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공작소 <7-4> [유엔공원에 핀
휴먼스토리] 카메라에 포개진 우애 - 호주 참전용사 '괴벨' 씨
전사한 동생의 카메라, 형의 손을 빌려 한국전의 상흔을 담다
6·25 63주년 정전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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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참전용사인 레오나르드 괴벨(뒷줄 오른쪽) 씨가 임진강 일대서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잡았다. |
- 동생, 가평 전투서 숨지며
- 남긴 것은 텅빈앨범·카메라
- 형, 혈육 잃은 슬픔을 뒤로
- 1954년 4월 부산항으로
- 중공군 잔당 소탕 틈틈이
- 동생의 기록 의지 수행
- 배고파 헤매는 아이들 등
- 전쟁의 비참한 풍경 찍어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직업군인으로 살면서 우리 가족을 먹여살리셨다.
한국전쟁을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전장을 누비셨다.
죽음의 고비를 경험하셨고 부상도 입으셨다.
그렇게 보낸 군대생활이 45년.
그 시간이 지긋지긋했던지, 아버지는 좀체 군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삶이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내 나이도 이제 예순, 아버지는 벌써 구십이다.
나의 내력과 정체성은 물론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아버지의 이야기는 전해져야 했다.
나는 줄기차게 노크했다.
10여년 전부터 아버지의 철통같던 말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 속에 한국전쟁이 있었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동생(나의 삼촌)이 죽었으며,
그 동생이 애지중지하던 카메라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카메라로 젊은 군 시절과 일상을 찍어놓으셨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말하지 않은 슬픔'이 가득 스며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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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한국전쟁 참전 군용선에서 동료들과 담소하는 레오나르드 괴벨(맨 오른쪽) 씨 모습. |
나의 할아버지인 빌 괴벨(Bill Goebel)은 독일이 고향이다.
조상대대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농장일을 하며 살았다.
1863년 빌 할아버지는 신천지를 찾아 항해에 나섰다.
81일 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호주 브리즈번.
이곳에서 빌 할아버지는 7명의 아이를 낳으셨다.
그중 5번째가 레오나르드 헨리 괴벨(1924년생), 6번째가 콜린 존 괴벨(1926년생)이다.
레오나르드 헨리 괴벨(이하 레오)은 나의 아버지이고, 콜린 존 괴벨(이하 콜린)은 삼촌이다.
두 분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오셨고, 삼촌은 전사하여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두 분의 엇갈린 운명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어릴 땐 살기가 어려웠다.
아버지의 7형제는 생계를 위해 마을 근처 농장에 뿔뿔이 흩어져 일을 했다.
두 살 터울인 아버지와 삼촌은 이해심이 많고 우애가 깊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기를 지나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삼촌은 입대를 결정했다.
당시엔 군대 임금이 농장 일보다 나았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18세, 삼촌은 16세의 앳된 청년이었다.
■삼촌을 앗아간 한국
1942년 8월27일 아버지는 호주의 정규군인(Regular Army)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말레이시아의 보르네오, 파푸아 뉴기니 등지를 다니며 전투훈련과 실전을 겪었다.
21세 때는 보르네오에서 다리 부상을 입고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어느날 한국전쟁 발발 소식이 날아들었다.
호주군의 참전이 이슈가 되었고, 삼촌(콜린)은 일찌감치 한국행을 결정했다.
안타깝게도 삼촌은 1950년 11월5일 경기도 가평전투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때 나이 24세. 전사 소식을 받아든 아버지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아, 그 이야기를 하려니 목이 멘다.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지만 삼촌은 멋쟁이 청년이었던 것 같다.
삼촌은 1944년 8월 호주군에 입대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기록정신이 강했다.
가난한 살림에도 푼푼이 모은 돈으로 카메라 한 대를 장만했고 전장까지 메고 갔다.
삼촌은 무엇이 되려 했을까? 영상예술가? 르포작가?...
한국의 예쁜 아가씨를 찍어 연애라고 해 보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새 카메라를 매만지며 장밋빛 세상을 꿈꾸었을 삼촌의 부푼 꿈이 문득 그리워진다.
그런데 그 꿈을 피워보기도 전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버렸으니….
죽은 삼촌의 유품이 브리즈번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몇일간 식사도 안 하시고 우셨다.
유품 함에는 텅빈 앨범 한 권과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삼촌은 새 카메라를 제대로 사용조차 못해보고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카메라가 이은 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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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레오 괴벨(왼쪽), '동생' 콜린 괴벨 |
다리 상처가 아물자 아버지는 군에 복귀, 1952년 사병에서 하사로 진급했다. 어머니인 웬디와 결혼한 것도 그해였다.
