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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풍수답사여행길'이라는 모임에서
2016년 7월 16일~7월 18일 2박 3일간의 남도답사여행에서
김영랑 생가에 대한 답사기입니다.
노트북 파일 정리를 하다가 발견하고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강진은 주로 강진과 해남, 해남과 강진 등 해남과 연계되어 불려진다.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극찬한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강진과 해남을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 지역이 ‘아름다운 향토적 서정과 역사의 체취가 은은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라 한다. 또 김용성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작가해설」에서 “해남·강진은 남해변, 우리나라 토양이 예부터 생산해 온 꽃에서는 가장 기름기 많고 풍요한 꽃이 우리 국토 중에서는 제일 많이 피는 곳이고...”라고 하여 강진을 해남과 한데 아울러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해남과 강진은 지역적 인접성도 있지만 경험의 공통성이 함께하여 같은 지역으로 불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지역을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오지’, ‘은둔자의 낙향지’, ‘유배객의 귀양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수준 높은 문화유산과 더불어 청정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생태도시의 가능성을 내재한 지역이고, 또한 여행이나 답사를 통해 남국의 정서가 가득한 곳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이는 이 푸 투안이 강조한 바 있는 ‘경험’이 공간을 형성한 곳 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각주> 투안은 ‘경험’을 특히 강조했다. 경험은 사람들이 실재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다양한 양식을 포괄하는 용어이며, 특히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직접적이고 수동적인 감각에서부터 능동적인 시각적 인지, 상징화라는 간접적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작용한다. 즉,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통해 공간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가는 것이다. 이-푸 투안, 구동회·심승희 역(2007), 『공간과 장소』, 대윤, p.23.
필자의 고향은 해남인데 이번 답사가 남다른 감회를 주었다. 내가 살던 마을은 해남읍에서도 약 20키로나 더 가야만 하는 오지 마을이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는 10리를 걸어 다녔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책 보따리를 토방(마루의 전남지방 방언)에 팽개쳐 놓고 소 띠끼러(풀 뜯겨 먹이러) 가거나 깔(소의 먹이인 꼴의 사투리)베러 가는 것이 예사였다.
여느 때는 집 언덕 너머에 있는 바닷가로 나가 바지락을 캐거나 바위틈에 천지로 널려 있는 굴을 따기도 하며 바위 사이에 숨어 있는 꽃게를 잡기도 하였다.
농번기에는 들에 나가 모내기와 농약을 하는 부모님을 거들고 추수 때는 고구마를 캐고 보리타작 일을 돕기도 하였다.
집에는 닭과 오리, 똥개 두세 마리가 마당에 노닐고 있었고 집 옆 한편엔 돼지우리와 소 외양간이 있었다. 소는 송아지 때부터 키우기 시작하여 다 자라면 장에 내다 팔거나 외부의 소장수들이 와서 사갔다. 그리고 다시 송아지를 사는 식이었다.
소를 파는 날이면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새 옷도 입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렸을 때 소와 관련한 기억이 많다. 한번은 소 먹이를 먹이려고 나갔다가 너무 놀고 싶어서 바다에 접한 산속의 소나무에 소를 묶어 놓고 모래밭에서 정신없이 놀았다. 해질녘 부리나케 가보니 소는 묶어놓은 소나무에 끈이 얽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순간 덜컥 겁이 났지만 소가 곧 죽을 것 같아 불쌍하다는 마음보다는 만약 죽는다면 부모님께 혼날 것이 더 걱정되었다.
소는 당시 우리 집의 큰 재산이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기억도 있다. 송아지일 때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송아지를 밀어 넣고 그 위에 올라 타 마치 말을 탄 장수처럼 송아지에게 호령하던 추억은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다. 소 등에 올라타다 몇 번이고 논두렁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지만 소 등에 타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장수가 된 것 같기도 했고 나를 위해 기꺼이 등을 내 준 송아지가 사랑스럽기도 했다.
이런 경험과 추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고향 해남과
옆 동네(?)인 강진을 답사한다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감수성을 불러일으켰다.
답사 첫째 날(2016년 7월 16일) 영암 월출산 자락의 도갑사와 구림마을, 왕인박사 유적지와 생가터의 답사를 마치고 일행은 월출산의 정기를 흠뻑 안은 채 ‘남도 답사 1번지’인 강진으로 향한다.
강진으로 가는 차안에서 다음 답사지인 김영랑 생가를 떠올리니 우선 마음이 홀가분했다. 시인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내가 시인이 되는 기분이었고, 속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 구절을 어렴풋이 기억나는 대로 되새겨 본다.
청년시절부터 난 정태춘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고 즐겨 불렀다. 시처럼 아름답고 서정성 짙은 가사와 은유적이면서도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그의 노래를 거의 외우고 불렀다.
북한강에서, 촛불, 봉숭아, 떠나가는 배,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 아 대한민국, 시인의 마을 등등...
