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냐(相)의 극복에 대하여
사람에 대한 호불호
그 사람을 생각하면 왠지 싫어 진다. 그 사람의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 오르고 과거의 기억까지 되살아나 부정적인 생각이 지배한다. 반면 이 사람을 생각하면 즐거워진다. 이 사람의 이름을 보면 이 사람의 이미지와 함께 좋았던 기억이 떠 오른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사람에 대하여 좋고 싫어 하는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과거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잘 대해 준 사람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나를 힘들게 한 자에 대해서는 혐오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좋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죽어라’ 좋아라 하고, 싫어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역시 ‘죽어라’ 싫어 한다.
사람들은 극단을 살아 간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대표적이다. 한번 좋으면 계속 좋은 것이고 한번 싫으면 계속 싫은 것이다. 그래서 좋아 하는 사람을 계속 좋아 하게 되고, 싫어 하는 사람을 계속 싫어 하게 된다. 그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 지는가 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이는 양극단이다. 이미지와 이름에 의하여 감정이 지배받는 것이다.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이미지가 있다. 선생님이 처음 출석을첵크 할 때 이름과 함께 얼굴을 확인 하는 경우가 있다.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매칭 시켜 놓았을 때 이름만 보아도 그 학생의 얼굴이 떠 오를 것이다. 이름과 얼굴이 확인 되면 그 다음 단계는 성격이나 성향, 성적을 파악한다.
한번 이미지가 형성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급적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려고 노력한다.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내 놓는 것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기 위해서이다.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온갖 좋은 이미지로 포장되어야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전략은 누구에게나 있다.
누구나 좋은 이미지를 주려고 노력한다. 성형수술을 하는 것도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이다.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호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 포장작업은 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미지 포장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 인터넷필명을 사용한다. 실명도 사용하지 않고 사진도 올려 놓지 않는다. 학력이나 경력도 역시 올려 놓지 않는다. 오로지 필명으로만 소통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필명 ‘진흙속의연꽃’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교계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다. 미디어붓다에 칼럼을 쓴지 2년 째이다. 벌써 99회 째가 되었다. 매일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서 선별하여 일주일에 한편 또는 두 편을 올린다. 그러나 필자의 소개는 없다. 인터넷필명이 전부이다. 그리고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도 종종 기고하고 있다. 필명 이외 다른 소개가 없다. 사진도 없고 학력은 물론 경력도 없다.
교계신문의 칼럼이나 기고문을 보면 이름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 이름과 사진이 매칭 되어 이름만 보면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초면임에도 매우 익숙하다. 마치 TV에서만 보던 연예인을 처음 보았을 때 구면인 것처럼 익숙한 것과 같다. 그런데 칼럼이나 기고문을 보면 이름과 사진과 함께 경력이 소개 되어 있다. 이름 옆에 현재직위나 직책이 표기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글의 말미에는 더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출신학교는 필수이다. 학위를 취득했다면 학위명칭까지 기재되어 있다. 더 나아가 저작물까지 기재되어 있다. 몇 줄에 걸쳐 기재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이름과 사진과 함께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 사람의 이미지는 이름과 얼굴로 형성된다. 여기에서 학력과 경력 등 과거 행적이 덧 붙이면 더 자세한 이미지가 형성된다. 대게 이미지 포장을 하기 때문에 장점만 나열된다. 불리한 것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을 경우 나쁜 이미지가 형성된다. 청문회에서 후보자들이 낙마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명색(名色)에 대하여
사람의 이름과 얼굴로 구별된다. 이름과 얼굴이 매칭 되어야 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름과 얼굴을 한자어로 말한다면 명색(名色)이 된다. ‘명새기’라는 말도 명색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명새기 사장인데”라든가 “명새기 사장이라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명색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는 “내용이나 실속은 그 이름에 걸마지 않지만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내세우는 이름이나 지위”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명색 또는 명새기라는 말은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지위를 나타나는 말이다. 그 사람의 이름과 지위나 직책을 동일시 하는 것이다. 아무게 사장이라 했을 때 이름이 사장을 뜻하는 것과 같다.
명색이라는 말은 불교용어이다. 불교에서 명색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나마루빠(nama-rupa)라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정신-물질’로 설명한다. 그러나 힌두교에서는 ‘이름-형상’의 뜻이다. 오늘날 명색 또는 명새기라고 하는 것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나마루빠의 개념이 적용된 것이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이름-형상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초기불교는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최근 이중표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과 형상으로 보았을 때 어떤 불교가 될까? 이에 대하여 이중표교수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불교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해서 발생된 오류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중표교수는 삼세양중인과를 강하게 비판한다.
