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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역 본문 중에
1.[時亮生三男五女。시량생삼남오녀。 이시량(柳時亮)은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낳았는데, ]
2. [泰夏奉其慈夫人命致辭曰。김태하가 와서 그 모부인에게 받은 명을 전하기를,]로 기록 되어 있으나
본문 중에
[딸들은 목사 이침(李梣)과 현감 유시량(柳時亮)에게 출가하였다.
이침은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는데, 관하(觀夏)는 현감이고, 태하(泰夏)는 유학이고, 승하(昇夏)는 생원이다.
딸들은 윤지미(尹趾美), 이송령(李松齡), 홍위(洪葳)에게 출가하였다. ]
가 기록 되어 있어
[時亮生三男五女。시량생삼남오녀。 유시량(柳時亮)은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낳았는데, ]
[泰夏奉其慈夫人命致辭曰。태하봉기자부인명치사왈。
태하(李梣 子)가 와서 그 모부인(김지남의 딸. 이침의 부인. 태하의 모친)에게 받은 명을 전하기를,]
으로 수정하였다.
즉 '이시량' 은 '유시랑' 으로, '김태하' 는 '태하(李梣 子 이침 의 아들)'로 수정하였다.
용주유고(龍洲遺稿) 제14권 / 지(誌)
감사 용계 김공 묘지명병서 〔監司龍溪金公墓誌銘 幷序〕 龍洲 趙絅 幷序(용주 조경 병서)
不佞少也。불녕소야。내가 어렸을 적에
聞諸長老言。문제장로언。장로들에게 들은 말이 있으니,
國家文明之化至宣廟朝而極。국가문명지화지선묘조이극。
국가 문명의 교화가 선조(宣祖) 때에 극에 달하여
亡論褒衣韋帶。망론포의위대。벼슬한 자와 벼슬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譚道義者蔚然輩出。담도의자울연배출。도의(道義)를 말하는 자들이 성대하게 배출되어
如晏殊,楊億神童之稱。여안수,양억신동지칭。안수(晏殊)와 양억(楊億)처럼 신동으로 불린 자들이
指亦多屈。지역다굴。매우 많았다고 한다.
龍溪公卽宣廟朝神童之一也。용계공즉선묘조신동지일야。용계공(龍溪公)이 바로 선조 때 신동의 한 사람이다.
神童而有位有年。신동이유위유년。신동이면서 지위를 누리고 장수한 경우는
固古今之所患尠。고고금지소환선。진실로 고금에서 찾기 어렵다.
公位躋二品。공위제이품。공은 2품의 지위에 오르고
年終七十三。연종칠십삼。73세의 수를 누렸으니,
庸非受氣於天。용비수기어천。하늘에서 받은 기운으로
不亶蚤成而已歟。부단조성이이여。 단지 일찍 성취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公諱止男。공휘지남。공의 휘는 지남(止男),
字子定。자자정。자는 자정(子定),
號龍溪。호용계。호는 용계(龍溪)이고,
光山人。광산인。본관은 광산(光山)이다.
公生七歲。能詩。공생칠세。능시。공은 7세부터 시를 잘 지었다.
十三。次昌黎南山詩。십삼。차창여남산시。13세에 창려 한유(昌黎 韓愈)의 〈남산시(南山詩)〉를 차운하였는데,
朴梧亭蘭批之曰。박오정란비지왈。오정(梧亭) 박란(朴蘭)이 평가하기를,
此捕龍搏虎手也。차포용박호수야。“이는 용을 잡고 호랑이를 때려잡는 솜씨이다.” 라고 하였다.
至十四十六。지십사십육。14, 16세에 이르러
數獲雋學製間。수획준학제간。14, 16세에 이르러 여러 차례 학제(學製)에 합격하여
名聲藉甚。명성자심。명성이 자자하였다.
公姊壻李公𡹘以古文辭鳴世。공자서이공계이고문사명세。
공의 자형 이공(李公 이계(李啓))은 고문사(古文辭)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사람인데,
欲以難試公。욕이난시공。어려운 문제로 공을 시험하고자 하여
用易鼎覆餗爲題。용역정복속위제。《주역》 〈정괘(鼎卦)〉의 ‘복속(覆餗)’을 제목으로 글을 짓게 하였다.
公應口作古詩十四韻。공응구작고시십사운。공이 즉시 고시(古詩) 14운을 짓고
又作賦四六五十餘句。우작부사육오십여구。또 부(賦)와 사륙문(四六文) 50여 구를 지었다.
李公歎曰。이공탄왈。이공이 감탄하기를,
吾當遜汝一頭地。오당손여일두지。“내가 너에게 한 걸음 양보해야겠다.” 라고 하였다.
萬歷辛卯秋。만력신묘추。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24) 가을에
成進士。성진사。진사시에 합격하였다.
冬登別試大科。동등별시대과。겨울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分隷成均。분례성균。성균관에 분관(分館)되니,
物論惜之。물논석지。여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壬辰島夷入寇。임진도이입구。임진년(1592)에 왜적의 침입으로
上西幸。상서행。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하셨는데,
公以老母病甚。공이노모병심。공은 노모의 병이 위독하여
不能執靮。불능집적。 호종하지 못하고
羈旅湖內。기려호내。호남에 머물며 *羈旅(기려) : 객지에 머물거나 여행함
召集義旅。소집의려。의병을 소집하여 *義旅(의려) : 나라가 위급할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爲遏賊計。위알적계。적을 막을 계책을 세웠으니,
詳見趙憲抗義篇。상견조헌항의편。조헌(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에 자세히 보인다.
