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이 도시를 품고”
-한북정맥3(노채고개-원통산-운악산-명덕삼거리-수원산-불정산-국사봉-큰넋고개-죽엽산-고모산-축석령, 42㎞, 2015.12.6.)
들머리 노채고개는 아직 한밤중이다. 야간산행은 늘 긴장과 가쁜 숨으로 시작한다. 수피령에서 시작한 길은 점차 서울에 가까워져 산행 시작 시간도 일러지고 있다. 원통산에는 선두조로 백구님, 섬마을님, 산개미님, 행운별님이 먼저 도착해서 쉬고 있었다. ‘관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원통산은 포천시의 동쪽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백구님이 앞장서고 나는 뒤를 따랐다. 원통산 쪽에서 오르는 운악산은 현등사 쪽에서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르게 가파르고 험하다. 아이젠이나 스패츠를 사용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길이라 어지간히 미끄럽다. 긴 오르막을 로프에 의지해 서봉에 오르니 새벽 4시 10분, 포천시의 마을들은 까만 솜이불 속에 아직 잠들어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 잠든 도시를 끌어당겼으나 시커먼 어둠 속에 쇠잔한 별빛 잔영만 묻어나왔다.
운악산은 청계산, 강씨봉 등과 이어져 서북쪽 포천과 동남쪽 가평의 경계를 이룬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모양이란 뜻으로 기암들이 즐비한 경기의 금강이다. 간식을 먹고 있는데 바보도사님이 서둘러 출발한다. 어제 남부 오산종주를 해 한숨도 못 잤을 텐데 피곤한 기색이 없다. 산행 내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가랑이가 찢어지거나 말거나.
군부대 철조망을 끼고 한참을 내려가자 부대 막사가 보이고 포장도로가 나왔다. 정맥은 운악산과 수원산을 연결하지 못하고 그 사이 47번 국도에서 끊겨 있었다. 개들이 짖어대는 외딴 민가를 지나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왼쪽 철조망을 따라 경계병은 졸린 눈을 비비고, 우측으로 포레스트 골프장은 미명을 가르며 해방구처럼 불타고 있었다. 명덕삼거리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동이 트고 도로에는 간간이 차들이 지나갔다.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버스 안에서 잠시 몸을 녹였다. 뒤에 곧 따라올 줄 알았던 산이야님이 뒤늦게 도착했다. 개들이 무서워 기다렸다가 후미조와 같이 왔다고 했다.
밥을 먹고 산을 오르는 데 제법 숨이 차다. 수원산 정상까지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속이 좋지 않아 수원산전망대는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양사언이 봄풀에도 가을 서리가 서린다고(春草結秋霜) 노래했다는 산이란다.
잣나무 숲과 참나무 숲으로 에워싸인 산길에는 뒤떨어진 가을이 어렴풋이 서성인다. 미련이 아니라 뒷문은 잘 잠갔는지 헷갈리는 건망이라며 손사래 친다. 쉰 밥 같은 계절을 걷다 보니 어느새 불정산, 사방으로 연봉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포개졌다. 멀리 남쪽 베어스타운에서는 슬로프에 연신 인공눈을 뿌려 대고, 머리 위로는 창살 같은 송전탑이 속울음을 쏟으며 지나갔다. 가까운 산은 겨울 흙빛으로 헐벗어 선명했고, 그 너머로 차츰 흐릿해지더니 멀리 산맥의 끝에서 산들은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마주한 시간들은 흐린 날의 하늘빛으로 기어이 묽어지고, 머물던 사람들도 뾰족했던 기억만 남기고 초겨울 어스름한 저녁처럼 떠나가곤 했다. 저기까지의 까마득한 거리도 어쩌면 스쳤던 시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국사봉을 지나 큰넋고개로 내려오면 육사생도 6.25 참전기념비가 나온다. 당시 수업 중이던 육사생도 600여 명이 참전한 이곳에서 생도 100여 명은 전사했다. 철원, 포천의 땅들은 아직도 곳곳에서 전쟁을 품고 있는 듯했다. 과메기 안주에 막걸리가 금세 동이 났다. 단체사진을 찍고 다시 죽엽산으로 향했다.
