원품이 입에 익숙해야 한다. 굳이 외우려고 할 건 아니라도 익숙하게 읽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의미로써 이 책을 만들었다. 찍는 것은 내가 얼마든지 할 터이니 여러분들은 가져가서 신도분들에게 드리고 주변에 이 책이 필요할만한 분들에게 법공양을 올리시기 바란다.
중간에 법공양 심부름을 하는 일만 해도 공덕이 무량하다.
이 책의 편집도 내가 했는데 아주 예쁘게 잘했다. 그동안 문수선원에서 낸 다른 책과는 조금 격이 다르고 번역한 한글 글자도 큼직하게 되어 있다. 이번에 내가 책을 여러 권 만들었는데 나 혼자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아주 수작에 꼽히는 책이다. 별 오점없이 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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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공양올린 가사체 불교 경전이 있다. 반야심경 금강경 아미타경을 가사체로 번역한 것인데 이 책을 번역한 분은 경북대학교 조현춘 교수다. 이 분은 화엄경 공부도 많이 한 신심있는 불자다. 늘 당신이 번역을 해서 나한테 가지고 와서 검정을 받고 내가 수정을 하면 나와 함께 공역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여러 권 책을 냈다.
소리내서 읽어보면 아주 좋다. 올해 금강선원에서 주최하는 금강경강송대회에서도 이 가사체 금강경을 독송해서 상도 받은 것이 뉴스에도 나왔다. 이 책도 여기 연락만 하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다.
결국은 이렇게 좋은 법으로써 회향하는 것이 선근회향의 결정체다.
공양을 이야기 할 때 의식주와 의료가 중요하기 때문에 사사공양(四事供養)을 이야기 한다. 거기에 기본 교육도 중요하다. 그래서 요즘 불교계에서 학교도 많이 지어 준다. 그런 것들도 훌륭한 선근회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부처님이 회향하신 것을 염두에 둔다면 공양가운데 법으로써 회향하는 것이 제일이다. 우리는 거기에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보현행원품에도 분명히 못박아서 나오듯이 ‘촛불을 켜는데 심지가 수미산만 하고 기름은 저 태평양 바다만하게 공양한다 하더라도 법공양에는 천분의 일도 못미치고 만분의 일도 못미치고 우파니사타분의 일도 못 미친다’고 하였다.
법공양이 그만큼 중요하다.
법회 전에 입승스님이 대만 원도선원 이야기도 하였고, 내 방에 올라와서 대만불교의 현황들을 얼핏 이야기도 하였다. 그분들은 중국 본토에다가 81권짜리 화엄경을 3천부 또 5천부를 공양했고, 최종목표는 100만부를 찍어서 전세계에 화엄경을 공양올리고 싶다는 원력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2백부가 일차적으로 우리 손으로 들어와서 그 기록을 <신화엄변상도>라고 해서 저 벽에 사진으로 걸어 놓았다. 결국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제일 보람이다. 그것이 행복이고 불법을 공부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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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야기가 되겠지만 통도사에서는 벌써 46년째 화엄산림법회를 하고 있다. 금번 46회 화엄법회에 범어사 강주스님은 약찬게 도표를 1만부를 찍어서 공양올렸다. 여러분 이 다 받아서 잘 아시는 약찬게 도표다. 우리 법공양실에도 많이 있다.
나도 이번달 22일에 통도사 화엄산림법회에서 법문을 하는데 지난 번 남화사에 공양했던 화엄경강설 제14권을 3천부 공양하기로 했다. 이 책에는 정행품과 현수품이 들어있다.대만불자들이 저렇게 본보기를 보인 데서 내가 용기를 얻고 하는 일들이다.
법공양은 일찍부터 내가 하던 사업이고 1988년 범어사에 오면서 일지경이라 해서 한 페이지짜리 부처님 말씀을 찍어서 일주문에다 쌓아놓고 나눠주던 것이 오늘날은 이렇게 책 한권으로써 법공양을 하게 되었다.
나도 하는데 여러분인들 못하겠는가? 누구든지 할 수가 있다.