佐建義大將沈相守慶。좌건의대장심상수경。건의대장(建義大將)인 재상 심수경(沈守慶)을 보좌하였다.
癸巳。계사。계사년(1593)에
自幕府赴行朝。자막부부행조。막부(幕府)에서 행조(行朝)로 나아갔다.
大臣啓改分館。대신계개분관。대신의 계청으로 다시 분관(分館)하여
移公槐院。이공괴원。승문원으로 옮기고,
俄薦堂后。아천당후。 얼마 뒤에 승정원 주서에 천거되었다.
冬十月。동십월。大駕還都。대가환도。겨울 10월에 대가가 환도하자,
選補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선보예문관검열겸춘추관기사관。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선발되었다.
奉命檢首陽設版。봉명검수양설판。명을 받들어 수양(首陽 해주(海州))의 공사(工事)를 검찰(檢察)하면서
與監司柳永慶不相能。여감사유영경불상능。감사 유영경(柳永慶)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及柳用事。급유용사。유영경이 정권을 잡자
公之累躓由此云。공지누지유차운。공이 이 때문에 여러 차례 배척당했다고 한다.
其后戊申。기후무신。그 후 무신년(1608)에
宣廟昇遐。선묘승하。선조께서 승하하시고
攻柳者鵲起。공유자작기。유영경을 공격하는 자들이 마구 일어나
引公爲助。인공위조。공을 끌어들여 도움을 받고자 하였는데
公不從。공불종。공이 따르지 않으니,
識者稱公長者。식자칭공장자。식자들이 공을 장자(長者)라고 칭찬하였다.
甲午。갑오。丁內艱。정내간。갑오년(1594)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服闋。복결。삼년상을 마치고
陞奉敎辭。승봉교사。봉교로 승진하였는데 사직하였다.
其年冬。기년동。그해 겨울에
遷水部郞。천수부낭。 공조 낭관으로 옮겼다.
丁酉。정유년(1597)에
以兼春秋承命守江都史庫。이겸춘추승명수강도사고。겸춘추로서 명을 받들어 강화도 사고(史庫)에서 수직하였다.
夏。黃州判官。하。황주판관。여름에 황주 판관(黃州判官)에 제수되었다.
己亥。京圻都事。기해。경기도사。기해년(1599)에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제수되었다가
遷戶曹正郞。천호조정랑。호조 정랑으로 옮겼다.
自秩郞改平安都事。자질랑개평안도사。형조 낭관을 거쳐 평안 도사(平安都事)로 옮겼으며,
無何。무하。參弘錄。참홍록。얼마 뒤에(居無何)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辛丑。신축。신축년(1601)에
由秋官郞轉司諫院正言。유추관랑전사간원정언。형조 낭관을 거쳐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으며,
參校易解。참교역해。《역해(易解)》를 교정하였다.
嘗以正言登對謁上過。상이정언등대알상과。일찍이 정언으로서 등대하여 임금의 과실을 아뢰었는데,
人稱眞諫官。인칭진간관。사람들이 진정한 간관(諫官)이라고 칭찬하였다.
武夫李時彥判京兆。무부이시언판경조。무인(武人) 이시언(李時彥)이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고,
賤臣鄭德珪授內乘。천신정덕규수내승。천신(賤臣) 정덕규(鄭德珪)가 내승(內乘)에 제수되자
皆劾之。개핵지。모두 탄핵하였다.
又論內奴貢違惟正。우논내노공위유정。또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신공(身貢)이 정공(正供)에 어긋난다고 논핵하였다.
陞獻納。승헌납。헌납으로 승진하였는데,
坐論嶺儒疏詆成文簡公事。좌논영유소저성문간공사。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비방하는 소를 올린 영남 유생을 논핵한 일로 체직되어
遞拜禮郞。체배예랑。예조 낭관에 제수되었다.
壬寅。임인。임인년(1602)에
以謝恩使書狀朝京。이사은사서장조경。사은사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조회하였다.
丙午。병오。병오년(1606)에
日本源家康殲平爲關白。일본원가강섬평위관백。일본의 원가강(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평씨(平氏 평수뢰(平秀賴))를 죽이고 관백(關白)이 되어서는
遣橘知正請和。견귤지정청화。 귤지정(橘智正)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며
稱執犯陵賊以送。칭집범능적이송。왕릉을 파헤친 적을 붙잡아 보내겠다고 말하였다.
朝廷選接慰官。조정선접위관。조정에서 접위관(接慰官)을 선발하였는데
公往焉。공왕언。공이 가게 되었다.
到釜山馳啓曰。도부산치계왈。공이 부산(釜山)에 이르러 치계(馳啓)하기를,
橘是馬島人。귤시마도인。“귤지정은 대마도(對馬島) 사람이니
非關白使臣。비관백사신。관백의 사신(使臣)이 아닙니다.
與之均拜則恐損國體。여지균배칙공손국체。그런 자와 대등한 예를 행하면 국가의 체면이 실추될까 두렵습니다.”
報可。보가。라고 하여 허락을 받았다.
公坐受橘倭再拜禮。공좌수귤왜재배례。공은 앉아서 왜인 귤지정의 재배례를 받았다.