특히 그의 데뷔곡이기도 한 “시인의 마을”을 가장 좋아했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당신의 그늘진 마음에 비 뿌리는 젖은 대기의 애틋한 우수...’ 어느덧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흥얼거리고 있다. 다산의 유배길이기도 하고 김영랑 시인의 마을이기도 한 강진을 향해 가면서 정태춘의 노래 가사처럼 다산과 영랑은 또 얼마나 고행을 하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강진군은 전라남도의 서남부 해안에 위치하는데 남북으로 럭비공 모양으로 생겼으며 중앙에는
강진만이 좁게 깊숙이 만입하고 해안선은 83km에 이르며 만내에는 유인도 1, 무인도 5개가 있다.
강진군은 원래 백제시대의 도무군지역인 도강과 동음현 지역인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자와 탐진의 “진”자를 합하여 강진이라 호칭되어 온 것이라 한다.(강진군청 홈페이지)
강진의 자연지리적 산맥체계를 보면 백두대간의 줄기에 있는 영취산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뻗어 조약봉에서 끝나는 산줄기가 금남호남정맥인데, 조약봉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분기된다. 호남정맥은 3정맥 분기점인 조약봉에서 시작하여 호남 내륙을 관통하여 백운산과 망덕산을 거쳐 광양만 외망포구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430km의 산줄기를 말하며 9정맥 중에서 가장 긴 정맥이다.
호남정맥상의 삼계봉에서 분기한 지맥이 선왕산, 국사봉, 월출산으로 이어지는데 월출산에서 갈라진 지맥이 강진으로 흘러온 것이다. 즉 강진은 서남부 전남에 위치하고 있어 호남정맥의 지맥인 월출산 줄기가 중앙부에서 동과 서로 길게 뻗어 강진만과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완도군 고금도가 가로지르면서 큰 규모의 호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전남 3대 강의 하나인 탐진강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고, 강진만에서는 어패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특히 해로가 발달하고, 무역이 성행함에 따라 고려시대에 국제적인 청자문화가 형성된 지역이다
드디어 일행은 김영랑 생가에 도착한다. 강진읍 남성리, 군청 옆길로 들어가면 영랑이 태어난 집이 나온다.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그가 떠난 후 몇 차례 집주인이 갈리면서 일부 원래 모습이 바뀌기도 했지만 1985년에 강진군에서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본채와 사랑채 2동만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모란밭이 조성되어 있다. 본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인 초가지붕이다. 본채에서 10여m 떨어진 왼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가지붕이다.
집 뒤편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고 언덕에는 오래된 동백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5월이면 생가의 마당에 조성된 모란이 만개한다.
1986년 2월 1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2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생가 입구로 들어가면 안채와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영랑 시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가지는”이라는 시비가 있다.
강진 사람들은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시인 영랑 김윤식을 자랑하고 사랑한다. 장흥으로 통하는 영랑사거리에 선 그의 동상에도, 읍내 곳곳에서 눈에 뜨이는 모란슈퍼, 모란미용실, 영랑화랑 등 가게 이름에도 강진 사람들의 영랑 사랑은 드러난다. 생가 입구 바로 옆에 있는 빌라도 영랑빌라이고 입구에 있는 한정식도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가치’의 돌담한정식이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인 강진에서 대한청년단을 이끌었고,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간 일했다.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며 9·28수복작전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동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5-전남(2010), 돌베개.>
생가 곳곳에는 시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하다. 시의 소재가 되었던 동백과 대나무, 우물과 장독대, 고즈넉한 돌담길, 그리고 이번 답사에서 꽃은 보지 못했지만 모란꽃들이 생가의 공간에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생가로 들어가는 길엔 구부러진 돌담길이 있는데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길우에”의 배경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가치...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던 시인은 암울한 시절 자신의 염원을 돌담을 거닐며 ‘햇발, 샘물, 붓그림, 물결’로 승화했으리라. 햇발, 샘물, 붓그림, 물결은 서정적이지만 생산적이고 희망적인 시어라 짐작해본다.
또한 입구 넓은 잔디밭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비를 지나 문간채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 왼쪽으로 옛날 돌로 쌓아진 우물이 제 모습 그대로 하고 있으며, 안채 왼쪽으로 장독대와 감나무와 모란 꽃밭이 있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의 배경이 바로 이 샘이고, “오메 단풍 들 것네-원제는 누이야 내 마음을 보아라”의 배경이 장독대와 감나무이다. 꽃밭에서 더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가 있고 그 앞에 은행나무가 있는데 영랑이 19살에 심었다고 한다. 안채 뒤편 언덕엔 대나무 숲과 동백나무들이 있는데 이는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의 모태라 한다.
이처럼 영랑 시인의 생가를 진호해주고 기를 불어 넣어준 산은 보은산(寶恩山)이다. 보은산(寶恩山, 439m)은 강진군 강진읍과 군동면, 성전면의 경계에 자리한 산이다.
국토정보지리원에서 발행한 지도에 우두봉(牛頭峰)과 북산(北山)으로 표시된 이 산은 엄동설한의 북풍을 막아주는 강진읍의 주산(진산)이다. 이 산의 산자락에는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이 잠시 머물던 고성사(高聲寺), 방랑시인 김삿갓이 묵으며 시 한 수를 남긴 금곡사(金谷寺), 이 고장 출신인 김영랑 시인의 생가 등이 있다.
