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반천의 숨
홍은실(2021.7. 신인상. 부산)
아침이 기다려진다. 하루 낮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될 저녁 무렵이면 내일을 기다린다. 밤이 지난 후 찾아오는 신선한 아침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처럼 바빴고 이것저것 할 일을 마치면 평소처럼 집을 나선다. 집 앞 횡단보도까지는 아무런 일도 별다른 사건도 없다. 그러나 무엇인가 색다른 변화가 있다.
보행길을 내려와 길게 이어진 해반천에 다다른다. 김해의 중심을 흐르는 작은 시내이다. 아침마다 이 길은 산책하거나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의 길을 가지만 여기서는 은근한 친밀감이 서로에게 생긴다.
물길에 눈길이 머문다. 폰 음악을 들으면서 잔잔한 흐름에 발걸음을 맞춘다. 맑은 날에는 황새, 두루미, 청둥오리가 한결 여유롭게 물 위에 떠있다. 마치 하늘을 느긋하게 지나가는 배 모양이다. 다양한 조류들이 떠있는 것을 보니 물이 깨끗하다. 머리를 물속에 박고 먹이를 찾는 새들은 이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과 상관없이 자신의 아침 일에 몰두하거나 해반천의 당당한 일원이라 천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누구든지 잠시 하루 일을 잊고 초연해진다.
풀꽃들도 사철 운치를 지닌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꽃들이 나를 본다. 사람이 꽃을 보는 게 아니라 꽃이 사람을 본다. 순간 꽃과 교감을 느끼며 눈에 들어온 프레임을 카메라에 담아둔다. 아침 산책을 이어오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부산의 변두리에 자리한 구포에도 하천이 있었다. 산에서 이어지는 시내였는데 엄마의 손을 잡고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올 땐 그곳을 지나오곤 했다. 유소년기와 처녀시절을 거쳐 신혼 때까지 그 하천 곁을 오갔다. 친구들과 멀리까지 뛰어가고 물고기도 잡고 하천 둑 풀밭에서 낮잠 잤다. 첫아이를 임신하면서 냇가를 따라 걸으며 물처럼 순하고 시내처럼 착하라고 태교를 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냇물과 시내와 강을 닮기를 기도했다. 시냇물을 잘 알지 못했으나 오랫동안 함께 하였으므로 그 빛과 소리가 내 귀와 눈 속에 흐르고 있다고 믿었다. 다른 곳에 가더라도 나를 성장시켜준 물줄기는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김해로 이사 오면서 해반천 부근에 정착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시골장에 갔던 아이가 이제는 내 아이들과 경전철을 따라 흐르는 해반천을 산책 장소로 점찍었다. 학교 가던 아이들이 하천 물놀이를 하다가 신발이 흠뻑 젖어와 야단치던 것조차 엄마를 닮았다. 애들도 오죽하면 시원한 강변 바람을 맞으며 걷고 뛰고 싶었을까? 내게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추억이 있지 않은가. 해반천 DNA를 갖고 태어났으니 언젠가 아이들이 다른 도시로 이사하더라도 분명 물길이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여름날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범람한다. 비가 멈추면 이내 흙탕물이 깨끗해진다. 자연정화가 잘 이루어지는 덕분에 철새들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참새와 비둘기의 놀이터가 되고 사람들이 걷고 뛰는 터전이 되어준다. 자연 그대로 쉬고 흐르고 탁해지고 맑아지는 곳이 해반천이다. 스스로 자정하는 물이므로 꽃이 다시 돋고 풀이 윤기를 내고 모두가 모여든다. 해반천은 유시유종의 이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한동안 계획했던 일을 하느라 머리와 마음이 복잡했다. 그럴수록 해반천을 아침마다 찾았다. 흘러가는 물길에 맞추어 마음이 흐르도록 하고싶었고 숨을 크게 쉬어 흘러가는 물길 위에 나를 얹고 싶었다. 마스크로 얼굴을 반쯤 가렸지만 개울바람이 내 몸을 휘감게 하고 싶다. 마스크를 하지 않은 풀꽃과 조류들을 지켜보며 마음의 숨이나마 자유롭게 하고 싶다. 서로 가까이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지만 해반천에 가면 누구든 몸과 마음이 풀리고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한다.
물은 늘 말한다. 맑은 물빛이니 분명 맑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졸졸졸’을 물 흐르는 소리로 들으면 잘못이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리를 들어야 한다. 무엇일까? 고향 시절 산에서 흘러내리던 물의 빛깔, 친구들과 놀던 때의 까만 얼굴들, 어머니와 시골장을 오가던 발걸음, 오랫동안 내 마음과 몸을 키워준 물의 대화가 되풀이 되고 있다.
오늘의 나를 다시 위로해 주기 위해 내 맘과 귀에 잊지 않고 찾아온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다. 청명한 날, 청명하게 흐르는 물소리는 더 맑은 희망과 새로움을 전해준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날에는 내 맘을 알기라도 하듯 잠시 멈춘다.
“ 그래 괜찮아, 다시 시작해봐. ”
친구처럼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해반천에서 용기와 인내를 배운다. 해반천이 있어 나는 김해가 따뜻하게 좋다. 사람과 함께 하는 해반천에서 오늘도 가슴이 저리도록 큰 숨을 쉰다. 사는 길도 큰 숨을 쉬며 쉬어가면 좋을 것 같다. 해반천의 물길 따라 나도 흐른다. 제법 멀리 왔다. 나이만큼.
[등단 소감문]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나름의 고민과 경험들이 있다. 내게도 알지 못했던 상처와 인생의 파노라마가 있었다. 난 이른 새벽 조용한 시간에 내 삶의 이야기와 대화를 나누었다. 수필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비밀스런 시간이었다. 글을 쓸 때 무엇을 써야 하나 시작된 고민은 내면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썼던 수필 ‘일출’이 떠오른다. 나에게 그 붉은 태양은 글쓰기에 대한 애정의 출발점이다.
그렇게 시작된 습작의 길을 잘 이끌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서로의 글을 통해 감성과 사유를 공유했던 문우님들이 언제나 힘이 되었습니다. 항상 응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과 밝고 맑은 딸과 아들, 항상 막내딸을 위해 기도하시는 친정어머니와 평생 단짝 언니 그리고 마음 안에 함께하시는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여러 가지 길들이 있지만 내가 걸었던 글길은 이정표가 없어도 걸어갈 수 있도록 언제나 나를 다독여 주었다. 힘들 때는 숲속의 그늘로 향해주고 아플 때는 그루터기 나무를 만나게 하고 기쁠 때는 환희의 눈물을 길가에 뿌려주었다. 어느덧 글길에 하늘빛 수국이 피고 노래하는 새들은 날아와 둥지를 만든다. 이젠 글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손길을 건네고 싶다.
첫댓글 홍은실 선생님. 2021년 7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함께 하는 글길에서 수국이 피고 노래하는 새들이 둥지를 튼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을 겁니다. 해반천 물길 따라 선생님의 글길도 순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홍은실 선생님. <해반천 숨>이라는 작품으로 권위있는 수필전문지 월간<수필과비평> 신인상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작품을 읽노라면 잘그려진 그림을 보듯 해반천 풍경이 그려집니다. 등단을 계기로 더욱왕성하게 집필하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