復命。복명。복명하자
雖柳相亦稱接待得體。수유상역칭접대득체。재상 유영경(柳永慶)조차도 접대의 체모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戊申。무신。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由江原都事拜直講。유강원도사배직강。강원 도사(江原都事)를 거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고
遷持平。천지평。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는데 사직하였다.
辭弘文修撰。사홍문수찬。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어서는
公草箚陳時弊六條。공초차진시폐육조。시폐(時弊) 6조목을 아뢰는 차자를 지었는데,
貳於僚議。이어료의。동료들과 의논이 어긋나 不果上。불과상。결국 올리지 못하였다.
己酉。拜掌令。기유。배장령。기유년(1609)에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
月餘。入玉堂上箚請寢營建。월여。입옥당상차청침영건。 한 달 남짓 지나
옥당(玉堂)를 올려 궁궐 영건을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夏。衣繡關西。하。의수관서。여름에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還掌令。환장령。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다.
遷校理。천교리。교리로 옮겼다가
又還掌令兼侍講院弼善。우환장령겸시강원필선。다시 장령 겸 시강원필선에 제수되었다.
庚戌。경술。拜修撰。배수찬。경술년(1610)에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
上箚請寢追崇恭嬪。상차청침추숭공빈。차자를 올려 공빈(恭嬪)을 추숭(追崇)하는 일을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移校理。이교리。교리로 옮겨서는
又上箚請去女樂。우상차청거여악。또 차자를 올려 여악(女樂)을 없앨 것을 청하였다.
自是年至壬子。자시년지임자。이 해부터 임자년(1612)까지
於憲府執義者三。어헌부집의자삼。사헌부에서 집의를 세 번,
於講院輔德者三。어강원보덕자삼。시강원에서 보덕을 세 번,
玉堂校理者三。옥당교리자삼。옥당에서 교리를 세 번 지냈다.
由校理拜司諫。유교리배사간。교리를 거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고
轉應敎。전응교。홍문관 응교로 옮겼다가
俄拜執義。아배집의。얼마 뒤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는데,
卽癸丑夏四月也。즉계축하사월야。바로 계축년(1613) 여름 4월이었다.
時捕盜大將韓希吉執無賴賊徐羊甲。시포도대장한희길집무뢰적서양갑。
당시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이 무뢰배 서양갑(徐羊甲)을 체포하여
誣以推戴永昌大君。무이추대영창대군。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鞫獄大起。국옥대기。국옥(鞫獄)이 크게 일어나
遂煽動慈殿。수선동자전。마침내 자전(慈殿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까지 화가 미치도록 선동하였다.
造,訒等又於臺席。조,인등우어대석。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또 대각(臺閣)의 자리에서
發廢大妃論。발폐대비론。대비를 폐위하자는 의논을 내자,
大司憲崔有源咨公以立異之道。대사헌최유원자공이립이지도。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공에게 이견(異見)을 세울 방도를 물었다.
公乃擧左氏傳鄭莊公事曰。공내거좌씨전정장공사왈。
공이 이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기록된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일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莊公賴穎封人食舍肉而悟。장공뢰영봉인식사육이오。
“하사받은 음식을 먹으면서 고기를 밀쳐두고 먹지 않는 영봉인(穎封人)을 보고서 장공이 깨달았는데,
君子稱穎考叔爲錫類之孝。군자칭영고숙위석類지효。
군자(君子)가 ‘남에게 영향을 끼친 효성’이라고 영고숙(穎考叔)을 칭찬하였습니다.
母子天性之親。모자천성지친。모자(母子)는 하늘이 낸 지친인데
誰敢間之議之。수감간지의지。누가 감히 이간질하고 비난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有源大然公言。유원대연공언。최유원이 공의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其後造又拈遷武后時胡氏論示之。기후조우념천무후시호씨논시지。
그 후에 정조가 또 측천무후(則天武后)와 관련한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의 의논을 취하여 보이자,
左右默然。좌우묵연。좌우의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公又曰。공우왈。공이 또 말하기를,
胡氏之意。호씨지의。“호씨의 뜻은
欲令五王誅二張。욕령오왕주이장。다섯 왕으로 하여금 두 장씨(張氏) 를 죽여
告唐宗廟而處置武后。고당종묘이처치무후。당(唐)나라 종묘에 고하고 무후를 처치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與今不同。여금불동。지금과 상황이 다릅니다.
且武易唐爲周。차무역당위주。또 무후는 당(唐)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꾸고,
廢君鴆母。폐군짐모。임금을 폐하고 국모를 시해하였는데,
今日寧有是。금일영유시。오늘날에 이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라고 하자,
造無以應。조무이응。정조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遂避啓。수피계。마침내 피혐 계사를 올려
略陳人臣愛君以德之義。략진인신애군이덕지의。신하가 덕으로 임금을 사랑하는 의리를 대략 진술하고
且言母后非人臣所敢議者。차언모후비인신소감의자。또 모후는 신하들이 감히 비난할 상대가 아님을 말하였다.
玉堂處置副學李惺,校理吳翊,修撰鄭廣敬能執猗。옥당처치부학이성,교리오익,수찬정광경능집의。
옥당에서 이 계사를 처치한 부제학 이성(李惺) , 교리 오익(吳翊) , 수찬 정광경(鄭廣敬)이 공의 뜻에 동조하여
請遞造,訒。청체조,인。정조와 윤인을 체직시키도록 청하니,
光海心雖不平。광해심수불평。광해군이 마음속으론 못마땅하였지만
亦無奈何。역무내하。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廢論由是留禁不行幾數月。폐론유시유금불행기수월。폐모론(廢母論)이 이로 인해 억제되어 몇 달 동안 시행되지 못하였다.
