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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17일 월요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마리아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말씀의 초대
카인은 죄악을 다스리지 못하고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을 보고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은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인류의 첫 가정이 제2세대로 넘어오면서 죄의 모습은 더 복잡해지고 심각해집니다.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왜 카인과 아벨을 차별하셨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카인이 “옳게 행동하지 않[았음]”(창세 4,7)을 암시할 뿐입니다. 창세기에서 주어진 첫 질문 “너 어디 있느냐?”(3,9)는 이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4,9)라는 물음으로 발전합니다. 하느님의 물음이 보여 주는 발전 과정은 자신에게서 형제에게로 건너가는 자아의 확장을 암시합니다.
카인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아우를 죽인 것을 부인하고 오히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4,9) 하고 되묻습니다. 아우와 ‘상관없음’을 선언하고 형제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에서 폭력으로 억울하게 고통받고 존재를 부정당하면서 사라진 수많은 아벨들의 피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교회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고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으며,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 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2항)이라고 말합니다. 카인의 이야기는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면서도 죄인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폭력으로 아우를 죽인 그를 또 다른 폭력에서 지키시고자 표를 찍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 끝납니다. 우리는 각자가 형제자매를 ‘지키는 사람’임을 기억하면서 서로 돌보고 책임지는 사랑을 하며 살아갑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군대에 가면 ‘사수와 부사수’가 있습니다. 사수는 오랜 경험과 능력을 갖춘 군인입니다. 사수는 이제 곧 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부사수는 이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 신병입니다. 사수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부사수를 돌봐줍니다. 내무반 생활, 행정 업무, 외출과 외박에 대한 것을 알려줍니다. 사수가 있기에 다른 선임병들이 부사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수에게 업무를 배우면서 부사수는 가끔 생각합니다. ‘사수가 제대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사수가 제대하고 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배우면서 부사수는 진정한 사수가 됩니다. 저도 사수가 되었을 때, 훈련을 마치고 전입온 부사수에게 업무를 가르쳤습니다. 간혹 사수 중에는 부사수를 괴롭히고, 업무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 사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사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형제 이야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질문과 대답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묻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이는 단순히 카인에게만 주어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착좌 뒤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를 찾았습니다. 람페두사는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입니다. 교황님이 방문하기 전에 람페두사 해변에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그 소식을 듣고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 신앙 안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삶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제 형제와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의 지킴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형제자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당신의 자비를 전하며,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소서.”
<님바라기>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님
곁에
계셔도
님
보지
못함은
나
닫은
탓인데
님
보고
싶다고
님
아닌
무엇을
나
님께
청하랴
님
보지
못해도
늘
함께
계시는
님
숨결
느끼니
나
마냥
기쁘네
오늘의 성인
성인 성모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Seven Founders of the Order of Servites)
성 본필리오,
성 보나준타,
성 마네도,
성 아미데오,
성 우구쵸,
성 소스데네오 그리고
성 알렉시오 팔코니에리
활동년도:
신분:
지역:토스카나
창설자 7성인은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면서 세나리오산에서 은수 생활을 하다가 그 후에는 토스카나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전교했고, 성모의 종 수도회를 창설하여 1304년 사도좌의
인준을 받았다.
그들의 축일은 창설자 7성인중 하나인 성 알렉시오 팔코니에리가 1310년에 세상을 떠난 날이라고 전해지는 오늘 지낸다.
피렌체에서 온갖 공경과 명예를 받기에 합당한 일곱 분이 있었다.
그들은 형제적 우애로 결합되어 같은 이상을 찾고 있는 분들이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흡사 하나의 성좌를 이루기 위해 모으신 일곱 별과도 같이 이 일곱 분을 모아 당신 자신의 수도회인 성모의 종 수도회를 세우셨다.
내가 이 수도회에 입회했을 때 일곱 분 중 알렉시오라고 하는 형제 외에는 생존해 있는 분이 없었다. 성모님은 우리 수도회가 어떻게 창립되었는지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도록 오늘까지 이 형제의 육신적 생명을 보존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이 형제는 내 눈으로 직접 본 바와 같이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거룩한 모범으로써 착한 생활로 이끌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생활로써 자신과 첫 형제들이 이룬 완덕 및 수도회 초기에 있어서 생활의 경건함을 증거해 주었다.
공동 생활을 시작하기 전 그들의 생활 형태를 다음 네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첫째로, 교회와 관련해서 보자.
어떤 이들은 평생 동정의 생활을 하느님께 서원한 이들이었고, 어떤 이들은 혼인 계약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아내를 여의고 혼인 계약에서 해방된 이들이었다.
둘째로, 그들의 직업을 보자.
그들은 모두 상인들로서 현세 사물의 매매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값진 진주 곧 우리 수도회를 찾았을 때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큰 기쁨으로 자신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바치고 그분들을 충실히 섬기기 시작했다.
셋째로, 동정 마리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을 보자.
피렌체에는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기 위해 설립된 오래된 단체가 하나 있었다. 오랜 전통과 거기에 속한 남녀 회원들의 많은 수효와 그 성덕 때문에 그 단체는 다른 단체들보다 더 알려지고 더 위대한 칭호를 갖고 있었다.
그 단체는"대 성모회"라 했다. 우리가 언급한 이 일곱 분은 함께 모이기 전에 동정 마리아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이 단체에 속해 있었다.
넷째로, 그분들이 이룬 완덕을 보자. 그분들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했고 모든 생각과 언행에서 하느님을 경배했으며 주님을 섬기는 데에 생활 전체를 바쳤다.
공동 생활을 하기로 확고히 결의한 후 하느님의 감도와 성모님의 부르심으로 자신들의 집과 가족들을 떠났다. 가족들에게는 필요한 것만을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다음 슬기롭고 모범적인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계획을 말해 주고 성실히 조언을 구했다. 그 후 세나리오산에 올라가 산꼭대기에다 알맞는 작은 집을 하나 짓고 거기서 살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분들은 자신들만이 성덕에 도달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므로, 자신들을 통하여 성모 마리아께서 세우실 이 새로운 수도회가 커지도록 다른 사람들도 이 공동체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들은 새 회원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고 또 몇 명을 받아들여 우리 수도회를 설립했다.
이 수도회는 시초부터 성모 마리아께서 세우신 것으로서 형제들의 겸손으로 기초가 놓여졌고 형제들의 사랑으로 건립되어 그들의 가난으로 보존되었다. [2월 17일]<굿뉴스>
성 콘스타빌리스 (Constabilis)
활동년도 : 1060-1124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카바(Cava)
같은 이름 : 꼰스따빌리스
이탈리아의 루카니아(Lucania)에서 태어난 성 콘스타빌리스는 나폴리(Napoli) 근교 카바에서 성 레오의 지도하에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1122년 그 수도원의 제4대 원장이 되었고, 카스텔아바테(Castelabbate)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1893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자 루카 벨루디(Luke Belludi)
활동년도 : 1200-1285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같은 이름 : 누가, 루가, 루까, 루카스, 루크, 누까
이탈리아 파도바(Padova) 교외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루카 벨루디(Lucas Belludi, 또는 루가 벨루디)는 20세가 되었을 때,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로부터 직접 작은 형제회의 수도복과 띠를 받았다. 아마도 그는 파도바(Padova) 성 안토니우스(Antonius, 6월 13일)의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는 관구장을 역임했고 설교에도 능하여 선교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성 안토니우스에 대한 공경이 그토록 널리 전파된 이면에는 루카의 헌신적인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역사가들은 증언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27년에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