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芝薰)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룸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일는 마을마다
타는 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상아탑』 5호, 1946.4)
[작품해설]
김종길에 의해 “우리나라 낭만시의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은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시로 씌어졌다. 이 시는 7·5조의 음절수를 기초로
한 3음보 율격의 민요조 가락과 친근한 우리말 구사, 그리고 간결한 표현 방법을 사용하여
체념과 달관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많은 이로
부터 사랑받고 있는 목월의 대표시 중 하나이다. 이 시에서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는 2연과
5연에 반복되는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이다. 본래 ‘나그네’는 떠도ᅟᅳᆫ 구름의 심
정으로 여기저기 그저 닿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으로, 구름을 따라 흘러가는 달과 함께 세속
적인 집착과 속박에서 벗어난 동양적 해탈의 경지를 표상한다. 유유자적하고 행운유수(行雲
流水)한 서정을 짙게 풍기는 이 ‘나그네’는 작품이 씌어진 식민지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과 관련된다. 그것은 바로 나라 잃은 백성들의 체념과 달관을 뜻하는 동시에, 현실 상
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시인 자신의 표상이기도 한다.
강나루를 건너가면 밀밭 사이로 외줄기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고적한 풍경이 나타난다.
이것은 상의 푸른색과 밀밭의 푸른 색조가 어울려 짙은 색감을 드러내며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다. 그리고 외줄기 길에서 느껴지는 나그네의 고독은 삼백 리로 더욱 깊어진다. 여기서 ‘삼
백 리’는 실제적 거리라기보다는 화자가 느끼는 친숙한 숫자로 향토적 분위기 형성에 이바지
한다. 외줄기로 길게 뻗어 있는 쓸쓸한 황톳길을 밟으며 술 익은 어느 마을을 지날 때, 마침
서산 하늘 가득히 타고 있는 저녁몰이 고독한 나그네의 가슴을 온통 서럽게 불태우고 있다.
이렇게 노래되고 있는 자연 풍경은 분명 한국인의 의식 속에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정감
어린 정경이다.
이 시는 ‘강나루’ → ‘미밭길’ → ‘술’ → ‘저녁놀’로 시상이 발전되고 있는데, 이것은 술의 재료인 ‘밀’에서 실제의 술인 ‘술 익는 마을’로, 그리고 술을 마신 얼굴의 붉은 빛을 연상하게
하는 ‘저녁놀’로 이미지가 확대된 것이다. 따라서 ‘술 익는 마은’[서정]과 ‘타는 저녁놀’[서경]
의 조화로 자연과 인간이 동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푸른색과 붉은색이라는 색채의
대비와 함께 후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한층 더 승화된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1연의 ‘밀밭 길’이 3연의 ‘외줄기 길’로 변형, 발전된 것은 밀밭 길의 ‘아름다움’이
남도 삼백 리로 뻗은 외줄기 길의 ‘고독’으로 변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고독한 ‘길’과 그 길
을 가는 ‘나그네’ 사이에 ‘저녁놀’이 타고 있는 것에서 나그네의 고독한 길이 다눈한 고독으로
그쳐 버리는 것이 아닌, 술과 관련되는 황홀 속에 번져 가는 차원 깊은 고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는 1연을 제외한 나머지 연을 모두 명사형으로 끝맺고 있는데, 이것은 연과 연 사이에 여백을 줌으로써 시상을 함축하여 각 연 사이의 유동성을 막고 감동의 여운을
주는 효과를 지닌다.
[작가소개]
박목월(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퉁딱딱 퉁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이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산새알 물새알』(1962),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시선』(1975), 『백일편의 시』
(1975), 『구름에 달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8),
『박목월-한국현대시문학대계 18』(1983), 『박목월전집』(1984), 『청노루 맑은 눈』(1984),
『나그네』(1987), 『소금이 빛하는 아침에』(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