六月。육월。遞執義。체집의。6월에 집의에서 체직되었다.
由司成,司諫,司藝轉軍器正。유사성,사간,사예전군기정。
성균관 사성, 사간원 사간, 성균관 사예를 거쳐 군기시 정(軍器寺正)으로 옮겼다.
還執義辭。환집의사。다시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九月。구월。拜司諫。배사간。9월에 사간에 제수되었다.
拄兩司還收復故相李德馨官爵論。주양사환수복고상이덕형관작론。
작고한 재상 이덕형(李德馨)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을 그만두도록 양사(兩司)에서 논의하였는데, 공이 이를 반박하였다.
於是兩司齊怒攻公。어시양사제노공공。이에 양사가 일제히 노하여 공을 공격하자,
公卽引疾去。공즉인질거。공은 즉시 칭병하고 떠났다.
甲寅。갑인。拜輔德。배보덕。갑인년(1614)에 세자시강원 보덕에 제수되었는데,
請告。청고。휴가를 청하였다.
又拜執義。우배집의。또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다.
仍陞同副承旨。잉승동부승지。이어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轉左副。病遞匕。전좌부。병체비。좌부승지로 옮겼다가 병으로 체직되었다.
除判決事。제판결사。판결사에 제수되었을 때
有關西人與內需寺訟奴婢。유관서인여내수사송노비。관서(關西) 사람과 내수사(內需司)가 노비 문제로 소송을 벌였는데,
公直其屈。공직기굴。공이 그 곡직을 분별하니
人皆快之。인개쾌지。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乙卯夏。을묘하。拜參知。배참지。을묘년(1615) 여름에 참지에 제수되었다.
秋由銀臺右承轉左。추유은대우승전좌。가을에 승정원 우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옮겼다.
丙辰。병진。병진년(1616)에
以癸丑獄完。이계축옥완。계축년 국옥(鞫獄)을 완결한 공로로
加百官資。가백관자。백관에게 가자하였는데,
公例陞嘉善。공례승가선。공이 규례대로 가선대부로 올랐다.
上疏辭。상소사。不報。불보。공이 상소하여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夏拜謝恩副使朝京。冬還。하배사은부사조경。동환。
여름에 사은 부사(謝恩副使)에 제수되어 연경에 조회하고 겨울에 돌아왔다.
李爾瞻欲牢籠公。委造公。이이첨욕뇌롱공。위조공。이이첨(李爾瞻)이 공을 포섭하려고 찾아오고(牢籠 뇌롱)
繼遣吏曹參判柳夢寅餂公意。계견이조참판유몽인첨공의。이어 이조 참판 유몽인(柳夢寅)을 보내어 공의 의향을 떠보았다.
公作戲語以答。공작희어이답。공이 농담으로 대답하고
求外補甚力。구외보심력。외직(外職)에 보임되기를 매우 힘써 구하니,
柳,李俱不悅。유,이구불열。유몽인과 이이첨이 모두 좋아하지 않았다.
丁巳。정사。정사년(1617)에
拜分兵曹參判。배분병조참판。분병조 참판(分兵曹參判)에 제수되었다.
戊午正月。무오정월。무오년(1618) 1월에
政府率百官庭請廢大妃。정부솔백관정청폐대비。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대비를 폐하라고 정청(庭請) 하고
不參者罪之。불참자죄지。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논죄하였는데,
公踰升入直分司故免。공유승입직분사고면。공은 해를 넘겨 분사(分兵曹參判)에서 입직하였기 때문에 죄를 면하였다.
夏除南陽府使。하제남양부사。여름에 남양 부사(南陽府使)에 제수되었다.
己未。기미。改尙州牧。개상주목。기미년(1619)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옮겼다.
瓜熟。과숙。임기가 만료되어
拜慶尙監司。배경상감사。경상 감사(慶尙監司)에 제수되었다.
時土木內興。시토목내흥。당시 도성에 토목 공사가 한창 일어나
支用無算。지용무산。무수한 비용이 들었는데,
授閫典郡者椎剝民膚髓。爭售能市寵。수곤전군자추박민부수。쟁수능시총。
지방의 감사와 수령들이 너도나도 능력을 과시하여 총애를 얻고자 백성에게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두었다.
公慨然曰。공개연왈。공이 개탄하기를,
方面之任。聚斂而已乎。방면지임。취렴이이호。“관찰사의 소임이 마구 세금 거두는 것뿐이랴.
得罪非吾懼也。득죄비오구야。죄를 받는 것은 내가 두렵게 여기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疏陳嶺南疵瘼至再。소진영남자막지재。두 번이나 상소하여 영남의 병폐를 아뢰니,
民力賴紓。민력뢰서。백성들의 형편이 이 때문에 넉넉하게 되었다.
東萊府使尹𥥈挾宮掖勢縱貪虐。동래부사윤굉협궁액세종탐학。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굉(尹𥥈)이 궁액(宮掖)의 세력을 끼고서 탐학한 짓을 자행하였는데,
公初按道。卽劾絀。공초안도。즉핵출。공이 감사로 부임한 즉시 탄핵하여 내치니,
一道相賀。일도상하。도내의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였다.