정상까지 도상 6킬로였는데 산은 생각보다 훨씬 품이 넓어 오후 2시쯤에야 도착했다. 광릉임업시험림을 품고 있는 죽엽산(竹葉山, 622m)은 400여 년 동안 잘 관리되어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명산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 흔한 정상석 하나 없이 참나무에 명찰만 덩그러니 걸려 있다. 산의 모양이 대나무 잎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산줄기는 남쪽으로 뻗어내려 광릉의 터를 이룬다. 마오님을 따라 흰둥이, 누렁이 강아지 두 마리가 나타났다. 큰넋고개에서부터 따라온 모양인데 아무리 쫓아도 돌아가지 않았다. 비득재까지 따라온 강아지들은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고개 어느 식당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가려면 죽엽산 8킬로 산길을 넘어가야 하는데 저들은 다시는 어미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죽엽산 맞은편 비득재 언덕에 앉아 행운별님이 내놓은 곳감을 먹으며 대원들을 기다렸다. 이곳에서 날머리 축석령까지는 8킬로 남짓 남았다. 조금 올라가자 비득재 고갯마루에 위치한 고모산(노고산, 380m)이다. 그곳에 있었다는 고모리산성은 대부분 파괴되어 성벽을 확인할 수 없다. 북으로 철원 포천 일대와 남으로 한강일대를 연결하는 삼국시대의 군사상 요충지였다는데, 백제를 지키는 방어진이었는지 고구려를 넓혀 주는 전진기지였는지 알 수 없었다. 낙엽 뒤덮인 산길을 내려오면서 천오백여 년 전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군졸들은 자신의 목숨을 짓이겨 왕의 영토를 지키고 넓혔으나 그들의 피는 왕의 옷에 묻지 않았고 비명은 성벽에 막혀 왕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벽돌 한 장보다 더 허망하게 뜯겨 나갔을 군졸들의 무덤, 그러나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 공간도 따라 흘러 이미 그들이 싸우던 그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공간은 새롭게 태어나고 그들의 흔적은 표지판 글자들의 획 속에서 흔들려 아직도 정처 없다.
한북정맥은 천도교공동묘지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야트막한 산은 크고 작은 묘지들로 벌거벗었다. 저들은 왜 죽어서도 볕 좋고 넓은 땅을 차지하며 누워 있을까. 죽음으로도 끝내 버리지 못한 집착인가, 후손들의 허황된 욕심이 저들을 붙잡고 있는 것인가. 이 비좁은 산하가 죽은 자들의 객쩍은 후일담으로 신음하고 있다.
길은 광릉수목원으로 가는 포장도로를 타다가 다시 도로 반대편으로 올라서 꾸불꾸불 다시 3킬로를 이어 간다. 곳곳에서 군부대에 막혀 철조망길이 되었고, 신축 공장 건물들은 정맥을 끊은 자리에 그어진 흉터로 서 있었다. 도시로 내려온 산은 살점 발린 초겨울 싸리나무처럼 앙상하다. 백두대간은 조금씩 복원이 되고 있는데 정맥은 아직도 훼손이 한창이었다. 바보도사님은 보이지 않는 길을 뚫고 가로막힌 길을 새로 만들었다. 귀락터널 위 생태통로를 건너 도로를 우측으로 끼고 한참을 따라가 날머리 축성령에 도착했다. 오후 4시 반, 늦가을과 겨울의 불안한 동거 같았던 3구간이 끝났다. 곳곳에 삼국시대의 전설을 품은 한북정맥은 닳고 남루한 산들로 길게 뻗어 내렸다. 도시의 바람은 낮은 산들을 쉽게 타고 넘어왔고, 오래된 산들은 어린 도시를 끌어안아 가던 길을 접었다.
1킬로를 찾아 헤매다 겨우 방일해장국집을 찾았다. 삼겹살 먹고 싶다고 솔별대장님에게 칭얼댔더니 한북구간 끝나는 날 사 준단다. 배탈이 난 사인암님은 종일 고생했을 텐데 식사도 못하고 화장실에서 서성거린다. 몰래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행운별님의 트랭글에는 49킬로가 찍혀 있다. 다들 사연 그득한 하루가 지나갔다.
첫댓글 구구절절 사연 많은 정맥길에 손변님의 사진이 몇안되어 생각해봅니다.
경치를 가슴에 담으셨거나
아니면 너무 힘들어 사진찍는것 마져도 잊어 먹었거나...그래도 국사봉에서 인증사진 한장은 건지셨네요
사진보나 글에 더 정감이가는 정맥 나들이길
수고 많으셨구요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아고, 방장님이 신경 써 주셔서 아주 재미있고 편하게 산행하고 있습니다. 혹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일러 바치겠습니다. ㅎ
ㅎㅎㅎ 솔대장님께 삼겹살 꼭 구워달라고 하세요
손변님의 명쾌한 산행스토리에 빠져듭니다~~
이번 구간에선 함께 한 걸음 맘에 되새겨봅니다 사진 많이 못 찍어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도 가슴에 소중한 것 많이 담아왔네요!
