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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담장을 걷어낸 옛 서대문형무소. 지금은 역사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 안산에서 정상 봉수대를 포기하고 길고 긴 중턱의 산책로를 택했다. |
-정상을 피해 걸으니 더 좋은 길이
이 물길이 시작되는 생태연못에 다다르면 갖가지 수생식물과 산새들이 노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뭍에는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봄날을 보내는 조팝나무가 산발을 하고, 조경석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영산홍 한 움큼은 철쭉과 함께 연못 조경에 붉은빛깔 포인트를 찍어댄다. 너른 나무데크와 벤치에서 잠시 쉬다 겹황매화와 양지꽃이 노랑 군락을 이룬 길을 택해서 오른다.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생뚱맞게 나타나는 차도를 건너 바른편으로 간다.
100m 정도 간 후 산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다시 또 얼마 가지 않아 심상치 않은 선선한 기운이 감지된다. 빼빼로 같은 침엽수들이 뿜어내는 이 청량감은 안산 산림욕장(7)의 시작을 알리는 메타세쿼이아로부터 비롯된다. 산림욕장 입구 갈림길에서 그대로 직진하면 곧바로 정상 봉수대로 가는 길이니 오른쪽으로 꺾어 빽빽함과 길의 평탄함이 가지런한 산림욕장길을 택한다.
10분 넘게 평탄한 이 흙길을 걷다 팔각정(8)을 만나면 주저 말고 정면의 중턱길로 향한다. 안산 정상의 봉수대로 가는 길이 왼쪽에 있으나 걷기를 선택한 우리가 갈 길은 아니다. 안산 봉수대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압권이라 말하곤 하지만 백련산의 그것과 견주어 특별하지는 않다. 안산 팔각정 이후의 중턱 오솔길은 안산 봉우리 남쪽 옆구리를 타고 돌아 남서쪽 능선으로 30분 남짓 이어진다.
나무데크로 만든 전망대(9)를 거쳐 계속 진진하다 조그만 정자를 지난 곳에서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을 택해 계단 내리막을 밟는다. 잠깐 경사로에 의탁해 하산을 하면 기슭을 따라 포장된 산책로(10)가 나오고 그 밑으로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2㎞나 되는 평탄한 흙길을 왜 포장했을까 싶었는데, 그 답은 휠체어를 탄 노인이 스르륵 스쳐 지나는 것에서 얻었다. 자전거 통행까지 금지시킨 남산의 북측순환산책로처럼 이곳도 노약자나 장애인들에게는 몇 안 되는 숲길 산책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이 포장산책로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아 20분 정도 걸으면 옛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세워진 독립공원과 독립문역(11)이 나오며 이 편안하고 안락한 숲길 걷기여행의 종지부를 찍는다. /글·사진 윤문기 <서울걷기여행> 2010-06-16
스토리가 있는 동네 뒷산 굽이굽이 이어가는 ‘명품길’
서대문구 백련산 ~ 안산 산책로
서울에 걷기 좋은 길들이 여럿 있지만, 은평구 끝자락부터 서대문구에 걸쳐 있는 백련산에서, 홍제천 건너 안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명품길이다. 제대로 걷자면 넉넉히 4시간은 잡아야 할 정도로 길고, 코스에 따라 높낮이도 적지 않아 중급자 이상의 코스로 볼 수 있다.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이 편하고, 길이 잘 가꾸어져 있으며 중간에 힘들면 어디로든 빠질 수 있다.
서울 서북 중심의 밀집지역에 자리 잡은 백련산~안산 등 두 ‘야산’의 산책로는 주변 주민들에게는 참 소중한 쉼터다. 주택가 밀집지역이어서 복잡할 것 같지만 휴일에 찾더라도 북적대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다.
▲ 백련산~안산 산책로는 지하철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길이 잘 정비돼 있어 걷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21일 안산의 메타세쿼이아 삼림욕장 산책로에서 한 여학생이 애완견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백련산~안산 지역엔 예비군훈련장이 있었고, 인근 불량배들이 몰려들곤 해서 휴식공간이 되지 못했다. 1989년께 서울시가 시민공원 조성사업을 하면서 그런대로 현재의 휴식공간으로 모양을 갖추어 왔다. 백련산 정상의 팔각정도 당시 만들어진 것으로 기억된다.
백련산(白蓮山)은 높이가 215m로 말그대로 동네 뒷산이다. 백련산은 은평구 응암동에 잇대어 있는데, 원래 이 산에 매 모양의 바위(응암·鷹岩)가 있어 생긴 동네 이름이다.
금도 정상 팔각정 옆에 매바위 연혁을 새긴 좀 희한한 공덕비가 있는데, 그곳이 실제 매바위는 아닌 듯하다. 산기슭에는 747년(경덕왕 6년)에 진표(眞表)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백련사(白蓮寺)가 있어 산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서대문구 그랜드힐튼호텔 뒤편 주택가 끝자락 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1만9500㎡ 규모의 평탄한 지역이 소위 ‘백련산 논골자락’이다. 서울시는 12월 말까지 무허가 건물과 불법 경작 등으로 방치됐던 이곳을 거점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얼마 전에 발표했다. 한결 더 백련산 산책로가 풍요로워질 것 같다.
