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65) 여호사밧의통치(3)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소서 역대하 18:1-11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께 혹은 선생님께 "친구를 잘 사귀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습니다. 때로는 그런 이야기를 잔소리처럼 여기고, 때로는 내가 누굴 만나든 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되지 않는가 하며 주변 사람들이 탐탁지 않아하거나 반대하는 관계를 이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말씀들이 다 옳은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들을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고 계셨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이미 경험해보신 분들이요, 아니면 기도해보시고 사랑해서 해주신 말씀들이었던 것이지요.
지도자들이 특히 새겨들어야 할 말 중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주위에 아첨꾼들만 둔다면, 결국 그 공동체는 망하거나, 그 지도자가 끌어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본문은 두 지도자를 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복주시는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두 왕,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의 일화를 살펴보시면서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내 곁에 두어야할 사람들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 조합이, 연합이, 그리고 그 둘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사건을 기록되고 있습니다.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대하18:1) 하나님께서 없애고 없애고 재건한 바깥의 청결에 이제는 깊은 속까지의 정결, 개인의 개혁을 넘어서서 모두의 개혁으로 확장하며 열심을 내었던 왕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다윗의 부국과 솔로몬의 강병의 축복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복을 받은 여호사밧이 어떻게 했다고요? 그 신실한 왕 여호사밧이, 악명높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도 예사로운 연합이 아니라,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두 가문이 사돈을 맺은 것입니다. 걱정스럽지요? 네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합 가문과의 연합은 이후 유다왕국을 존폐의 위기로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다윗의 집에 모든 등불이 꺼져버릴 위기로까지 몰고 가게 합니다. 왜요? 오늘 저 아합의 딸 아달랴가 왕자와 왕손들을 다 죽이기 때문이지요(대하 22:10).
연합과 평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여호사밧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세상과 우상숭배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과의 연합은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는 도무지 만나지도 말고, 사귀지도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연합하면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바르게 알라는 말씀입니다. 저를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이끌어오기보다 저의 영향을 받아서 내 신앙이 흐려지고 내 생활이 흐트러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호사밧은 이방신을 섬기는 며느리가 유다의 왕궁에 들어오는 일을 어렵지 않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유다는 모든 우상과 가증한 것을 없애고,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여호사밧은 자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며느리의 신앙, 하나님 믿는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주겠노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야말로 제대로 오판이 되었습니다. 문을 잠시 잠깐 연 것처럼 보이지만, 그 좁은 틈으로 무엇이 들어올지 상상도 못했던 것이지요. 본문은 그런 어마어마한 일들은 아직 보여지지 않던, 그저 착하고 말 잘 듣는 며느리만 보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고 2년이 지났을 때 있었던 에피스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아합과 여호사밧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열왕기서 본문과 조금 차이를 보입니다. 먼저 아합이 신하들에게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왕상22:3) 말하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열왕기에 나오지 않는 “양과 소를 많이 잡았다”는 기록으로 여호사밧의 환심을 사려하는 태도로 시작해, “당신이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시겠느냐?”고 묻는 장면으로 바로 이어지지요. 전체적인 대화를 보면, 아합이 여호사밧을 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돈의 요청이요, 양과 소를 잡은 잔치에서의 요청이요, 북이스라엘의 땅을 되찾는 일이라는데, 냉큼 대답했던 것이지요. “나는 당신과 다름이 없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다름이 없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 당신과 함께 싸우리이다”(왕상22:4참조)
그래요.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 때부터 이어진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이런 연합을 맺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합이 계속해서 아합을 어려움에 빠뜨리지요? 저의 부름을 거절할 수가 없고, 저의 요청을 나몰라라 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아합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저 길르앗 라못은 어떤 곳? 자신의 아버지 아사가 다메섹 아람 사람들에게 성전의 은금을 내어주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공격하게 했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길르앗 라못이 아람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때요? 여호사밧은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4절). 내가 함께 싸우긴 할텐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에서입니다.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 라고 단서를 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요. 여호사밧이 악인과의 연합, 그리고 그와의 동행하는 중임에도, 그로말미암아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지만,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보호받고 지켜주심을 입는 왕이 된 것은 바로, 모든 일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할 줄 알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는 사람들의 말에 속지 않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더욱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오늘 저 여호사밧은, 사람들의 거짓 예언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아합이 그런 여호사밧을 예상이라도 한 듯, 하나님의 뜻을 일러줄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을 둘러싸고 있는 선지자라고 불리우는 무리 400명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길르앗 라못에서의 승리를 예언했습니다(5절). 그런데 여호사밧은 이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사밧이 이르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대하18:6)
그래요.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듣고 있으면서 분위기에 휩싸여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지요. 이들 외에 우리가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는 없습니까? 그는 오늘 이 선지자 400명의 예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간파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아합은, 자기에게 나쁜 일로만 예언하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있다고 실토합니다(7절). 이믈라의 아들에게 아합이 물었을 리는 없습니다. 이믈라의 아들이 늘 아합의 악한 행위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해왔던 것이지요? 저 400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기분이 좋다가도 갑작스레 등장하는, 분명히 못 오게 막았는데 어느 새 와서 외치고 있는 저 미가야의 이야기에 늘 기분이 상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아합은 자기에게 맞장구 쳐주고 자기가 하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고 늘 이야기해주는 저들의 이야기에 함몰되어서, 오늘 미가야의 예언, 그에게 반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늘 무시해왔던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다고요?