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카를교 가는길^^ *까를교 karlova ulice* 구시가를 지나쳐서 까를 다리로 이어지는 거리로 까를 4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왕이 지나는 길이었죠. 이 길의 모양이 옛 구시가의 경계 부분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까를 거리에는 유난히 나무 조종 인형이 많이 판매되고 있고. 프라하가 인형극으로 유명하다. 까를교는 정말 야경이 멋진 다리로, 까를교 위에서 여러 음악공연도 하고, 이쁜 물건들도 정말 많이 파는 곳으로 아름답다고 소문 난 곳 이기도 합니다.
[체코]카를교 근처 맛집 앞 오줌싸게 동상^^
카를교 초입에서^^
♧큰딸 신혼여행^^♧
★큰딸 신혼여행[동유럽-][체코]황금소로 가는 길.프라하성.성 비타성당.국립 박물관(4편)★
2010년 3월 28일~4월3일 까지 신혼여행으로 동유럽-오스트리아.체코를 7일 동안
다녀왔습니다...직장 관계로 오래 있을수가 없어서 조금 아쉬움은 있지만 짧은
여행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우선 사진작업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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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청사 탑에 있는 천문 시계 orloj*
특히 유명한 건 청사 탑에 있는 천문 시계 orloj 랍니다. 천문 시계가 만들어질 당시의
천문학은 지구 중심 이었지요. 그래서 시계의 목적 또한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태양과
달의 궤도를 모방해 내는데 있었다고 하죠. 시계 바늘은 세 가지 종류의 시각을
나타내는데, 맨 외부 24 아라비아 숫자는 고대 보헤미아 시간을, 다음 안쪽 두쌍의
12 로마숫자는 중부 유럽의 낮·밤시간을, 맨 안쪽(푸른색 내)의 12 아라비아 숫자는
일출-일몰시까지의 낮시간을 나타내고 있고요. 위의 푸른색은 하늘을, 밑의 갈색은
땅을 나타내며, 갈색안의 검은 색은 여명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달과 해가 뜨는 시간을 나타내 주는 달모양과 해모양의 초침이 있어요.
밑의 부분은 일년을 나타내주는 달력으로 수동 조작이지요.
시간을 알리는 종은 매시각 정각. 우선 시계 오른쪽에 설치된 해골이 자기의
오른손에 감긴 줄을 잡아당긴 다음 왼손으로는 모래 시계를 들어올려 뒤집는다.
그러면 두 개의 창문이 열리고 시계 태엽에 해당하는 12사도가 성 베드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죠. 이 행렬이 끝날 무렵 수탉이 홰를 치는데, 이 때 시계는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게 된답니다. 참 이 시계는 1490년 hanus 하누슈 라는 거장
시계공에 의해 고안되었답니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 시청사 Staromestska Radnice*
*유명한 얀 후스 동상*
1945년 종전 마지막날 독일군이 떨어뜨린 포에 맞에 시청사의 뒷부분은 모두 파괴되어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었구요, 남은 부분들은 잘 복원되어 전시장 및 유적지로
공개되고 있지요. 6개의 집들이 모여 한 시청사 군을 이루는데 지하로 내려가면
로마네스크 양식의집 구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6개의 집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깜작 놀라게 되지요.
오래전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다가 콘스탄트 종교회의결과 화형에 처해짐.
*체코 프라하 화약탑.카를교 등*
*화약탑* *화약문<탑> prasna brana*
구시가로 들어가는 13개 문 중의 하나로 문 보다는 탑의 모양으로 이해하셔야 해요.
도시로 들어가는 도시와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남대문인 셈이죠.
왕 블라디슬라프 II세에게, 시의회가 대관식 선물로 바친 이 화약문은 중세 때 왕의
재정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은광 도시 , kutna hora 꾸뜨나 호라 로 들어가는
입구랍니다. 17세기 때 화약을 저장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었지요.이 화약문 오른편에
있는 거대한 돔을 가진 건물은 20세기 초에 지은 시민 회관 obecni dum 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의 독립을 선언한 중요한 장소이기도 해요. 이 건물의 스메타나
홀은 프라하의 가장 크고 아름다운 연주회장 중 하나이구요,
매일 아름다운 클래식 콘서트를 향하는 정장의 남녀들을 볼 수 있는 곳이죠.
건물 외관을 둘러싼 회화 장식들은 모두 아르누보 양식의 대가 알퐁소 무하의
작품이랍니다.
*성 비타성당(Katedrala sv. Vita)*
프라하 시내 어디에서도 보이는 이 성당은 프라하 성의 중앙에 있다.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비엔나에 있는 슈테판성당의 모델이 된 건물이기도 하다.
1344년 카를 4세에 의해 짓기 시작하여 1929년에 완성된 긴 역사를 자랑한다.
로마네스크 성당 터에 고딕양식으로 만들며서 바로크 첨탑이 가미된 복합양식 건물이다.
