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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프하고 이틀만에 출근했더니, 그간 sepsis 양상을 보이던 두 환자분이 익스파이어, 침대가 비었다.
한 분은 지난주 새벽에 콜 받았을 때 pulse 안 잡힐 만큼 hypotension 심했지만 fluid resuscitation 되었던 분이고, 다른 한 분은 그그저께 밤새 heart rate 너무 뛰고 tachypnea, RR 40회에 이르게 숨 쉬는 거 힘들어 하셔서 pneumonia 걱정하고 있던 분이었다. 아침 퇴근 전에 올라가봤더니, 할아버지, 숨쉬는 것도 훨씬 편해보이고, heart rate도 정상 언저리라서 다행이다, 했었는데, old age, bacteria를 이기기 힘드셨나. 완전 귀여운 치매 할아버지였는데, 빈 침대가 영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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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의 한 달 째, 물 이외 아무것도 못 드시는 CHF 할머니, 한 달 전부터 곧 익스파이어하시겠다, 보호자에게 얘기가 되어있는데 뜻밖에 꿋꿋이 잘 견디시고 계시는데, 요즈음에는 할머니 컨디션 막 안 좋아진다 싶어, 보호자한테, 오세요, 전화를 해도, 영 귀찮아 하고, 안 오기도 한다. 들은 말로는, 할머니 젊으셨을때, 며느리들한테 너무 못됬게 하셔서 며느리들은 저렇게 아파도 오지도 않는다고. 그럼 딸은? 아들은? 나라도 가시는 길 손 잡아 드리고 싶어서, 할머니 상황 안 좋아지면 나한테 꼭 콜을 달라고 했다. 가는 길에 아무도 없는 건 아무래도 너무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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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쏘피랑 요양병원 당직의사의 고충, 정확히 말하자면, 초보 요양병원 당직의사의 고충에 대해서 떠들었는데, 그게 그렇다. 첫 직장, 사람 살려보겠다고, 누구에게 도움이 되어 보겠다고 작정한 사람의 일자리 치고는 좀 가혹하더라. 일 시작한지 석 달, 익스파이어 환자를 열도 더 봤지만, 아직도, 더군다나 내 눈 앞에서 breath holding이 오고 EKG가 flat을 그으면, 그래서 그 지켜보고 있는 보호자께, 환자분 숨이 멈췄습니다, 얘기해야 할 때, 그래서 그 보호자들의 눈이 빨개지고 눈물이 떨어지는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을때, 참, 이 직업, 지랄 같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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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되었고, 내 삶의 끝을 생각하다 보니, 지금 겪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이 과정 같이 느껴져 옛날처럼 건건이 힘들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는 방법은 그들이 여행하는 패턴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내 경우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이 좋았고, 읽던 책이 좋았고, 언뜻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좋았다. 대학교 4학년, 면접 보러 가던 서울길도, 나는 기차간에서 보는 풍경이 참 좋았었다. 어쩌면 내 인생도 그럴지 모른다. 엄마는, 니가 정착을 하면 마흔도 넘겠다, 걱정하시지만, 난 정착 따위는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걱정도 안된다. 엄마 말대로 마흔이 넘어 한국을 들어와도 한국에서 '정착' 따위를 하지는 않을 거라. 다른 USMLE를 꿈꾸는 아이들처럼 미국에서 시민권 받고 살 생각도 없고, 애들한테 microbiology를 infectious disease 의사 관점에서 멋들어지게 가르치는 것에도 흥미있지만, 교수로 늙고 싶지도 않다. 난, 내 인생,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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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서 씻지도 않고 출근했더니, 여기저기 모래가 저벅거린다.
써핑대회는 좀 별로다. 원래 이러저런 이벤트는 관심 없는데다가, 파도 없어서 여성부 경기는 취소됐고, 당연히 난다 긴다는 고수 써퍼들의 현란한 써핑은 구경도 못하게 됐다. 주위 사람들의 페라가모 신발, 닥스 트렌치 코트, 이런 얘기들은 하품 나오게 따분하고, 나에게 흥미로운 캐릭터는 내가 별로 흥미롭지 않은 모양이고. 젠장, 연애하자나, 친구하자는 거지. 올란도 블룸을 닮은 그 해사한 남자애는, 얘기를 시작하니, 뭐 좀 깬다. 저번 송정에 왔을 때, 크지도 않은 파도에 날씬한 숏 보드 딸랑 가져와서는 힘겹게 패들링해서도 놓치는 파도 위에서도 언제나 생글거리길래, 한국 써퍼들, 전투적으로 써핑하는 것만 보다가, 저렇게 행복하게 써핑을 할 수도 있구나, 참 예쁘다, 했었는데, 여전히 생글거리긴 하지만, 말이 좀 많다. 말이 많은 건 이래저래 손해보는 일. 말 없는 A는 아직 싫은 구석을 찾을 만큼 정보를 얻지 못했고, 말 많은 B는 괜찮은 구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정보를 많이 줘서, 음, 이건 별론걸, 하는 부분이 벌써 생겨버린 거다. 그러고보면 말 많은 '나'는 B처럼 A한테 너무 많은 정보를 줘버렸을 수도 있다. 젠장, 아는 걸 다 할 수 있으면 벌써 프로 써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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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들락거리는 블로그에 목하 자전거 여행기가 진행중이다. 시골길 아무도 없는 버스정류장에 찍힌 그의 자전거를 보고 있자니, 벌써 9년이 지났다,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짧은 영화제 노가다 일도 끝내고, 뭘 하고 살아야할까, 이스라엘이나 갈까,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빗길을 터덜터덜 걸었던 강진 길도 생각나고, 작년 여름, 기막히게 아름다워 행복했던 평창 길도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