법공양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장에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지만 모르는 가운데 큰 효과가 있고 틀림없이 가피력도 있다. 한알한알 염주를 돌리듯이 불법을 공부해서 부처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신심이 깊어지고 증장되는 일이다. 신심보다 훌륭한 재산이 없고 신심보다 훌륭한 보물은 없다. 그런 마음, 신심으로써 법공양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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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83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중간부분을 할 차례다. 아직 제오무진공덕장회향 십회향품 중간을 공부하고 있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四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三
四,十廻向
7, 第五無盡功德藏廻向
(15) 廻向의 果位
菩薩摩訶薩이 住此廻向에 得十種無盡藏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得見佛無盡藏이니 於一毛孔에 見阿僧祗諸佛이 出興世故며 得入法無盡藏이니 以佛智力으로 觀一切法이 悉入一法故며 得憶持無盡藏이니 受持一切佛所說法하야 無忘失故며 得決定慧無盡藏이니 善知一切佛所說法秘密方便故며 得解義趣無盡藏이니 善知諸法理趣分齊故며 得無邊悟解無盡藏이니 以如虛空智로 通達三世一切法故며 得福德無盡藏이니 充滿一切諸衆生意하야 不可盡故며 得勇猛智覺無盡藏이니 悉能除滅一切衆生의 愚癡翳故며 得決定辯才無盡藏이니 演說一切佛平等法하야 令諸衆生으로 悉解了故며 得十力無畏無盡藏이니 具足一切菩薩所行하야 以離垢繒으로 而繫其頂하야 至無障碍一切智故리 是爲十이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一切善根廻向時에 得此十種無盡藏이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회향에 머무르면 열 가지 무진장(無盡藏)을 얻나니, 그 열가지란 무엇인가. 이른바 부처님을 뵈옵는 무진장을 얻나니 한 모공(毛孔)에서 아승지 부처님들이 세상에 출현하심을 보는 연고며, 법에 들어가는 무진장을 얻나니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모든 법이 한 법에 들어감을 관찰하는 연고며, 잘 기억하는 무진장을 얻나니 모든 부처님의 말씀하는 법을 받아 지니고 잊지 아니하는 연고며, 결정한 지혜의 무진장을 얻나니 모든 부처님이 말씀한 법과 비밀한 방편을 잘 아는 연고며, 뜻과 취지를 아는 무진장을 얻나니 모든 법의 이치와 분한(分限)의 정도를 잘 아는 연고며, 끝없이 깨닫는 무진장을 얻나니 허공 같은 지혜로 삼세의 모든 법을 통달하는 연고며, 복덕의 무진장을 얻나니 일체중생의 뜻을 충만하되 다함이 없는 연고며, 용맹한 지혜로 깨닫게 하는 무진장을 얻나니 일체중생의 어리석은 번뇌를 능히 없애버리는 연고며, 결정한 변재(辯才)의 무진장을 얻나니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문을 연설하여 중생들을 깨닫게 하는 연고며,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는 무진장을 얻나니 모든 보살의 행을 구족하여 때가 없는 비단을 이마에 매고 장애가 없는 온갖 지혜에 이르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니,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일체 선근으로 회향할 때에 이 열 가지 무진장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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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의 과위(果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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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오무진공덕장 회향을 수행하게 되면 어떤 과위에 오르는가를 열 가지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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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주차회향(住此廻向)에: 이 무진공덕장 회향에 머물 때
득십종무진장(得十種無盡藏)하나니 : 열 가지 무진장을 얻게 된다. 무진장은 다함이 없는 창고다. 순수한 마음으로 불법을 널리 공양 올리는 것이 곧 무진장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퍼내고 퍼내도 더 불어나면 불어났지 바닥이 나지 않는다.
스님들도 각자 인연 따라서 사시는 절에서 신도들을 모아놓고 법문을 해봐도 작년 하는 것과 금년 하는 것이 다르다. 훨씬 익숙하고 법문할 소재도 많아지고 말도 더 많아지고 설명도 더 깊어진다. 법이라고 하는 것의 원리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법은 무진장이다. 바닥날 리가 없다. 자꾸 훨씬 불어난다.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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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何等)이
위십(爲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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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득견불무진장(所謂得見佛無盡藏)이니 : 부처님을 친근하는 것에 대한 무진장이다.
우리 절에 있는 부처님만 부처님인 줄 알았는데 이 신심을 자꾸 증장시키다 보면 가는 곳마다 부처님이 눈에 들어온다. 불상만 부처님인 줄 알았는데 역사적인 부처님도 눈에 들어오고 우주에 변만해 있는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법신불도 이해가 된다.
나중에는 두두물물이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 데까지 눈을 뜨게 된다.