처음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는 프랑스 인 메티유 였다. 공사 도중 메티유가 죽자
슈바벤 출신 건축가 피터 파를러가 인계 받았다. 당시 나이는 23세 였다.
결국 파를러도 이 성당을 완공하지 못해 그의 아들에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후스전쟁 때 작업이 중단되다가 16세기 중엽 첨탑 부분을 르네상스식으로 올렸고
그 후 100년 뒤 양파모양의 바로크 첨탑을 가미한 건축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19세기
20세기 건축가와 미술가들에 의해 마침내 완성 되었다.
완성된 성당은 전체길이 124m, 너비 60m, 천장의 높이 33m, 3기의 탑가운데
남쪽탑은 96.5m, 서쪽 정면에 있는 2기의 탑은 82m이다
이 성당의 특징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와 성왕 바츨라프의 무덤이다.
이 곳에선 천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최고 미술품들을 감상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성당 출입구 위쪽 장미의 창이 보인다. 천지창조의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기에는 묘사된 것을 구별 할 수 없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작은 망원경을 이용해야 잘 보인단다)
*프라하성(Praha)*
프라하성은 프라하의 상징으로 현재 대통령도 거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문에 서있는 근위병이 참 유명하죠. 안에는 성비타성당. 구왕궁.수도원,
왕실정원.광장등을 통칭하는게 프라하성 이라고한다.
그중에서 "황금소로"는 정말 동화같은 도로로 유명하며 정말 예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가치가 있는 곳이죠
왕궁 정문에 근위병이 서 있어서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라하성은 화려한 외관도 웅장함도 없어서 약간 대규모의 화려하지 않은 신대륙의
저택같은 분위기였다. 성 벾에서 내려다 본 프라하 시내의 경관이 더 멋진 곳이었다.
성 내부의 성당은 그래도 외관상의 화려함이 멋졌지만...
*황금소로(Zlata ulicka)*
프라하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원래는 프라하성(城)을 지키는 병사들의
막사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나, 루돌프 2세 때인 16세기 후반 연금술사와 금은세공
사들이 살면서 황금소로라고 불리어졌다.
지금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는 프라하성의 일부로, 성의 입구를 지나면 좁은
골목길이 나오는데, 이 골목길이 황금소로이다.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작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1990년대 이후 프라하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하면서 이
골목 역시 프라하를 찾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찾는 명소가 되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기념품점이나 선물 상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중세 때의 투구나 장신구 등을 전시하는 전시장도 있다.
그러나 이곳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성(城)》《변신》의 작가 카프카(Franz Kafka)
때문이다. 카프카는 1916년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여동생이 집필활동을 위해 마련해
준 이 골목 22번지의 작은 집에서 매일 글을 쓰고,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하숙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프라하성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작품 《성》도 이때 완성한 것이다.
골목 위로 올라가면 장난감 박물관과 고딕양식으로 지은 높이 100m의 성(聖)비투스 대성당이 있다.
2010년 4월 10일^^☎☎☎♡^^*
계속해서~카를교에서^^
맛집 찾아가는 길^^
카를교 앞 식당^^
식사^^
[체코]카를교 근처^^
*카를교 동쪽 bridge tower와 카를4세 동상*
계속해서~카를교에서 바라 본 풍경^^ *까를교 karlova ulice* 구시가를 지나쳐서 까를 다리로 이어지는 거리로 까를 4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왕이 지나는 길이었죠. 이 길의 모양이 옛 구시가의 경계 부분 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까를 거리에는 유난히 나무 조종 인형이 많이 판매되고 있고. 프라하가 인형극으로 유명하다. 까를교는 정말 야경이 멋진 다리로, 까를교 위에서 여러 음악공연도 하고, 이쁜 물건들도 정말 많이 파는 곳으로 아름답다고 소문 난 곳 이기도 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Nabucco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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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딸과 사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구스타프의 생전 사진(2점)과 크림트의 '키스'라는 작품입니다. 1907년 당시 제작한 것으로 유화이고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생애설명 시간을 두고 읽어보세요 생애를 알면 그림이 새롭게 보이거든요 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에서, 보헤미아에서 이주해 온 금세공사 에른스트 클림트의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술회가 말해 주듯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장녀를 광적인 종교에 잃고 막내딸마저 병으로 잃은 뒤 남은 다섯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키워 보겠다는 양친의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짐나지움에 입학하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으로 예정된 미래를 짊어진 채 고등 공민 학교인 "뷔르거슐레"에 입학한다. 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예정된 운명의 손길을 뿌리치고 화가로서의 훗날을 예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 같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면서, 라이헨베르크 국립 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분 받아 학비를 조달하고 아울러 화가로서의 경력도 쌓아 나간다. 188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콤파니]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이 활동에 나선다.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장식, 피우메에 있는 리예카 국립 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계단 장식 등이 이 세 젊은 예술가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었다. 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 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첫 수상자가 되기도 하는 등 그는 점차 뛰어난 장식 화가로 비엔나 문화계의 전면에 도드라졌다. 1892년 그의 둘도 없는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에른스트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부친마저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와 함께 남은 가족과 동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도 또 내면적 위기도 그의 화가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서 소외된 채 길고 나른한 동면에 빠져 있었다. 