이곳에 소나무체험숲, 밤골마당, 복사골마당, 암석원, 허브원 등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편의시설과 체육시설, 숲속 쉼터와 산책로 등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백련산 산책로는 지하철 3호선 홍제역 4번출구나 녹번역 3번출구 두 곳 중 어느 곳으로든 오르면 된다. 능선 꼭대기로 접어들면 북한산과 인왕산을 잘 조망할 수 있다. 15분 정도 평이하고 기분 좋은 능선길을 걷다 보면 백련산 정상 팔각정이 나온다.
팔각정을 둘러본 뒤 건너로 보이는 안산 방면으로 계단길을 내려오다 보면 도로가 나온다. 왼편이 서대문문화체육회관으로 내려서는 길이고 오른편으로 수백m만 가면 유서 깊은 백련사가 나온다. 백련사를 둘러본 뒤 서대문문화체육회관 쪽으로 가는 게 안산 방면이다.
홍제천을 건너야 한다.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홍제천은 슬픈 역사가 밴 하천이다. 왕조실록에도 기록돼 있지만, 양대 호란(胡亂)을 거치며 중국에 잡혀간 부녀자들이 돌아오면 사족(士族)들은 그녀들을 ‘환향녀’라 이름 붙이고 ‘오랑캐에게 실절(失節)한 여자’라며 박대했다.
‘화냥년’이란 치욕적인 욕설이 만들어진 유래다. 당시 조정에서도 딱한 이들 부녀자를 위해 ‘고국으로 돌아올 때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그 잘못을 따지지 않도록’ 정했다고 전한다.
홍제천 천변길은 잘 가꾸어져 있다. 돌다리를 건너 서대문구청 뒷길로 들어서면 안산 일주 산책로를 만난다. 안산(鞍山·296m) 역시 도심 속에 있어 접근하기도 좋지만 편안한 산책로가 더없이 좋은 산이다. 수맥도 풍부해 약수터가 27개나 되고 사방팔방으로 등산로가 많다.
안산이 예전엔 길마재로 불렸다. ‘길마’란 소나 말의 등에 얹는 안장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말 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지어진 산 이름이다. 높이야 낮지만 정상에 봉수대가 있을 정도로 서울 궁궐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안산은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한 안산삼림욕장을 비롯해 안산 연못공원, 휠체어나 유모차로도 쉽게 다닐 수 있는 무장애 숲길 등이 잘 조성돼 있다. 정상까지 바로 올라도 되지만 저지대로 죽 돌아볼 수 있도록 길이 잘 닦여 있다. 현저동 방면까지 가면 독립공원을 만난다.
서대문구와 은평구에 사는 주민들에게 백련산과 안산은 말 그대로 편한 쉼터다. ‘안방’과도 같다. 그런데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떼 지어 자전거를 끌고 올라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뿐 아니라 등산로를 망가뜨린다. 21일 찾았을 때도 쌩쌩 달리는 산악자전거족을 만나 깜짝 놀라야 했다. 종종 사고도 발생하고 있는데 막지 않고 있는 게 문제다. 구청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 /엄주엽 2012-03-23
신라때 창건 백련寺·봉원寺 천년고찰을 출발·도착점으로
놓치기 아까운 코스
백련산과 안산은 산기슭에 각기 천년 고찰을 품고 있다. 두 사찰을 출발·도착 지점으로 해서 코스를 잡는 것도 해볼 만하다.
서대문구 홍은동 백련산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는 신라 경덕왕 6년(서기 747년)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했다고 전한다. 진표율사가 부처님의 정토사상을 널리 펴기 위해 창건해 원래 정토사(淨土寺)였다. 조선조 정종 원년(1399년) 무학대사가 중창했고, 세조의 장녀인 의숙 공주가 부마인 하성부원군 정현조의 원찰로 정하면서 백련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건물이 소실됐으나 3년 만인 현종 3년(1662년)에 대법전을 중건했고, 영조 50년(1774년)에는 사찰을 현재의 규모로 일신했다. 조선시대의 감로왕도(甘露王圖·경전의 내용을 그린 그림)가 보관돼 있다.
서대문구 봉원동 안산 기슭의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진성여왕 3년(88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반야사(般若寺)라고 불렸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했고 1748년(영조 24년)에 찬즙·증암 두 대사가 현 위치로 이전해 중건하면서 봉원사라 개칭했다. 왕실의 시주로 지금의 터로 옮겨 다시 짓고, 왕이 봉원사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도 전한다.
영조의 친필로 쓰인 봉원사라는 현판은 6·25전쟁 때 소실됐고, ‘명부전(冥府殿)’이라고 쓴 정도전의 친필이 남아 있다. 매년 여름에 열리는 연꽃축제가 볼 만하다. 201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