대단한 일이다. 그런 것이 득견불무진장이다. 내가 별표를 세개씩 쳐나가다 보니까 득견불무진장의 열 가지 항목에 전부 별이 세 개씩 다 붙었다.
왜 견불무진장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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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일모공(於一毛孔)에 : 한 모공에서
견아승지제불(見阿僧祗諸佛)이 : 아승지 모든 부처님이
출흥세고(出興世故)며: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대단한 것이다. 곳곳이 부처님이고 산천초목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넘어서 한 모공모공마다 아승지제불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야말로 부처님을 무진장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지혜가 여기까지 계합(契合)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것도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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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입법무진장(得入法無盡藏)이니: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무진장이다. 법의 세계,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의 세계에 들어가는 무진장을 얻음이니
이불지력(以佛智力)으로: 부처님 지력으로써, ‘깨달음의 지혜의 힘으로’라고 해석해도 좋다. 그런 지혜의 힘으로써
관일체법(觀一切法)이 : 일체법이
실입일법고(悉入一法故)며: 한 법에 다 들어가는 것을 관하는 까닭이다.
일체법이 한 법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에 대해서 바닷물 비유를 잘 든다.
바닷물 한 방울의 맛을 보면 온 드넓은 바닷물의 짠맛을 다 안다.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 인생사 세상사를 앉아서 환하게 다 안다. 이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한 법에 들어감을 본다. 거기도 또 별이 세 개나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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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억지무진장(得憶持無盡藏)이니 : 기억해서 가지는 무진장을 얻으니
수지일체불소설법(受持一切佛所說法)하야: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수지해서
무망실고(無忘失故)며 : 무망실고다.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데 일체 부처님의 소설법을 수지해서 그동안 본 경전 어록을 다 외울 수 있으면 좀 좋겠는가. 나는 늘 이런 대목을 볼 때마다 부럽다. 언제나 이 점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부러워하는 것은 내가 제5무진공덕장 회향을 제대로 닦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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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결정혜무진장(得決定慧無盡藏)이니 : 변할 수 없는 확실한 지혜의 무진장을 얻는다.
화엄경에는 특별히 결정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확실한, 분명한, 아주 결정적인, 요지부동, 변할 수 없는’ 이런 의미다. 결정혜무진장을 가지고
선지일체불소설법비밀방편고(善知一切佛所說法秘密方便故)며: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바 법의 비밀과 또 비밀한 방편을 잘 안다. 결정적인 지혜, 분명한 지혜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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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해의취무진장(得解義趣無盡藏)이니: 의취를 아는 것, 의취라 했지만 이치를 말한다. 이치를 아는 무진장이다. 그래서
선지제법이취분제고(善知諸法理趣分齊故)며 :모든 법의 이치분제를 잘 안다. 분제라는 것은 한계다. 어떤 이치는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이치의 길은 어떻고 하는 것들을 환하게 잘 안다.
처음에는 두루뭉술하게 ‘이게 그거고 그게 이거고’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데 좀 더 깊이 이해하면 정말 세밀하게 다른 점이 있다.
신도들이 흔히 편한 말로 ‘뭐 불교나 기독교나 종교는 다 그렇고 그렇지요. 다 그게 그거죠’라는 말을 한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도 답답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어째 불교하고 기독교하고 같은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도 막 섞어서 이야기 한다. 신도들이 그렇게 아는 것은 다 우리 스님들이 잘못 가르쳐서 그렇다. 이치와 이치의 한계가 분명히 있고 그 차이가 천지 차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크게 세 갈래로 나누면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다. 근래 상좌부 불교라고 해서 근본불교인 소승불교가 지금 우리나라에 판을 친다. 수행법도,교리도 판을 친다. 선불교는 아직도 세력이 짱짱하다. 그 중 세력이 제일 미약한 것이 대승불교다. 대승불교가 제1불교인데도 그렇다. 대승불교가 제일 불교이고 가장 높은 불교이고 더 이상 높을 것이 없는 불교이고 비교할 바가 없는 불교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제일 미약하다. 화엄경, 법화경, 유마경은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다. 금강경은 좀 약하다.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 이 3대 대승경전을 가지고 대승불교를 크게 일으켜야 된다.