늙고 고루한 예술가들의 횡포와 과도한 상업적 배려에 짓눌려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화단을 바라보며 진작부터 새로운 미술의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어떤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1897년 '동떨어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자신들의 독점적 위치를 이용하여 악화를 구축하고 있던 비엔나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설, 초대 회장에 선임된다. [비엔나 분리파]의 정신적 수원(水源)이었던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체 없이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한 클림트는,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파종한다. 1894년 오스트리아 문교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하자, 그를 후원하는 한 실업가의 도움을 받아 문교부로부터 받았던 사례금을 돌려주고 그 작품들을 비엔나 대학에 서 철수시킨다.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비단 이 작품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02년 거장 베토벤을 기념해 만든 30여 미터에 이르는 대작 벽화 [베토벤 프리체]도 여론의 격렬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록 자국 내에서는 그의 작품이 이렇듯 경원되고 혐오되었으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는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으며,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체]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짐으로써 그를 격려하고 그의 예술의 진가를 확인해 주었다.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의 지휘 아래 속속 젊고 재능 있는 화가들을 발굴하여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모네, 샤반느, 막스 클링거, 맥도널드, 매킨토시 같은 외국의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하면서 오스트리아에 모더니즘의 씨를 뿌리고 다시 그 영향을 유럽 전역으로 파급한다. 1900년대로 접어들면서 [비엔나 분리파]의 지나치게 장식적인 경향과 계급적 모호성에 대한 비난이 안팎으로 제기되면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집요하고도 잔인한 비난에 지쳐 있기도 했던 클림트는, 1905년 돌연 회장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침잠한다. 난장판 같은 소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그는,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으로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그의 예술의 가장 중요한 시기, 이른바 "황금 시대"의 경작에 매달린다.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이 이 시기, 그의 주요한 소출들이었다. 그리고 대표작이자 "황금 시대"의 절정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 시절, 처음에는 부업이 그리고 나중엔 본업이 되다시피 한 여러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 [스토클레 저택 벽화] 같은 분리파 시절의 건축과 연관된 작업들에서도 내내 장식성은 그의 공기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런데 "황금 시대"를 종료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리파 내의 반 분리파였던 아돌프 로스의 저서 [장식과 죄악]의 영향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발언이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의 말대로 과연 장식성에서 벗어났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상수인 관능성과 마찬가지로 장식성은 그의 최후의 그림들에서까지도 짙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식성과 관능성, 아름답지만 부패하기 쉬운 이 '살아있는 송장'들을 그는 최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1908년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비해 색채가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독립된 구성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고, 간간이 나타나던 화면의 정사각형 형태가 거의 고정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재 면에서 풍경과 초상이 그의 그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일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풍의 긴 장옷을 걸치고 일년의 반은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그와는 사돈지간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휴식과 명상을 즐기곤 했다.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그의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바로 아터 호수 주위의 풍광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었다. 고흐와 모네, 일본 판화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은 그의 아름다운 풍경화들을 베르타 주커칸들은 '채색된 슈베르트의 선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초상화 또한 그가 풍경화와 더불어 말년에 즐겨한 작업이었다. [프리차리들러 부인의 초상] [아델 블로흐 부인의 초상] [마르가레트 스톤브로우 비트겐슈타인 부인의 초상] [요한나 슈타우데 부인의 초상]등 그는 화려하고 현란한 장식과 색채로 비엔나의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에게서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은 비엔나 상류층 부인들의 긍지이자 영광이었다. 자신의 삶과 그림을 둘러싼 그 모든 소음에서 벗어나, 가슴을 벌레처럼 파먹어 대는 그 집요한 금전적 번민에서도 벗어나 자연 속에 파묻혀 관조와 명상의 나날을 보내며......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르베, 르느와르와 더불어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 회장으로, [비엔나 예술 아카데미]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한 그의 말년은 분명 평화로운 것이었다. 1918년은 시 마치 흑사병과도 같은 맹위를 떨치며 전 유럽을 강타해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를 기습해 분리파 예술가들을 몰살시킨 해였다. 클림트는 1월 18일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다 결국 스페인 독감에 걸려 2월 6일 평생의 연인 에밀리에 플뢰게가 지켜보는 가운데 56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비엔나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도,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쉴레도 갔다. [비엔나 분리파]라는 '성스러운 봄'이 장엄하게 저무는 순간이었다. 클림트의 삶과 그림을 관류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그리고 언제나 현재적인 테마였다.
첫댓글 동작빠르심..난 아직도 다 못올렸는데..잘보구가유!!
긍까... 언니 홈피에 안올라오나 기다렸는데 여기서 보니 속 시원하네 ㅋㅋ
성 비타 성당, 우리가 찍을땐 왜곡을 많이 시키는 렌즈로 찍어서 그런가 이번엔 좀 느낌이 달라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