이중표교수의 불교관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이름과 형상이라는 나마루빠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산냐이다. 이를 오온에서는 상(想)이라 한다. 이름 붙여지고 개념화 된 것이 타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2연기는 중생의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지 삼세에 걸쳐서 윤회하는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라고 각종기고문과 강연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상(想: sa???)에 대하여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상으로 보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이름만 들어도 그 사람의 이미지와 경력이 떠 오르는 것은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름과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 매칭 되어 이미지화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이미지가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일까? 불리한 것은 숨기고 유리한 것만 알렸다면 이미지가 포장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과 이미지, 개념을 뜻하는 상(相: sa???)란 무엇일까?
오온에 상온이 있다. 상온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에서 이렇게 정의 해 놓았다.
“지각의 집합을 뜻하며 지각에는 감각적 지각과 개념적 지각이 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책상이 있다면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지각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명칭 지어진 여섯 가지 지각이 있다. 그것들을 지각의 두 종류로 구별해 보면 감각적 지각에는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에 대한 지각, 냄새에 대한 지각, 맛에 대한 지각, 감촉에 대한 지각, 개념적인 지각에는 사실에 대한 지각이 있다. 느낌과 마찬가지로 지각도 외부세계와 여섯 감관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상윳따니까야 3권해제, 전재성님)
책상을 예로 들었다. 책상이 있어서 책상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책상이 없어도 책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책상의 이미지가 떠 오른다. 이를 사람에 대입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놓았을 때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하지 않더라도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이미지는 조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인상을 받았으면 좋은 좋은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좋지 않은 인상이라면 당연히 좋지 않은 이미지이다. 그런 이미지도 과거의 것이다.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10년 동안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10년 전 이미지가 고착화 되어 있다. 군대에 있었을 때 동기의 이미지는 항상 20십대 초반인 것과 같다.
전재성님의 설명에 따르면 지각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감각적 지각이고 또 하나는 개념적 지각이다. 감각적 지각은 마치 얼굴모양을 보는 것과 같다. 개념적 지각은 이름을 듣는 것과 같다. 사물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구별하듯이 그 사람에 대하여 이름과 얼굴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이 접촉에 따른 것이라 했다. 얼굴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을 지각하는 것이고, 이름이 떠 올랐을 때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 오르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의 접촉에서 비롯된다.
산냐는 극복의 대상
산냐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인식으로 번역했다. 빠알리어 산냐(sa???)는 영어로 ‘perception, recognition’의 뜻이다. 전재성님은 지각으로 번역했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상온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에서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인식은 대상을 받아들여 이름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작용은 또 무수한 취착을 야기하고 해로운 심리현상들[不善法]을 일으키기 때문에 초기경의 여러 문맥에서 인식은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최초의 가르침인 숫따니빠따 제4장에서도 인식은 견해와 더불어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나타나며, 특히 ‘희론하는 인식’을 가지지 말 것을 초기경들은 강조하고 있다.”(초불연 상윳따3권 해제, 각묵스님)
인식, 즉 산냐에 대하여 ‘이름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라 정의하고 있다. 사람에 대하여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여 분별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별은 대게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부정적인 것과 같다. 좋으면 거머쥐려 하는 욕망이 일어나고, 싫으면 밀쳐 내려는 성냄이 일어나는 것도 호불호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산냐는 극복의 대상이라 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여러 가지 형태의 산냐이다. 이름과 명칭이 부여되어 개념이 형성되면 이에 집착이 일어날 수 있다. 집착하게 되면 결국 괴로움을 야기 때문에 산냐는 극복대상이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산냐의 극복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 숫따니빠따 5장에 산냐의 극복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고 했다.
예순세 가지 이설
숫따니빠따를 찾아 보았다. 사비야의 경에 따르면 “사변적 논쟁에 의존하고 일반적인 명칭에 의존하고, 개념적 지각에 의존하는 수행자들의 예순세 가지 이설을 제압하고, 광대한 지혜를 갖춘 님께서는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다.”(stn538) 라는 게송이 있다. 여기서 ‘일반적인 명칭’과 ‘개념적 지각’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일반적 명칭(Sa??akkhara)’이라는 말은 관용적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개념적 지각(sa??a)’은 전도된 지각을 뜻한다. 이렇게 명칭과 개념에 의존하였을 때 견해가 일어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예순세 가지 이설이라 했다. 왜 62가지가 아니라 63가지일까? 그것은 62가지 사견에다 유신견(sakk?ya-di??hi) 을 합하였기 때문이다.