癸亥。계해。계해년(1623, 인조1)에
仁祖大王反正。인조대왕반정。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하시어
諸道臬臣。以昏朝除拜擧罷。제도얼신。이혼조제배거파。광해조 때에 임명되었던 여러 도의 감사들을 모두 파직시켰는데,
特命仍公瓜遞而歸。上疏請還。특명잉공과체이귀。상소청환。
특별히 명하여 공은 그대로 두었다. 임기 만료로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상소하여
丙辰。資拜兵曹參議。병진。자배병조참의。병진년에 내린 자급(資級)을 거두시기를 청하였다.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遷順天府使。천순천부사。순천 부사(順天府使)로 옮겼다.
甲子遞。갑자체。갑자년(1624)에 체직되고,
又拜兵曹參議。우배병조참의。또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又改左承旨。우개좌승지。다시 좌승지로 옮겼다.
乙丑病遞。을축병체。을축년(1625)에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旋拜兵議。선배병의。곧바로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丙寅告遞。병인고체。병인년(1626)에 정고(呈告)하여 체직되었다.
又拜左承旨告遞。우배좌승지고체。또 좌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정고하여 체직되었다.
丁卯。정묘。拜刑議逾月。배형의유월。정묘년(1627)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한 달 뒤에
出爲淸風郡守。출위청풍군수。청풍 군수(淸風郡守)로 나갔다.
郡僻而俗陋。군벽이속루。고을이 외지고 풍속이 비루하였으나,
公不鄙夷。공불비이。공은 하찮게 여기지 않고
行呂氏鄕約。행여씨향약。여씨향약(呂氏鄕約)을 시행하였다.
又以民瘼十五條疏列。우이민막십오조소렬。또 백성의 고통 열다섯 조목을 상소하여 진술하니,
上優答。상우답。상이 너그러이 답하시고
特蠲其弊七。특견기폐칠。특별히 그 폐단 일곱 가지를 없애주셨다.
己巳。以事罷。기사。이사파。기사년(1629)에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
庚午。拜禮曹參議。경오。배예조참의。경오년(1630)에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當穆陵遷寢。당목능천침。목릉(穆陵)을 이장할 때에
望哭禮與望闕禮交。망곡례여망궐례교。망곡례(望哭禮)와 망궐례(望闕禮)의 날짜가 상치되었는데,
公以爲哀慶不可幷行。공이위애경불가병행。공이 애경(哀慶)은 함께 행할 수 없다고 말했으나,
他僚不信。타료불신。다른 동료들이 믿지 않았다.
會鄭愚伏經世箚與公議合。회정우복경세차여공의합。
그때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올린 차자와 공의 의논이 서로 부합하자,
朝紳服公諳練。조신복공암련。조정의 신료들이 공의 정통한 지식에 탄복하였다.*諳鍊(암련)
辛未二月七日。신미이월칠일。신미년(인조9년 1631) 2월 7일에 *인조9년
考終于乾川洞正寢。고종우건천동정침。건천동(乾川洞)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쳤다.
訃聞。부문。부고가 전해지자
上遣官賜祭。상견관사제。임금께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셨으니,
蓋經二品也。개경이품야。2품 품계를 지냈기 때문이다.
某年月日。모년월일。모년 모월 모일에
葬于廣州梅莊里孤山下巽向之原。장우광주매장리고산하손향지원。
광주(廣州) 매장리(梅莊里) 고산(孤山) 아래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從先兆也。종선조야。선영이 있는 곳이다.
公之文學詞章。공지문학사장。공의 학문과 문장은
拔出流輩。발출류배。동류들보다 뛰어났다.
與娣子月沙李相相上下。여제자월사이상상상하。누이의 아들인 재상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와 실력이 비슷하여
取科第踵相躡。취과제종상섭。바로 뒤따라 과거에 급제하였고
聲名大噪。성명대조。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至其仕路瞠若乎相公之后。지기사로당약호상공지후。*瞠若(당약)
그러나 벼슬길에 있어서는 앞서가는 월사 상공의 모습을 뒤에 처져서 쳐다보았으니,
人或歎公蹇連。인혹탄공건련。사람들이 더러 공의 순탄치 못한 신세를 탄식하였다.
及乎戊申以后。급호무신이후。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이후로 관직이 갑자기 높아진 것은
名位陡盛。時與命使之然歟。명위두성。시여명사지연여。시대와 명운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不知公者。불지공자。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以公立昏朝歷華顯爲圭玷。이공위혼조력화현위규점。공이 광해조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것을 흠으로 여긴다.
然迹其遇事輒爭。연적기우사첩쟁。그러나 되새겨보면 공은 일이 있을 때마다
不降色辭。불강색사。사기(辭氣)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간쟁하였다.
況群小以廢論爲阱。황군소이폐론위정。구나 소인배들이 폐모론으로 함정을 만들었을 때에는
人孰不色戰股栗。인숙불색전고률。두려운 기색을 띠고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凝然特立。응연특립。공은 의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折造,訒於完席之上。절조,인어완석지상。완석(完席)에서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을 꺾었으며,
袖中諫草。수중간초。또 공의 소매에 들었던 간언의 초고는
婉而有味。완이유미。완곡하면서도 의미가 깊어
垂之汗靑。수지한청。실록(實錄)에 실려 있으니, *汗靑(한청)
何恧焉。하뉵언。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皇考諱彪。황고휘표。공의 부친 휘 표(彪)는
永同縣監。영동현감。영동 현감(永同縣監)을 지냈고,
祖諱世愚。조휘세우。조부 휘 세우(世愚)는
成均典籍。성균전적。성균관 전적을 지냈고,
曾祖諱磶。증조휘석。증조 휘 석(磶)은
行禮曹正郞。행예조정랑。행 예조 정랑을 지냈다.