이 세 가지 경전에는 단순하게 이치를 드러내는 데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승 불교가 이렇다’라는 것을 세상에 확실하게 표명하며, 대승불교 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선언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마경 같은 것, 법화경 같은 것은 아주 대단하다. 화엄경도 사이사이에 그런 뜻이 많이 담겨져 있다.
어떤 이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컴퓨터의 진화로써 이야기 한다. 나는 그 차이를 전화기로 비유를 잘 든다. 옛날의 유선전화와 현재의 스마트폰 차이다.
근본불교는 불교의 출발로서는 그만한 공이 없을 정도로 최고의 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비교를 하면 그 성능이 우리가 처음 방에서 쓰던 유선전화기 수준이다. 대승불교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기막힌 성능을 지닌 스마트폰이다. 그 차이점을 확실하게 잘 알아야 된다.
숫타니파타나 법구경은 초기 불교의 대표다. 그런 데는 무조건 이생을 버리고 더이상 생을 받지 않는 것 적정열반에 들어서 인생살이를 영원히 굿바이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금강경에도 수다함(須陀含),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이 나오는데 아라한 하면 완전히 다시 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생에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고생하는 중생들은 어쩌라는 말인가?
근본불교는 생을 받지 않고 이 세상과 완전히 이별해 버리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화엄경은 끊임없이 다시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을 받고 다시 와서 중생들과 더불어 동고동락하고 울고 웃고 같이 지지고 볶고 같이 살아야 된다.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이처럼 천지차이다.
이 세상이야 썩든 말든 너희야 죽든 살든 상관없이 내 몰라라 하고 나만 저기 멀리 도망가버리면 된다고 하는 것이 소승불교 교리라면, 대승불교는 그렇지 않다. 수생(受生)하여 죽어서 또 오고 죽어서 또 오고 천번이고 만번이고 다시 이 세상에 돌아와서 중생과 같이 산다. 그래서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으레 ‘속환사바하십시오. 빨리 사바세계로 돌아와서 우리 같이 삽시다’라고 축원을 한다.
이치는 다시 오게 되어 있다. 다시 돌아와서 같이 안 살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소승불교에서 아무리 잘 공부 해서 인생을 하직하고 더이상 사바세계 안온다고 원력을 세워도 어디 도망가지 못한다. 안오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 같은 분은 열 네 번이나 오신 것이 확인된 분이다. 우리도 확인이 안 됐을 뿐 다 전생에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여러 번 환생을 한 사람들이다.
근본불교에서 다신 안온다고 하면서 갔지만 그것은 몰라서 그런 것이다. 여기 살면서 지은 빚이 있고 인과가 있고 인연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외면한다는 말인가.
다시 안 올수 있다고 한 것은 초기 불교가 잘 못 본 것이다.
이 생에 여기서 우리가 지은 인연이 어디 가겠으며 진 빚이 얼마인데 피할 수가 있겠는가? 그 빚을 갚아야 한다. 빚 갚으면서 빚지고 빚 갚으면서 또 빚지며 사는 것이다.
물론 삶이 하도 괴롭고 힘드니까 떠났으면 좋겠고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특히 뜨거운 햇빛의 인도 사회 같은 데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런데 아무리 지옥과 같이 뜨거운 세상이라 하더라도 안오고는 안되게 되어 있다. 이치가 그렇다.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이 대승불교다.
두루뭉술로 소승불교나 대승불교나 선불교를 가르쳐서는 안된다.
저마다 이치의 분제가 있다.
선불교를 짚고 넘어가자면 선불교는 그 견해가 하늘을 찌를듯이 높다. 조사스님들 대화에 보면 ‘니는 여래선은 알았지만 조사선은 꿈에도 몰랐다’는 소리를 잘 한다.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높이 치는 것이다. 선불교의 견해는 정말 대승과 소승을 뛰어넘는 높고 고준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아주 소승이다.
그래서 ‘일생에 한 개나 반 개를 제도해도 좋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 고준한 라인을 통과하는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다.
잘 해야 하나 건지고 아니면 반 개 건지고 만다. 그 정도만 제도하고 끝나는 것이다.
저 하늘 높이 라인을 쳐놓고 거기에 올라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턱걸이라도 올라올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대승불교는 아주 작은 멸치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다 건지려고 한다. 그 그물이 촘촘하다. 꼭 큰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더라도 조그마한 인연이라도 맺어서 보다 더 그 인연이 성숙되고 성숙되도록 세월을 기다리면서 그들을 이끌어 간다.