희론적 개념(papa?casa?kh?)에 대하여
산냐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특히 사변적 견해로 대표 되는 62가지 견해와 유신견이 그렇다. 숫따니빠따 ‘투쟁과 논쟁의 경(Sn4.11)’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Na sa??asa??i na visa??asa??i
“지각에 대한 지각도 여의고, 지각에 대한 잘못된 지각도 여의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각을 소멸시킨 것도 아닌,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님에게 물질적 형상은 소멸합니다. 지각을 조건으로 희론적 개념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stn874, 전재성님역)
주석에 따르면 지각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자에 대하여 범인(凡人)이라 한다. 그런데 지각에 대하여 잘못 지각하는 자에 대하여 광인(狂人)이라 했다. 누가 미친 자인가? 그것은 전도된 지각을 가진 자이다. 네 가지 전도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전도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A4.49) 라 했다. 무상, 고, 무아, 부정인 것에 대하여 상, 락, 아, 정이라 여기는 것이 지각의 전도이자 마음의 전도이고 견해의 전도인 것이다.
게송에서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각을 소멸시킨 것도 아닌”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지각을 여읜 자는 멸진정에 든 자이고, 지각이 소멸된 자는 사무색정에 든 자”라 했다. 멸진정에 들면 지각과 느낌이 없어서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 무색계선정에서는 지각이 소멸되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대문에 삼매의 상태만 유지된다.
게송 네 번째 구절에서 “지각을 조건으로 희론적 개념이 성립한다.(Sa???nid?n? hi papa?casa?kh?)”고 했다. 여기서 ‘희론적 개념(papa?casa?kh?)’ 이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tn916을 살펴보라. 세존께서는 ‘나는 생각하는 자이다’라는 희론적 개념의 뿌리를 잘라버리라고말씀하셨다. 희론적 개념의 뿌리에는 ‘나는 생각하는 자이다’라는 자의식(아만)이 있으며, 그것이 조건이 되어 오히려 인식적인 지각(旋火輪)이나 개념적인 지각(토끼뿔)에서 실체적 관점을 불러와서 지각을 설립시키고 형상을 성립시킨다. 그래서 그러한 지각을 조건으로 하는 희론적 개념이 사라지면, 그러한 모든 지각이 사라지고, 궁극적으로 모든 형상도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희론적 개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갈애에 의한 희론적 개념, 견해에 의한 희론적 개념, 아만에 의한 희론적 개념이 있다.” (숫따니빠따 3277번 각주, 전재성님)
희론적 개념이란 ‘생각하는 자아’를 말한다. 생각하는 자만은 아만이라 했다. 아만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과 같은 말이다. 아만 또는 아만이 강하다는 것은 주관이 강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생각하는 자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토끼뿔이나 거북털 같은 것이다. 실제하지 않고 오로지 상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빠빤짜(papa?ca)라 한다. 한자어로 망상 또는 희론이라 한다.
망상 또는 희론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 의식이 생겨난다. 세 가지의 화합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M18) 라 되어 있다. 희론 또는 망상의 전개 과정이 접촉-느낌-지각-사유-희론(망상) 순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잘못된 지각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에 대한 잘못된 지각은 희론 또는 망상으로 전개되기 쉽다. 그렇다면 잘못된 지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까? 멸진정에 들어 느낌과 지각을 소멸하지 않는 한 지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잘못된 지각에 끄달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각에 대하여 익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일곱가지 지각에 대한 간략의 경’에서는 1) 부정에 대한 지각, 2) 죽음에 대한 지각, 3) 음식에 대한 지각, 4)일체의 세계에 즐길 것이 없음에 대한 지각, 5)무상에 대한 지각, 6)무상 가운데 괴로움에 대한 지각, 7)괴로움 가운데 실체없음에 대한 지각을 닦으라고 했다.