公出後再從父贈嘉善大夫戶曹參判諱讓。공출후재종부증가선대부호조참판휘양。
공은 재종부(再從父) 증 가선대부 호조 참판 휘 양(讓)의 양자로 나갔다.
以公貴推恩三代。이공귀추은삼대。공이 귀하게 되어 3대가 추증되었는데,
曰世德。贈左承旨。왈세덕。증좌승지。좌승지에 추증된 세덕(世德)이
於公爲祖。어공위조。공에게 조부가 되고,
曰碬。贈通禮院左通禮。왈하。증통례원좌통례。통례원 좌통례에 추증된 하(碬)가
於公爲曾祖。어공위증조。공에게 증조부가 된다.
永同公娶監察順天金自渭女生公。영동공취감찰순천金자위女생공。
영동 현감(부 김표 金彪)은 감찰을 지낸 순천(順天) 김자위(金自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公前配海州吳氏。공전배해주오씨。공의 전 부인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監察景閔女。감찰경민녀。감찰 경민(景閔)의 따님이고,
後慶州金氏。후경주김씨。후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參奉好說女。참봉호열녀。참봉 호열(好說)의 따님인데,
俱有女無子。구유녀무자。모두 딸만 두고 아들이 없어
取仲兄判官季男子葏爲后。취중형판관계남자葏위후。중형(仲兄) 판관 계남(季男)의 아들 전(葏)을 후사로 삼았다.
生二男。생이남。전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長宇仁。童蒙敎官。장우인。동몽교관。장남 우인(宇仁)은 동몽 교관을 지내고,
次宇俊。幼學。차우준。유학。차남 우준(宇俊)은 유학(幼學)이다.
女。녀。딸들은
牧使李梣,縣監柳時亮。목사이침,현감유시량。목사 이침(李梣)과 현감 유시량(柳時亮)에게 출가하였다.
梣生三男三女。침생삼남삼녀。이침(李梣)은 아들 셋과 딸 셋을 낳았는데,
曰觀夏縣監。왈관하현감。관하(觀夏)는 현감이고,
曰泰夏幼學。왈태하유학。태하(泰夏)는 유학이고,
曰鼎夏生員。왈정하생원。승하(昇夏)는 생원이다.
女。녀。딸들은
尹趾美,李松齡,洪葳。윤지미,이송령,홍위。윤지미(尹趾美), 이송령(李松齡), 홍위(洪葳)에게 출가하였다.
時亮生三男五女。시량생삼남오녀。 유시량(柳時亮)은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낳았는데,
男某某。남모모。아들은 모모(某某)이고
女某某。여모모。딸은 모모에게 출가하였다.
泰夏奉其慈夫人命致辭曰。태하봉기자부인명치사왈。
태하(李梣 子)가 와서 그 모부인(김지남의 딸. 이침의 부인. 태하의 모친)에게 받은 명을 전하기를,
先君子己出唯女。선군자기출유녀。“선친께서는 자신의 소생으로 딸만 두셨다.
我以女子子故。아이여자자고。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不能盡子職者多。불능진자직자다。자식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많은데,
今又不能表白先人事于麗牲石。금우불능표백선인사우려생석。지금 또 선친의 일을 비석에 드러내지 못한다면
重我不孝。중아불효。거듭 불효를 짓는 것이다.
汝其往請于當世之能言是者。여기왕청우당세지능언시자。너는 당세의 문장가를 찾아가 청하여라.” 라고 하였다.
不佞跽而爲禮。불녕기이위례。내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니
實戚戚于中。실척척우중。실로 마음속에 슬픔이 일어서이다.
遂檃括家狀序次焉。수은괄가장서차언。마침내 가장(家狀)을 참고하여 묘지명을 짓는다.
仍念崇禎己巳。잉념숭정기사。이어 생각건대, 숭정(崇禎) 기사년(1629, 인조7)에
不佞承命試嶺左士。불녕승명시령좌사。내가 명을 받들어 경상 좌도로 선비들을 시취(試取)하러 갈 적에
路過淸風郡。로과청풍군。청풍군(淸風郡)을 지났는데,
公方爲守。공방위수。공이 당시 그곳 수령으로 있었다.
侍我於凝淸閣。시아어응청각。응청각(凝淸閣)에서 나를 접대할 적에
絶不以先後輩致異。절불이선후배치이。전혀 나를 후배로 대하지 않았으며,
吐露肝膽。娓娓譚說。토로간담。미미담설。진심을 토로하고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不出文字外。불출문자외。문자 이외의 말은 하지 않았다.
曷鼻高頰。갈비고협。또 코끝이 위로 들렸고 광대뼈가 솟았으며
䨥眸炯炯。형모형형。두 눈동자가 형형하였으니
不見衰朽薾然狀。불견쇠후이연상。노쇠하고 기운 없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於是益歎公樹惇而文。七十年猶一日也。어시익탄공수돈이문。칠십년유일일야。
이에 70년간 한결같은 공의 돈후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에 나는 더욱 감탄하였다.
公所著詩文千有餘篇。공소저시문천유여편。공이 지은 시문 천여 편과
內學小史小說左史節要國語品節等書藏于家。내학소사소설좌사절요국어품절등서장우가。
내학(內學), 소사(小史), 소설(小說), 좌사절요(左史節要), 국어품절(國語品節) 등의 글이 집에 보관되어 있는데
小史失兵燹云。소사실병선운。소사(小史)는 병화(兵燹)에 잃었다고 한다.