그런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이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천지차이인 것처럼 대승불교와 선불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국 불교가 한 때 선불교가 휩쓸어서 지금도 선불교가 휩쓸고 있다. 선불교는 그 견해가 고준하나 그 행위에 있어서는 아주 개인만을 생각하는 식으로 추락했다. 본래는 그렇게 안되어 있지만 현실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큰 잘못이다.
그러한 제법이치의 분제를 잘 알려면 해의취무진장을 얻어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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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무변오해무진장(得無邊悟解無盡藏)이니: 가없는, 깨달아서 아는 무진장을 얻음이니
이여허공지(以如虛空智)로 : 허공과 같은 지혜로써
통달삼세일체법고(通達三世一切法故)며 : 삼세일체법을 통달한다. 허공과 같은 지혜가 있어야한다. 어디에도 걸림이 있으면 안되고 툭 터져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도 이해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초기 불교가 어떻고 비밀불교가 어떻고 근본불교가 어떻고 기복불교가 어떻고 호국불교가 어떻고 그 모든 것들을 환하게 통달해야 된다. 그렇게 하려면 또 우리들 같이 너무 대승불교에 집착하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또 대승불교는 그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줄 알아야 대승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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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복덕무진장(得福德無盡藏)이니 : 복덕무진장을 얻는다. 복자도 그렇고 덕자도 그렇고 글자만 봐도 퉁퉁하게 복덕 있게 생겼다. 복덕이 참 좋은 것이다. 거기다가 무진장이다. 복덕의 무진장을 얻으니
충만일체제중생의(充滿一切諸衆生意)하야 : 일체중생들의 생각을 일체중생들의 마음을 가득히 채워서 뭐든지 좋아하는 대로 다 가득히 채워준다. 그래서
불가진고(不可盡故)며 : 다함이 없게 해준다. 누가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간에 다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받아주고 채워주고 원만히 해준다.
보살대승불교 화엄불교는 이렇게 넉넉하다.
충만일체제중생의 해서 다함이 없게 하는 연고이니 대만의 원도선원이라고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조그마한 절의 조그만 스님 30대 중반이나 될까하는 비구니 스님이 화엄경을 100만부를 찍어서 전세계에 보급하려는 것이다. 대단하다. 100만부를 찍어서 일차로 그 중 200부가 여기 우리 문수선원에 왔었다. 설사 하필 100만부에 그치겠는가, 그렇게 하다보면 천만부도 할 수 있다. 70억 인구에게 돌아가려면 억만부는 찍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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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용맹지각무진장(得勇猛智覺無盡藏)이니 : 용맹지각 무진장을 얻으니
실능제멸일체중생(悉能除滅一切衆生)의 : 일체 중생의
우치예고(愚癡翳故)며 :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다 없애게 한다. 그러려면 아주 용맹한 지혜가 있어야 된다. 이야기할 상황에서는 가차없이 해야된다. 인과(因果) 같은 것을 이야기 할 때 ‘그게 다 우리들의 인과다’ 하는 말을 하고 싶어도 듣는 사람이 마음 다칠까봐 그렇게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불자들은 그런 것이 갈등이다.
‘그거 다 인과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 나는 도리지 그게 어디 멀리 가겠느냐’ 이런 소리를 하고 싶지만 그 사람 마음 다칠까봐 못한다. 그런 것은 용맹지각이 아니다. 용맹지각이 있고 자기 소신이 확실하다면 마음을 다치게 하더라도 이야기 할 것은 이야기 해줘야 된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내줘야 한다. 상처가 나야 고쳐지기 때문이다. 늘 ‘오냐오냐’ 해서는 고쳐질 까닭이 없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첫째 자신에게 그렇고 다른 사람을 가르쳐 줄 때도 역시 용맹지각이 있어서 어리석음을 소멸하게 해줘야 된다. 그 어리석음을 소멸해 주면 당장에야 섭섭해 하고 다시는 안본다고 돌아설지언정 ‘그래도 좋다. 그래도 네가 그런 이치를 제대로 깨달아서 앞으로 지혜롭게 살기만 하면 나는 더 이상 바랄 바가 없다’라는 소신을 갖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다시는 나한테 안와도 상대가 분명한 이치를 알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용맹지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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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결정변재무진장(得決定辯才無盡藏)이니: 분명한 변재 확실한 변재를 얻는다. 법을 전할 때 말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 나는 가끔 설법도 오디션을 보는 기회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늘 대중 앞에서 이야기 하지만 고칠 점이 많을 것이고 보완할 점도 많을 것이다. 이런 점을 화반탁출(和盤托出)해서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스님 손짓이 틀렸습니다. 손짓 좀 하지 마세요. 보기 싫습니다’ 예를 들어서 ‘옷은 왜 그렇게 입고 왔습니까? 그 옷도 고쳐야 합니다’ 하는 소리들을 지적받는 것이 좋다.
