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3주일 강론 : 북한의 현실/ 박정일 주교님/ 본당 설립 17주년 기념 성지순례 >(9.8.일)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며,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귀와 입을 열게 해주시기를 청하면서, 오늘 미사를 봉헌합시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아주 막강한 나라가 되겠지만, 주변국들은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귀먹은 반벙어리가 제일 많은 나라는 북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3대 세습을 넘어 4대 세습을 준비 중인 북한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었습니다. 최근에 북한 해외 근무자들이 우리나라로 많이 넘어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몇 년 전, 북한이 중국과의 국경을 개방하려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길이 막혔고 5년이 지났습니다. 해외에 있는 고위층도 1년에 한 번 정도 북한에 다녀와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들어가면 해외에서 누리던 자유를 뺏기기 때문에 아예 우리나라로 넘어옵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에 101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그중 80% 이상이 해외 고급 인력입니다. 해외에서 유학하든 사업하든 북한 정부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인데, 탈북이 계속되니까 북한 정부가 심각한 멘붕에 빠졌습니다.
북한에서 해외사업을 하려면 정부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사회주의 계획경제만으로 북한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허락하면서도, 개인사업자들이 외화를 많이 버는 것을 규제하기 위해 25-30% 세금을 내게 했습니다. “세금” 개념을 처음 도입했지만, 이걸 대놓고 “세금”이라 할 수 없으니 “혁명자금”이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배인이면 국가보위부에서 부지배인을 붙여 감시합니다. 그런데 지배인의 1년 수입이 10만$이면 6만$이라 보고하며, 4만$은 그가 갖고 부지배인을 매수합니다. 월급 외의 부수입 없는 부지배인은 월급만으로 북경에서 자녀를 공부시키지 못하니 “너희 가족이 북한으로 귀국할 때 집 한 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돈 마련해줄 테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자.”라며 지배인과 비밀계약을 맺곤 합니다.
해외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북한에서는 “장마당”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집에만 있던 여성들이 “집에서 할 일도 없는데 장사나 할까?” 싶어서 장마당에서 장사하다 보니, 남자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철저한 가부장 사회에서 여권이 높아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자기 몫의 배급 전표를 국영상점에 내고 물건을 공급받아야 하는데, 북한경제가 완전히 무너지며 물자가 바닥나니까 “이러다가 굶어 죽겠다. 우리끼리라도 사고팔아야겠다.”라며 물물교환이 이뤄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통제가 너무 심했고, 메뚜기처럼 폴짝폴짝 옮겨 다녀서 “메뚜기시장”이라 했지만, 2002년 7월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장마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세대(장마당 세대)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버스정거장에 사람이 누워있는데, 이유를 물어보면 굶어 죽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어른들의 말에 “나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국가인데, 왜 충성해야 되지?”라면서 사상에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장마당이 처음에는 평양에만 있었지만 북한 전역으로 늘어나 먹고살 길이 생겨 불만이 줄었습니다. 2018년에 470여 개 장마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장마당은 현재 북한경제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세력입니다.
해외에서 돈을 번 사람들의 돈도 북한으로 흘러들어 달러, 위안화도 받고, 국경에서는 밀수품도 판답니다.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들도 국영상점으로 보내지 않고, 공장 지배인들이 장마당으로 빼돌려 원금의 몇 배를 번답니다. 2006년부터 국영상점에서도 배급 전표뿐만 아니라 외화를 받기 시작하며, 장마당과 대결구도로 가게 되었답니다.
그 후 장마당과 북중 무역은 김정일 시대의 2인자 장성택이, 국영상점은 군부가 맡으며 돈을 버니까 김정은은 장성택과 8천 명의 부자를 죽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자리를 즉시 채웠답니다. 그들은 그들 이익을 위해 이런 체제가 계속되고, 남북이 통일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북한 출신이라 해도,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2. 8/28(수) 14:39, 3대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님이 97세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1926년 12월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1950년 서울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 편입했고, 1952년 교황청립 울바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58년 11월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주교님은 교황청립 울바노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철학 석사학위를 받으셨고, 1959년 9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62년 6월 같은 학교 안젤리쿰 졸업(사회학 석사) 후에, 부산 초량본당 보좌, 마산교구 문산, 진주(현 옥봉동) 주임, 1970-1977년 광주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셨습니다.
1977년 5월 31일 주교품을 받고 제2대 제주교구장에 착좌했다가, 1982년 8월 10일 제6대 전주교구장에, 또 1988년 12월 제3대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주교님은 1989년 2월 21일 제3대 마산교구장에 착좌하셨습니다. 그 후 주교회의의장,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장, 천주교용어위원회 위원장,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교리주교위원회 위원장,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가, 2002년 11월 마산교구장에서 퇴임하셨습니다.
박 주교님은 3개 교구(제주, 전주, 마산) 교구장을 지낸 유일한 주교이시고,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단독 추진한 124위 시복시성소송 책임을 졌는데, 주교님 덕분에 124위 모두 시복되셨습니다. 또 한국교회에서 가장 먼저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가 부족한 지역에 교구사제를 선교사로 파견하는 제도)을 실천하셨고, 항상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아주 큰 역할을 해주신 박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9/7(토) 우리 본당 설립 17주년을 맞아, 황새바위 순교성지, 박찬호기념관, 서운동 순교성지성당에 다녀오면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나눴습니다. 총회장님을 포함한 모든 봉사자들과 참가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일치하고 사랑하며, 신심 깊고 탄탄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