銘曰。명왈。명(銘)은 다음과 같다.
於龍溪公。어용계공。아, 용계공은
墮地汗血。타지한혈。인간 세상에 태어난 천리마라네
未撫舞象。미무무상。성동(成童)이 되기도 전에
文鋒鯢掣。문봉예체。문장의 기세가 고래를 잡을 듯했네
摘髭科第。적자과제。수월하게 과거에 급제하니
人莫敢埒。인막감랄。사람들이 감히 맞서지 못하였네
左右史苑。좌우사원。예문관에서 일할 적엔
簪筆朅朅。잠필걸걸。굳건하게 붓을 잡았네
東接蠻价。동접만개。동쪽에서 왜인의 사신을 접대하고
西檢版設。서검판설。서쪽에서 토목 공사를 검찰하였네
伸禮摭實。신예척실。예를 펴고 사실을 밝혔으니
脫循途轍。탈순도철。앞사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았네
柏府梧界。백부오계。사헌부에 우뚝하게 서서는
忍不柔舌。인불유설。차마 혀를 부드럽게 하지 않았네
歷宣入昏。력선입혼。선조(宣祖)를 거쳐 혼조에서도
亦無虧節。역무휴절。절개를 무너뜨림이 없었네
癸丑袖草。계축수초。계축년엔 글을 올려
姦訛角折。간와각절。간악한 자의 기세를 꺾었네
授節嶺南。수절영남。경상 감사에 제수되어
蒸回墊隉。증회점얼。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했다네
官卒禮議。관졸예의。예조 참의로 관직을 마치고
踰耆望耋。유기망질。육순 넘어 팔순 바라보는(望耋) 수를 누렸네
是謂福持。시위복지。이를 일러 복을 지켰다 하니
世所艶說。세소염설。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바라네
維后嗣人。유후사인。공의 후손은
毋芸滅裂。무운멸裂。지리멸렬(支離滅裂) 하지 않으리라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2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 (공역) | 2015
[주-D001] 감사 …… 묘지명 : 이 글은 김지남(金止男, 1559~1631)에 대한 묘지명이다. 김지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정(子定), 호는 용계(龍溪)이다.
[주-D002] 안수(晏殊)와 양억(楊億) : 안수(991~1055)와 양억(974~1020)은 모두 북송(北宋) 때 사람이다. 안수는 송나라 최초의 동자(童子)를 위한 특별시험에 합격하여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의 자격을 받았다. 양억은 문재(文才)가 뛰어나 11살 때 태종이 불러 시부(詩賦)로 시험해보고 비서성 정자(秘書省正字)에 임명하였다.
[주-D003] 학제(學製) : 성균관 대사성이 매년 사계절에 사학(四學)의 유생에게 보이던 시험이다. 제술(製術)과 강서(講書)를 시험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는 바로 생진시(生進試) 복시(覆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주-D004] 주역 정괘(鼎卦)의 복속(覆餗)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에 “솥이 발이 부러져서 공사에게 바칠 음식을 엎었으니, 그 얼굴이 무안하여 붉어짐이니 흉하도다.〔鼎折足, 覆公餗, 其形渥, 凶.〕”라고 하였다.
[주-D005] 성균관에 …… 여겼다 : 승문원에 분관되지 못하고 성균관에 분관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문과 급제자들은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에 분관되는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승문원에 분관된다. 한국문집총간 11집에 수록된 《용계유고(龍溪遺稿)》 부록〈통정대부……김공 묘갈명(通政大夫……金公墓碣銘)》에는, “이 해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으로 낮추어 차임되었는데, 이는 편당 때문이었다.”라고 되어 있다.
[주-D006] 조헌(趙憲)의 항의신편(抗義新編) : 조헌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금산(錦山)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항의신편》은 조헌의 유문(遺文) 및 행록(行錄)을 수록한 책으로, 광해군 때에 안방준(安邦俊)이 편찬하여 1625년(인조3)에 간행되었다.
[주-D007] 행조(行朝) : 행재소(行在所)의 조정을 말한다. 행재소는 임금이 멀리 거둥하여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이다.
[주-D008] 명을 …… 못했는데 : 《용계유고(龍溪遺稿)》 부록 〈통정대부……김공 묘갈명(通政大夫……金公墓碣銘)》에는, “유영경(柳永慶)이 그 일을 주관하여 부풀려 보고한 일이 많았는데, 공이 사실대로 보고하자 매우 앙심을 품었다.”라고 되어 있다.
[주-D009]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와 수찬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 기록이다.
[주-D010] 왕릉을 파헤친 적 : 임진왜란 당시 선릉(宣陵 성종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의 능)을 파헤친 자를 말한다.
[주-D011] 옥당(玉堂)에 …… 청하였다 : 《광해군일기》 1년 3월 19일에 환경전(歡慶殿)을 짓지 말도록 청하는 김지남의 차자가 실려 있다.
[주-D012] 차자를 …… 청하였다 : 《광해군일기》 2년 3월 5일에 공빈(恭嬪) 추숭에 반대하는 김지남의 차자가 실려 있다.
[주-D013] 차자를 …… 청하였다 : 《광해군일기》 2년 3월 16일에 여악(女樂) 설치에 반대하는 김지남의 차자가 실려 있다.