보은산의 산세는 소가 누워있는 모습[와우형(臥牛形)]으로 꼭대기에는 소머리에 해당하는 우두봉(牛頭峰)이고, 고성사가 자리 잡은 곳은 소의 목 아래 방울을 다는 부분에 해당하므로 고성사라 하였다 전한다.
옛 이름이 금릉(金陵)인 강진의 금릉팔경(金陵八景) 중 고암모종(高庵暮鐘)은 해질녘 고성암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말한다. 동녘에 자리한 금곡사의 들머리에는 길 양쪽으로 우뚝 선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들른 김삿갓이 지은 시가 지금도 경내에 비석으로 남아있다.
<각주> 금릉팔경(金陵八景)은 강진군 내에 있는 여덟 군데의 경치 좋은 곳으로 ① 고암모종(高庵暮鐘: 高聲庵의 저녁 종소리), ② 파산제월(琶山霽月: 琵琶山에서 솟는 달), ③ 금강명탄(錦江鳴灘: 금강에서 들려오는 여울소리), ④ 금사효무(金沙曉霧: 금사봉의 아침 안개), ⑤ 죽도귀범(竹島歸帆: 죽도에서 돛단배가 저녁에 돌아오는 풍경), ⑥ 구강어화(九江漁火: 구강포에서 불을 켜고 고기를 잡는 야경), ⑦ 만덕청람(萬德晴嵐: 만덕산의 아지랑이 풍경), ⑧ 서산낙조(瑞山落照: 서기산 낙조)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보은산 산세와 관련하여 와우형(臥牛形)과 우두봉(牛頭峰)에 관한 강진읍의 지형과 관련된 설화로는 「연지전설(蓮池傳說)」이 있다. 약 300년 전 강진에 부임한 역대 현감들은 아전의 횡포로 소신 있는 행정을 펼 수 없었고, 때로는 현감 자리가 비어 있을 정도였다. 1653년(효종 4) 신유(申瀏)가 현감으로 부임해, 아전의 횡포가 강진의 지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진의 지세는 황소가 누워 있는 형국, 즉 와우형(臥牛形)이었다. 신유는 ‘황소는 코뚜레를 꿰어야 말을 듣는다.’는 점에 착안해 코뚜레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지세를 누르자, 아전들의 횡포가 사라지고 덕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어린이공원 주변이 연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는 풍수에서 말하는 형국론에 대한 비보로 볼 수 있다.
이번 영랑 생가 답사에서의 백미는 생가 안채에서 정면으로 멀리 바라다 보이는 붓처럼 예쁘게 생긴 산일 것이다. 이를 문필봉(文筆峰)이라 한다. 풍수에서는 혈처와 명당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산세의 생김새에 따라 그 기운을 받는다고 믿는다. 주변 산세를 사신사(四神砂)라고 하는데 뒷산을 현무, 앞산을 주작, 그리고 좌우의 산을 청룡, 백호라 한다. 특히 앞에 있는 산 중에 가까이 있는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고 멀리 있는 산을 조산(朝山)이하 하는데 안채나 대문에서 바라보이는 안산과 조산의 모습이 중요하다.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는 문을 지나 시의 소재가 된 사랑채의 툇마루 옆에는 “사개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라는 시가 있다. 사랑채 안에는 시인이 방금이라도 시를 쓰다 간 듯 책상에 가지런히 종이와 펜이 놓여 있었다.
1923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광복 직후까지 이곳에서 시를 썼다고 하는데 아마 그는 앞에 바라다 보이는 문필봉을 벗 삼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다리며’ 조국의 독립과 문학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영랑 생가의 답사를 마치고 일행은 저녁식사를 위해 강진만의 마량미향으로 향한다. 23번 지방도로를 따라 강진만의 아름다운 해안도로는 하루의 피로를 싹 풀어주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한 참을 가다보니 왼쪽에 ‘강진청자박물관’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원래 계획한 일정은 아니었으나 한 번 들러보기로 하고 들어갔으나 박물관 영업시간이 끝나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주변 작은 섬들의 경치로 위안을 삼는다.
조금 더 가니 아름다운 항구가 보인다. 마량미항이다. 마량항은 조선초기 태종조 1417년 마두진이 설치되어 만호절제도위가 관장하였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을 당시 거북선 1척이 상시 대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다. 유서 깊은 만호성터가 남아있고, 까막섬이 수묵화처럼 떠있으며, 고금도와 약산도가 든든하게 풍랑을 막아주는 마량포구는 1종 어항으로서 천혜의 미항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포구의 경치를 감상하고 회를 먹기 위해 바로 근처 마량 수산시장으로 갔으나 영업시간이 끝나 다시 마량항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식당을 찾던 중 항구 제방 어귀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던 남도의 아낙네 세 분에게 소개 받은 횟집에 들러 조금 전 답사했던 영랑 시인을 생각하면서 소중한 벗들과 함께 한 한 잔 술은 더없는 행복이었다. 몸은 지쳤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숙소인 ‘다산명가’로 향한 발걸음이 가볍다.
[출처] 시인의 마을, 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작성자 아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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