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 같은 회고록
이인규 씨가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이고, 부제는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이다. 출판사 조갑제닷컴의 발행인 조갑제 씨는 젊을 때 글 잘 쓰는 기자로 이름을 날렸고 나이 들어 극우 논객으로 변신한 인물이다. 이인규 씨는 책 후기에 조 씨가 원고를 윤문(潤文)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어떤 내용을 담은 어떤 문장이 조씨의 작품인지, 알 만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직 검사의 흔한 회고록은 아니다. 서문부터 부록까지 529쪽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과 무관한 것은 27쪽부터 90쪽까지가 전부다. 부록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개요>는 용어와 문장과 내용 모두 검찰 수사기록 요약 보고서라고 할 만하다. 개인의 기억력과 메모에 의지해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중수부장 직을 사임할 때 수사기록 사본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지, 혹시 검찰 관계자가 보관하고 있는 수사기록을 제공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본문 장르는 ‘무협지’에 가깝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검사의 임무는 법을 위반한 사람을 찾아내고 법정에서 범죄행위를 증거로 입증함으로써 법이 정한 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협지의 주인공은 ‘나쁜 놈 중에서도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하려고 검사가 되었다’고 한다.(26쪽) 그는 1985년 서울지검에서 검사의 첫걸음을 뗐다. 그때는 전두환이 대통령이었다. 힘세고 나쁘기로는 한국현대사에서 단연 으뜸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인규 씨가 전두환과 그 패거리를 처단하려고 애쓴 흔적은 없다. ‘힘센 나쁜 놈’이 누군지에 대해서 이인규 씨는 그때도 지금도 헌법이나 상식과 크게 다른 관념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경동고와 서울법대를 나온 그는 명문고 인맥이 판치던 검찰조직에서 학연‧지연‧혈연으로 얽힌 이들의 청탁을 거절하는 청렴성과 원칙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특수부 에이스가 되었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회고록에서 SK 최태원 회장 구속(2002년)부터 대선자금 수사(2003년)를 거쳐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2009년)까지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한 자신의 업적을 깨알같이 자랑했다. 정홍원‧우병우‧홍만표‧한동훈‧박영수 등 함께 활약한 ‘훌륭한 검사’는 실명을 밝혔다. 검찰을 완전 정의로우며 오류라곤 없는 조직으로 묘사했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 필요한 때만 검찰의 작은 잘못을 슬쩍 비추었고 관련 검사 이름은 익명 처리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랑뿐인 ‘나 때는’ 회고록이다. 그가 검사로 재직한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무고한 시민을 수도 없이 구속하고 기소한 검찰의 조직범죄와 성폭력‧뇌물수수‧증거조작 등 검사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반성도 성찰도 없다.
검사의 글로리
회고록 제목은 이인규 씨의 글로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대한민국 검사’, 그리고 표지의 저자 이름 뒤에 적은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이 그의 글로리다. 24년 6개월 동안 검사로 일한 이인규 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목숨을 끊은 일로 2009년 7월 사직했다. 무려 14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검사’라는 지위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중수부장’이라는 직함으로 자부심을 드러낸다. ‘법률가’라든가 ‘변호사’ 같은 것은 이인규의 글로리가 될 수 없다. ‘검사’나 ‘중수부장’은 내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언어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랑하고 과시하는 데 적합한 표식이다. 인간 이인규는 그런 점에서 문동은이나 하도영이 아니라 박연진과 같은 과에 속한다. 내면의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을 글로리로 여긴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회고록은 아니었으나 윤석열 대통령과 검사정권의 행태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했다. 그들은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와 비슷한 확신을 지니고 유사한 감정을 느끼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중이다. “기업인과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의 힘센 자들은 모두 잠재적인 범죄자다. 시장권력과 정치권력으로 국민을 약탈해 사리사욕을 채운다. 이것을 바로잡아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세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하고 청렴한 검찰조직과 검찰에서 능력을 기른 전직 검사뿐이다. 우리는 사심 없는 엘리트로서 ‘힘센 나쁜 놈’들이 장악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고 있다.”
<한겨레21>이 최근 인용 보도한 참여연대와 법무부의 자료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는 검찰왕국 건설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법무부장관을 포함해 검사 출신 국무위원이 4명이고 국무총리 비서실장부터 국민연금기금 운용위원회 상근 전문위원까지 검사 출신 차관급 공직자는 9명이다. 인사비서관에서 국제법무비서관까지 대통령실에 근무하는 검사 출신 비서관은 7명이다. 외교부와 국제기구 등 법무부 이외 기관에 파견나간 현직 검사가 50명이 넘으며, 검사 아닌 검찰공무원도 10명이나 파견 근무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몫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후보로 주로 전직 검사를 추천하고, 김기현 체제를 통해 영남을 비롯한 국힘당 강세 선거구에 검사 출신 국회의원 후보를 밀어 넣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돈과 정보와 권력이 있는 자리에 이름과 얼굴은 다르지만 생각과 감정은 이인규 씨와 똑같은 사람을 찾아 임명하고 있다. 이인규 씨도 조만간 한자리 받을지도 모르겠다.
노무현의 글로리
회고록 부제에 이인규 씨는 이런 주장을 담았다. ‘나는 노무현을 죽이지 않았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 글로리를 되찾으려면 그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노무현을 죽인 정치검사가 아니다. 평생 힘센 나쁜 놈을 처단한 대한민국 검사다. 노무현은 힘센 나쁜 놈이었다.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박연차에게 뇌물을 받았다. 그가 자살한 것은 변호인 문재인의 무능과, 죽으라고 몰아세운 <한겨례>와 <경향신문> 등 진보언론 때문이다. SBS의 ‘논두렁시계’ 보도는 검찰이 아니라 국정원이 한 짓이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그나마 다툴 가치가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노무현재단의 입장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머지는 사실 공방을 할 가치도 없다. 예컨대 박연차와 면담하면서 노 대통령이 했다고 그가 주장하는 말들은 지어낸 것이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이루어진 짧은 면담은 영상녹화실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자신과 문재인 대통령의 증언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인규 씨는 누구보다 잘 안다.
적어도 내게는, 이인규 씨의 노력이 쓸데없었다. 나는 그가 노무현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노무현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뿐이며 이명박 정권의 망나니 노릇을 검사의 일로 착각했을 따름이다. 그가 본 ‘힘센 나쁜 놈’은 그런 일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수모를 견디며 비굴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검사 이인규는 노무현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러면 죽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박연진이 문동은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검사 이인규는 인간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미필적 고의’를 품었겠는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진 행위’로 받아들인다. 정치는 때로 짐승이 되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사업이다. 그것이 ‘노무현의 글로리’였다. 그는 수모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이 아니다.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 야수의 탐욕과 싸워나갈 벗들에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려고 그런 방식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나의 글로리를 지키겠다. 슬퍼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라.’ 대통령의 마지막 글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이인규 씨에게 말하고 싶다. “맞습니다. 그대는 대한민국 검사였습니다. 그 사실을 그대만의 글로리로 간직하십시오. 당당히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십시오, 그러나 굳이 타인의 동의를 구하지는 마십시오. 노무현의 글로리를 알아보았고 그의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대의 얼굴과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노무현의 죽음을 해석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대는 노무현의 글로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