[주-D014] 하사받은 …… 깨달았는데 : 영봉인(穎封人)은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신하 영고숙(穎考叔)을 말한다. 장공이 아우 공숙단(共叔段)의 반역 때문에 그 어머니를 성영(城穎)에 안치하고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영고숙이 장공이 하사한 음식을 먹으면서 고깃국은 밀쳐 두고 먹지 않았는데, 장공이 그 까닭을 묻자, “소인에게 어미가 있는데 소인의 음식은 맛보았지만 임금님의 음식은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소인의 어미에게 주어도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은 들은 장공은 잘못을 뉘우치고 어머니와 화해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元年》
[주-D015] 군자(君子)가 …… 칭찬하였습니다 :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원년에 실려 있는 군자의 논평에, “영고숙은 순효(純孝)이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성을 미루어 넓혀 장공에게 영향을 끼쳤으니, 《시경》의 ‘효자의 효심은 끝이 없어서 길이 너의 동류에게 영향을 끼친다.〔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D016] 측천무후(則天武后)와 …… 의논 : 호안국(胡安國)이 측천무후를 논하면서 말하기를, “대신이 역적의 우두머리를 태묘에서 수죄하고 참형에 처하되 중종(中宗)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주-D017] 다섯 왕 : 당(唐)나라 평양군왕(平陽郡王) 경휘(敬暉), 부양군왕(扶陽郡王) 환언범(桓彦範), 한양군왕(漢陽郡王) 장간지(張柬之), 남양군왕(南陽郡王) 원서기(袁恕己), 박릉군왕(博陵郡王) 최원위(崔元暐)를 가리킨다. 이들은 무후를 압박하여 중종(中宗)을 복위시키고 국호를 회복한 공으로 모두 군왕에 봉해졌다.
[주-D018] 두 장씨(張氏) : 측천무후에게 총애 받던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형제를 말한다.
[주-D019] 옥당에서 …… 청하니 : 《광해군일기》 5년 5월 26일 기사에 김지남은 출사(出仕)시키고 정조와 윤인은 체직시키도록 청하는 홍문관의 차자가 실려 있다.
[주-D020] 작고한 …… 논의하였는데 : 《광해군일기》 5년 10월 10일 기사에 이덕형(李德馨)의 관작을 회복하라는 광해군의 전교(傳敎)가 실려 있고, 10월 13일 기사에 그 명을 도로 거두라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사가 실려 있다.
[주-D021] 계축년 국옥(鞫獄) : 계축옥사를 말한다. 1613년(광해군5)에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옥사이다.
[주-D022] 정청(庭請) : 세자나 의정(議政)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중대 사건을 계품(啓稟)하고 하교를 기다리는 일을 말한다.
[주-D023] 병진년에 내린 자급(資級) : 이전에 계축옥사의 공으로 가자되었던 자급을 말한다.
[주-D024] 여씨향약(呂氏鄕約) : 송(宋)나라 때 남전 여씨(藍田呂氏)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맺은 자치 규약이다. 《小學 善行》
[주-D025] 바로 …… 급제하였고 : 이정귀(李廷龜)는 1590년(선조23)에 증광시 문과(增廣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김지남은 1591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주-D026] 앞서가는 …… 쳐다보았으니 :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부자께서 걸으면 저도 걷고 부자께서 빠르게 걸으면 저도 빠르게 걸으며 부자께서 뛰면 저도 뛰어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부자께서 먼지도 나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리면 저는 그저 멍하니 뒤에 처져서 눈만 휘둥그레 뜨고 바라볼 뿐입니다.”라는 안연(顔淵)의 말이 있다.
[주-D027] 완석(完席) : 사헌부 관원들이 좌기(坐起)할 때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풍헌(風憲)에 관계되는 일, 탄핵(彈劾)하는 일, 배직(拜職)한 사람의 서경(署經)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는 자리이다. 완의석(完議席) 또는 원의석(圓議席)이라고도 한다.
[주-D028] 예를 …… 밝혔으니 : 예를 폈다는 것은 부산에 접위관(接慰官)으로 가서 귤지정(橘智正)에게 재배례를 받은 것을 말하며, 사실에 근거했다는 것은 해주(海州) 공사를 검찰하면서 유영경(柳永慶)이 허위로 꾸민 일을 사실대로 보고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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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趙絅)
출생 연도1586년(선조 19) ~사망 연도1669년(현종 10)
조선시대 대제학, 형조판서, 회양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 정충장군(折衝將軍) 조수곤(趙壽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좌랑 조현(趙玹)이고, 아버지는 봉사(奉事) 조익남(趙翼男)이다. 어머니는 증좌승지 유개(柳愷)의 딸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대과를 단념,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현감·경상도사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형조좌랑·목천현감 등을 지냈다.
1626년(인조 4) 정시문과에 장원, 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에 파천하고 조정에서 화전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에 대하여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이어 이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사간으로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듬해 집의로 일본에 청병하여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응교(應敎)·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1643년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기행문을 저술하였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대제학, 이조·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1650년 청나라가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 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를 지내고 포천에 은퇴하였다. 그 뒤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에 등용,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661년 판중추부사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숙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저서로 『용주집』 23권 12책과 『동사록(東槎錄)』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인조실록(仁祖實錄)』,『효종실록(孝宗實錄)』,『현종실록(顯宗實錄)』,『국조방목(國朝榜目)』『기언(記言)』,『용주유고(龍洲遺稿)』,『성호문집(星湖文集)』,<한국역대인물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