TV프로그램중에 ‘k팝스타’를 보면 노래하는 것보다 그 평하는 소리가 들을만 하다.
‘마음이 안담겨 있다’느니 ‘자연스럽지가 않다’느니 ‘왜 가성을 그렇게 많이 쓰느냐’느니 그런 평들도 하는데 하나하나 깊이 있고 기가 막힌 평들을 한다.
우리 설법하는 스님들도 보면 가성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가성을 쓸 때는 또 어느 정도 써주는 것도 괜찮지만 설법을 잘하는 스님 중에서도 가성을 너무 많이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들을 가차없이 평할 수 있다면 학인들에게 아주 좋은 설법훈련이 될 것 같다. 요즘은 티비나 인터넷 있으니까 언제든지 화면을 띄워놓고 앉아서 한 10분 듣고 스톱시키고 평하고, 한 10분 듣고 또 스톱시키고 메모해놨다가 평할 수 있다. 설법할 때의 태도라든지 말씨라든지 예를 들어서 사투리를 많이 쓰는 것이나 말의 속도 같은 것도 일일이 누가 교정을 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정변재라고 하는 것이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 무진장을 얻으니
연설일체불평등법(演說一切佛平等法)하야: 일체 부처님이 평등한 법을 연설해서
영제중생(令諸衆生)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실해료고(悉解了故)며: 잘 알도록 해준다. 음식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음식물을 담고 있는 그릇도 중요하다. 그릇을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서 그 음식을 빛나게도 할 수가 있고 망치게도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릇을 잘 써야 한다. 그릇을 잘 쓰면 본래 가치보다 그 음식의 가치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변재가 그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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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십력무외무진장(得十力無畏無盡藏)이니 : 열 가지 힘과 사무소외(四無所畏), 사무외에 대한 무진장을 얻는다. 십력이니 사무소외니 하는 것은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십력존은 부처님이다. 화엄경은 특히 부처님을 십력이라고 표현할 경우가 많다. 그냥 부처님이라고 하면 막연한데, 십력이라고 열 가지 힘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면 그가 누군지 아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십력존을 부처라 해도 좋고, 보살이라 해도 상관없다.
구족일체보살소행(具足一切菩薩所行)하야 : 일체 보살의 소행을 구족해서
이이구증(以離垢繒)으로: 때 없는 비단으로써
이계기정(而繫其頂)하야: 그 이마에 두른다. 최후로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는 것이다. 옛날에 왕의 대를 물려받는 관정의식과 같다. 부처님 법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실행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마에 두르고
지무장애일체지고(至無障碍一切智故)라 : 장애가 없는 일체 지혜에 이르는 연고다.
일체지혜, 평등과 차별을 다 아는 지혜다. 모든 존재는 크게 나눠 평등성과 차별성 이 두 가지를 가진다. 우리들 각자가 지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차별성인데 그 내용을 조금만 들추고 들어가면 전부 평등하다.
우리 모두의 진여불성은 평등한데 그것을 어떻게 확인하는가? 지금 말 듣는 것은 어떤 조건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 아무 조건 없이 듣는 것이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승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그 평등한 실체가 있어서 그 능력으로 듣는다. 그것이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우리가 여러 수십 번을 확인했다. 그것이 견성이고 견성을 넘어서 용성(用性)이다. 성품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양면을 다 아는 지혜가 일체지다. 장애없는 일체지에 이르는 연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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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가지니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할살이
이일체선근회향시(以一切善根廻向時)에 : 일체 선근으로 회향할 때에
득차십종무진장(得此十種無盡藏)이니라: 이와 같은 열가지 무진장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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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어요? 보살님 오랬만예요?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아쉬움, 연말의 설레임^^ 올 한해도 애많이 쓰셨습니다. 항상 고맙고... ' 염화실지 '가 있어서 편안하게 잘 살았습니다.
도반이란 좋은 因緣에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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