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이것이 오늘 아합의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그런 아합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들어서는 안된다, 그런 말씀 마시라고 하고 여호와의 선지자 미가야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요. 여호사밧도 가면 승리한다는 말씀, 하나님께서 길르앗라못 저 빼앗긴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겠다는데 듣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듣기 좋은 말을 듣기까지 나쁜 말들을 스킵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아픈 말을 듣기위해 좋은 말들을 스킵하는 사람들입니까?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구하고, 분별하고 전하고 들을 수 있는 우리이시길 축복합니다. 특별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말고, 내게 주시는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 선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합은 여호사밧의 요청에 결국 미워하는 미가야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를 데리러 가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 잠깐 사이에도, 저 거짓선지자들의 달콤한 예언이 멈추지 않습니다(9-11절). 특히 시드기야의 예언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대하18:10)
시드기야가 철로 뿔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가 두 왕 앞에서 어떻게 예언을 할 것인지 미리 구상하고 준비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러니 그는 지금 진실한 예언을 받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서 계시를 받은 후에 철뿔을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철뿔은 연극을 위해 준비한 소품이요, 모든 선지자들과 입을 맞추고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요. 준비된 연극과 맞춰진 입으로 두 왕과 대중을 현혹할 수는 있어도 정확한 하나님의 뜻은 알 수도 드러낼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요. 우리는 이미 이 뒷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 400명의 예언대로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미가야의 예언처럼, 아합의 전투는 그의 생애 마지막 전투가 되는 것이지요?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조금 짚고 넘어가볼까요? 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의 이름 뜻은 ‘여호와의 정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다’는 뜻입니다. 그가 철로 뿔들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아람을 진멸한다고 예언한 것은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에 대해 “그 뿔이 들소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민족들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리니”하고 축복한 신명기 33장 17절의 말씀까지 들어 예언을 하고 있으니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거짓은 이처럼 매우 교묘합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인용하지요? 저 이단들도 모두 다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서 성경귀절들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자기네 교주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같은 성경으로 다른 교주들이 다 하나님이 되는지 자기들끼리 좀 얘기를 시켜보고 싶은 지경인 것이지요. 그래요.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두렵습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넘어지고 멸망길에 들어서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언의 목적은 진리를 말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전하는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합은 자신이 듣고 싶은 예언만 들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 대로 당시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소와 양을 갖다주고 제사장이 된 사람들로, 복채를 주는 이들이 듣고 싶은 소리를 제조해내는 연기자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있지도 않을 거짓된 만족과 안심을, 평강과 형통을 말로 선사하고 대가를, 비용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예언은 들을 때만 좋을 뿐 정작 저들을 유익하게 할 수 없었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섭습니다. 좌우의 날선 검이 살아 운동력있게 우리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 마음의 생가과 뜻을 감찰하시는 것이 말씀입니다(히4:12).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우리를 살리시고 세우시며 빚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우리의 갈길과 가지 말아야할 길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청종하시길 축복합니다.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아합이 듣고 싶었던 말이요, 여호사밧을 꾀기 위해 준비된 말이었지만, 이 말은 그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는,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빈말이었을뿐입니다. 여호사밧을 슬그머지 자기 대신 죽을 자리에 밀어넣어도, 자신은 실컷 변장하고 나가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긴다는데 왜 변장을 하고 가야 할까요? 자기도 신뢰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 움직이고 있는 아합이 참으로 불쌍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특별히 성경 여러곳에 증언하듯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덕목은 대장되신, 지휘관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온통 들려오는 마귀들의 거짓말을 분별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더욱 그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슴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말씀이 주어질 때, 감사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래전 암몬 사람 하눈의 신하들을 보시며, 좋은 사람을 곁에 두시라는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의 신하들, 조문객들을 스파이라 여기며 수염을 자르고 의복을 중동볼기까지 자르게 했던 사람들, 결국 하눈을 얼석은 왕이 되게 만드는 신하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나아만장군의 여종과 신하들이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는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셔야하고, 우리는 저 좋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악한 존재가 아니라, 유익을 주는 좋은 사람이 되시자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조심을 하려해도 먹을 갈다보면 먹물이 튀는 것이요. 굴뚝청소를 하면 얼굴에 검댕이가 묻는 것이지요.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고 했습니다. 붉은 것을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는 것이지요. 저 홍합 짬뽕은, 저 육개장은 앞치마를 하고 조심하며 먹어도 결국 와이셔츠에 묻고 입술이 벌개진 채로 등짝 스매싱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역시 그러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가까이에 있는 존재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존재에게서 친근감(親近感)을 느끼게 되지요. 저와 여러분들은 꼭 닮아야 할 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 눈여겨볼수록, 예수님이 보이는 분들이 다들 되시고, 그렇게 아름다운 연합과 동행을 이루어가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후6:14)는 사도바울의 권고는 차별이나 분파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신앙으로 바르게 서도, 늘 이러한 연합은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같은 신앙 안에서의 연합도 조심스러울진대, 다른 신앙과의 연합은 참으로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요.
일치되지 못한 가치관을 지닌 채 이룬,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이룬 연합이나 친교가 오히려 영적, 정신적 건강을 나아가 육신의 건강은 물론이요, 우리의 물질과 유산마저 다 해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맺고 누릴 모든 연합과 동행은 언제나 먼저 오늘 본문의 여호사밧처럼, “청하건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보소서” 하나님께 여쭙고,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한에서 행하실 수 있는 분들, 답이 없는데 답이 아닌데 먼저 움직이는 일이 없는 분들, 내 시간표가 죽을 듯이 급해도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으시고, 늘 언제나 모든 일에 우리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길에 서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