일곱 가지 지각의 닦음을 보면 무상, 고, 무아에 대한 통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부정, 죽음, 음식, 즐길 것 없음이 추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곱 가지 닦아야 할 것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일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부정에 대한 지각: 성적교섭과 관련해서 2) 죽음에 대한 지각: 삶의 욕망과 관련해서 3) 음식에 대한 지각: 맛에 대한 갈애와 관련해서 4) 일체의 세계에 즐길 것이 없음에 대한 지각: 세속적인 마음과 관련해서 5) 무상에 대한 지각: 이득과 명예와 칭송과 관련해서 6) 무상 가운데 괴로움에 대한 지각: 나태, 해태, 분방, 방일, 부적음, 부주의와 관련해서 7) 괴로움 가운데 실체없음에 대한 지각: 이 의식을 수반하는 이 몸과 외계의 모든 인상과 관련해서 (일곱 가지 지각에 대한 상세의 경, A7.49)
위 일곱 가지는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가지 지각에 대한 상세의 경(A7.49)’에서 요약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지각을 닦고 익히면 불사에 뛰어 들고 많은 공덕을 낳는다고 했다.
일곱가지 지각을 닦는 것 중에 ‘무아에 대한 지각’이 있다. 이를 ‘괴로움 가운데 실체없음에 대한 지각’이라 했다. 이러한 지각을 닦으면 “이 의식을 수반하는 이 몸과 외계의 모든 인상과 관련해서 ‘나’를 만드는 자만, ‘나의 것’을 만드는 자만을 멀리 여의고 자만을 뛰어넘어 적멸에 들어 잘 해탈한다.”(A7.49)라고 했다. 이렇게 잘 닦았을 때 “올바른 알아차림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명색은 이름-형태인가 정신-물질인가
희론이나 망상의 출발점은 지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각한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에것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구별하는 것이다. 이름과 얼굴이 기억 되어 있어서,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발생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이름과 형태는 명색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명색이 이름-형태가 될 수 없다. 희론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 이런 게송이 있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질병의 근원이 되는 희론적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에 대해 잘 알고 온갖 질병의 근원인 속박에서 떠나면, 이러한 자는 그 때문에 지성이 있는 님이라 불립니다.”(stn530,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사비야의 경’에 실려 있다. 여기서 ‘희론적 명색 (papa?can?mar?pa?)’에 대하여 이름-형태가 아닌 ‘정신-신체적 과정’이라 번역했다. 이는 삼사화합에 따른 희론의 전개 과정에서 정신-물질적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마루빠가 이름-형태가 아닌 정신-물질인 것임에 틀림 없다.
희론 또는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자아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는 생각하는 자이다’라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에 대하여 “ ‘나는 생각하는 자이다’라는 확산적 경향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존재의 다발(오온)을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자아로 파악하여 자아 속에 수반시키거나 함축하는 인위적인 조작이므로 모든 존재의 다발의 연생적 표현인 명색(名色) 자체에 적용될 수 있다. 명색은 12연기의 고리로서 정신적 신체적 과정을 말한다.”(숫따니빠따 2548번 각주) 라고 설명된다.
명색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파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중표 교수가 대표적이다.이중표교수에 따르면 십이연기의 출발점에 대하여 이름-형태의 나마루빠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로 보지 않고 “12연기는 중생의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망상으로 인한 것으로 보고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았다. 정신-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특히 망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삼사화합에 따른 접촉-느낌-지각-사유-희론으로 설명했다.
생각 하는 자아로 인하여
희론은 지각에서 시작 된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 지각이다. 이름을 생각하면 이미지가 떠 오르는 것도 지각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지각한 것을 사유하면 호불호가 일어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근본적으로 자아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곱 가지 지각을 닦을 것을 말씀 했다.
부정에 대한 지각을 닦으면 성적교섭과 관련하여 마음이 말려 들지 않아 평정과 혐오를 유지한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지각을 닦으면 삶의 욕망에 대하여 말려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음식에 대한 지각을 닦으면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지각을 닦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은 사항은 무상, 고, 무아의 지각이다.
지각은 기본적으로 이름을 짓고 개념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이러한 지각은 희론이나 망상으로 전개되기 쉽다. 그결과 전도된 인식이 발생한다. 무상, 고, 무아, 부정에 대하여 상, 락, 아, 정이라고 뒤바뀐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는 자아가 자리잡고 있다. ‘나는 생각 하는 자아이다(mant? asmi)’라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호불호, 전도된 인식, 희론과 망상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산냐의 극복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Mula? papa?ca sa?kh?ya (iti bhagav?)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희론적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stn916)
2016-10-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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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