한국전쟁 추가 파병 논의가 일었다.
아버지는 망설였다.
생때같은 동생 콜린을 앗아간 한국에 가는 건 솔직히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흔들림도 잠시, 아버지는 비장한 마음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
1954년 4월, 아버지는 '뉴 오스트레일리아(New Australia)'라는 군용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갔다.
배에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북적거렸으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전쟁터로 가는 배는 원래 무거운 법.
낡은 기차를 타고 부산을 빠져나오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풍경들을 목도했다.
도로, 강가, 산자락 할것없이 빠끔한 곳마다 피난민들의 천막과 나무와 박스로 만든 하꼬방들이 즐비했다.
삶의 신음이 거리마다 넘쳐났다.
아버지는 '영연방 호주군 연대(Royal Australian Regiment)' 소속으로 임진강 근처 277고지에서 중공군 잔당
소탕에 전력했다.
1953년 7월27일 정전이 된 후에도 소탕작전은 계속됐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사람을 잘 사귀었고 스포츠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한국에 갈 때 삼촌이 남긴 카메라를 가지고 갔다.
그리고 한국생활 중에 찍은 많은 사진들을 편지와 함께 엄마에게 보냈다.
전란이 휩쓸고 간 황량한 풍경과 배고파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무너진 집더미와 포탄자국 가득한 건물들….
한국의 겨울은 무시무시했다.
아버지는 근무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그것이 삼촌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첫 아들(나의 형)이 태어나자 콜린 삼촌의 이름을 따서 콜린 조나단 괴벨이라 지었다.
■괴벨가의 비밀 파일
아버지는 1954년 12월 귀국했다.
한국에 머문 기간은 약 8개월.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임무는 무거웠고 상념은 복잡했다.
그 시간들이 잊혀지지 않는 건, 콜린 삼촌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변화 때문이기도 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서울과 부산을 찾은 적이 있다.
한국으로 올 때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60년 전에 한국에 뭔가 흘리고 온게 있는지 찾아보고 올게요"라고.
옆에 있던 나의 형 콜린은
"내 이름하고 똑같은 콜린 삼촌에게 꼭 안부 전해 줘"라고 당부 했다.
우리 부부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고, 2000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더니
"이게 그곳이야? 삼촌은 잘 쉬고 있더냐?"며 몹시 놀라워하셨다.
여기 소개한 나의 '가족사 파일'은 지난 10년간 아버지로부터 얻어낸 일종의 '전리품'이다.
삼촌의 카메라로 아버지가 찍은 것과 최근 내가 찍은 것을 합쳐 엮은 가족사다.
군대 이야기는 물론 삼촌에 대해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으셨던 아버지.
그러나 '가족사 파일' 속에는 저절로 말해지는, 저절로 말해질 수밖에 없는 괴벨가(家)의 두 기둥,
아버지와 삼촌의 '감춰진' 영웅담이 흐르고 있다.
파일이 완성되면 아버지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 레오 괴벨 씨 아들 로저 괴벨
- "우리가 누리는 행복, 참전용사들에 빚져"
'괴벨 가족사 파일'을 엮고 있는 사람은 호주 참전용사인 레오나르드 헨리 괴벨(90)의 둘째 아들인 로저 괴벨(60) 씨다.
호주 퀸즈랜드 정부의 공무원인 그는 현재 컨설팅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호주는 한국전쟁 때 병력 1만7164명을 파병해 339명이 전사했으며,
이중 281구가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최근 [로저 괴벨] 씨는 자신의 '가족사 파일'을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보내
아버지와 삼촌의 우애를 평화를 위한 이야기 소재로 활용해 달라는 뜻을 밝혔다.
다음은 그와의 이메일 인터뷰다.
-어떻게 가족사 파일을 엮을 생각을 했나.
"아버지의 삶은 곧 나의 뿌리다. 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아버지 이야기를 알아야 했다."
-아버지는 왜 '한국전 참전' 등 '군대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을까.
"글쎄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고, 세계 곳곳의 전장을 누비며 싸우기도 했다.
그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다. 직업군인이 된 것은 나와 형, 그리고 가족이 좀 더 잘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신의 아들, 손주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건지 일깨워주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한국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한국 방문 때 대학생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아버지와 삼촌이 한국전 때 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놀라워하며 오늘 누리는 행복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해야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취재지원: 김정화(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기획부장)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정보산업진흥원
※ 후원 : 유엔기념공원, 부산 남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