덕분에 행복한 걸음 되었습니다.
담 구간에서도 설레임으로 뵙겠습니다^^
그러게요. 담부턴 사진도 좀 넉넉하게 찍음시롱 살방살방 가입시다 머~~~
가끔씩 산행기에 산꾼을 따라오는 개들 이야기가 있는데 나중에 어찌되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요.
그러다가 들개가 되기도 하겠지요.
산행기 작성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습니다만 훗날 읽어보면 기분이 새로울 듯 싶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한 3개월쯤 된 자매 강아지였던 거 같은데, 쫌 안쓰러웠어요. ㅎ ~~
빵과 유과 물 먹여서 보내는데
또 따라오는거 돌 던지고 소리질러 비득재에서 돌려보냈는데 잘들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잘 들어갔겠지요.
정성들여 써주신 산행기 좋은 느낌입니다 ^~^
삽겹살은 빠른 시일내 준비하겠습니다 ㅡㅎ
ㅋ 담 구간에 드뎌 삼겹살 먹는 거네요. 준비하느라 애는 너무 쓰지 마시구요...
이번엔 사진이 적어 아쉬움이 조금 있네요
눈길 조심하시고 안산 이어가세요^^
응원 감사합니다. 대장님이 미리 사진 올리셔서 저는 몇 장만...ㅎ
"낮은 산은 도시를 품고" 낮은 산이라 도시를 품었나 봅니다. 높은 산이었다면 골을 품었을터인데...
산행기 한번 읽고 부족하여 또 한번을 읽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잔잔히 젖습니다.^^ 아름다움 앞에서 젖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마주한 시간들은 흐린 날의 하늘빛으로 기어이 묽어지고, 머물던 사람들도 뾰족했던 기억만 남기고 초겨울 어스름한 저녁처럼 떠나가곤 했다."
뽀족했던 기억도 깊은 겨울이 오면 겨울밤처럼 잠들게 되겠지요.^^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뽀드득뽀드득한 겨울 되시구요~~~
지난구간엔
왠지 춥게느껴졌는데 이번엔 많은 준비로 따뜻해보이네요
산행기 잘보았구요 수고많았습니다..
네, 대장님이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해서 넉넉한 산행이 되었습니다. ㅎ 포근한 하루 되세요.~~~
사진은 몇장 안되지만~완전 느낌 좋은 사진 입니다.
글은 더 좋구요~따뜻한 산행기 잘 먹고 갑니다.
담엔 삼겹살 맛나게 먹길 바랍니다.ㅎ
이번 정맥길은 내내 늦가을이 흘끔거렸어요. 강아지들 내쫓듯 손을 휘저어 얼른 떠나라고 했으니 담 구간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에요. ㅎ 즐점하시고요~~~
선두로 가셔서 산행중에는 본 기억이 없네요ㅠㅠ
수고많으셨습니다^^*
후기글 잘보고 갑니다.
담 구간부터는 자주 얼굴 뵙지요 ㅎ
변호사님 도사님 따라가다 가랭이 찟느라 사진도 못찍으시고 아고 불쌍혀요 앞으론 저랑감서 사진 마니 찍어요 아님 사진은 지가 찍고 변호사님 변호글 쓰시고 ㅎㅎ
남는건 푸억거리 사진 밖에 없네요
그러게요. 두령님 따라다님시롱 사진도 찍고 맛있는 간식도 챙겨 묵고 ㅎㅎㅎ
아구 꼴통이야 거이 거닐었습니다
좀 쉽게 쓰시면 앙되유
또 한 구간
ㅋㅋ 길이 무지 엉켰던디 어캐 땜빵한대유?
산행기를 보다보니 사진처럼 뇌리를 스치네요 잘 보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장님, 이제야 인사를 드리네요. 덕분에 저녁식사 맛있게 먹었 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구간은 많은 히스토리를 품고있는 구간 이었군요 ...
헐떡이며 산행중에는 무심이 지나쳤던 숨어있는 옛이야기를 듣는것 같군요..~
산개미님의 사진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담 구간이 벌써 막 기다려지네요. ㅎㅎ
산행실력이 일취월장하는듯 합니다. 여유로운 모습 보기 좋았고요 담구간엔 전에 못 먹었던 주님 배로 먹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그날 고생 많았지요? 몸은 좀 어떠신지요.
삼겹살 꼭 구워 달라고 하세요^^
ㅋㅋ 먹으러 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