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장 뜻밖의 구원(救援)
①
"독종, 또 시작해 볼까?"
알몸으로 천장에 연결된 쇠사슬에 두 손목이 묶인 채 매달려 있는 관운빈을 툭 건드리며 대머리 괴인이 뇌까렸다.
석실 안에는 왜소한 체구에 머리만 기형적으로 큰 괴이한 몰골의 독두괴인(禿頭怪人)과 마군자 사마을지가 우뚝 서 있었다.
"......."
관운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열흘 동안 그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제 또 어떤 고통이 가해질지 암담하기만 했다.
몇 번이고 혀를 물고 자진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동사군도에서의 처절했던 유배생활을 떠올리고는 고비를 넘기곤 했다.
그는 천외천(天外天)의 한 뇌옥(牢獄)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다.
독두괴인은 고문의 달인으로 그의 손에 떨어진 자 치고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불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삼천 종의 고문술에 달통한 자로 인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작자였다.
그러나 그도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벌써 열흘이 넘도록 그가 알고 있는 수백 종의 고문을 가했으나 관운빈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흐흐, 오늘은 좀 색다른 방법으로 즐겨볼까?"
독두괴인은 만신창이가 된 관운빈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우선 네놈을 고자로 만들어주마. 어때, 불만이 있으면 말해 봐라. 혹시 아느냐? 다른 방법으로 다루어 줄지."
"......."
묵묵부답.
관운빈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독두괴인은 혀를 차며 석실 중앙에 놓여있는 화로로 다가가 벌겋게 달구어진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는 불꽃이 이글거리는 단도를 움켜쥔 채 돌아왔다.
"클클! 이제 곧 고자가 될 텐데 마지막으로 네 물건을 써볼 생각은 없느냐?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항아(姮娥) 못지않은 계집과 신방을 꾸며주마. 어떠냐?"
관운빈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크ㅋ, 앞길이 구만 리나 되는 청춘을 뭉개려니 어째 마음이 편치 않구나."
독두괴인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슬며시 관운빈의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관운빈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의 사타구니에 매달린 양물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양물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던 독두괴인은 벌겋게 달구어진 단도를 가져갔다.
애써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던 관운빈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독두괴인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단도를 가져갔다. 막 단도가 닿을 찰라, 사마을지가 손을 저었다.
"멈춰라. 내가 직접 취조해 볼 테니 너는 나가 있거라."
"옛?"
독두괴인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나가 있으라고 했다."
"예. 알겠습니다요."
독두괴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곧 철창문을 열고 사라졌다. 사마을지는 혀를 차며 관운빈을 향해 말했다.
"이보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고집은 자네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네. 아무리 강인한 작자라도 결국은 꺾이게 되있네. 그러니 이제 그만 입을 열게. 태화천의 사대천왕(四大天王)을 비롯한 무사들은 모두 어디로 잠적했는가? 그것만 말하면 자네의 고생도 끝일세."
사마을지의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는 재차 자비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당시 그들이 변방에서 이족들의 습격을 받아 몰살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나는 믿지 않네. 지난 십여 년간 우리들은 집요하게 그들의 행적을 추적했지. 그 결과 몇 가지 비사를 알아내긴 했지."
관운빈은 눈을 떴다. 그는 힘없는 눈길로 사마을지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엇을 알아냈소?"
"말해 주지. 우리는 예상보다 꽤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네. 우선 태화천주에 관한 것은 그가 황명(皇命)에 의해 처단되었다는 것이지. 그리고 자네는 동사군도에 유배되었지."
"그걸 어떻게......?"
"허허, 그야 당연한 일이지. 자네 부친이 대역죄의 누명을 쓰게 된 것이 바로 우리의 의도라면 믿어지나?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황실을 통해 대계(大計)를 꾸며왔지. 자네 부친이 함정에 걸린 것은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된 것에 불과하다네."
"그럴 수가......."
관운빈은 넋을 잃었다. 만일 묶여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벌써 발작했을 것이다. 무림의 위대한 하늘이었던 태화천의 멸망, 그것이 바로 천외천의 음모 때문이었다니!
하지만 지금 그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사마을지의 말이 이어졌다.
"모든 것은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됐네. 태화천주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됐지. 다만 뜻밖인 것은 그가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순순히 목을 내밀었다는 점이었지만. 하긴 생각해 보면 대인대의(大人大義)한 그의 평소 성품으로 볼 때 그럴 만한 일이긴 했네."
"으으......."
관운빈의 이마에 심줄이 툭툭 불거졌다.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기혈이 역류한 탓이었다.
"한데 궁금한 건 태화천의 무사들의 행적일세. 그들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 말일세. 물론 태화천주가 죽었으니 낙담하여 뿔뿔이 흩어졌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 석연찮은 데가 있어서 말이네."
사마을지는 관운빈을 가운데 두고 뒷짐진 채 서성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에게 고문을 가해가면서 그들의 행적을 캐묻는 것도 그리 큰 의미는 없는 일이네. 왜냐하면 그들이 다시 나타난다 해도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네. 다만 우리가 이러는 것은 자네가 태화천의 유일한 후손이기 때문이네."
"......?"
관운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지 않는가? 본천이 왜 자넬 그토록 미워하는지?"
사마을지는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내처 말했다.
"그것은 태화천이 파천황교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네. 말하자면 본천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네."
관운빈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럼... 천외천은 파천황교의 또다른 변신이란 말인가?'
사마을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파천황교는 본천의 전신이지. 그러니 어찌 자넬 내버려둘 수 있겠나? 이것도 다 운명이려니 여기는 게 좋을 걸세."
"그렇군. 파천황교... 이제야 의문이 풀렸군."
관운빈은 낮게 중얼거렸다.
"허허, 하지만 주군께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하셨네. 날이 밝는 대로 천외천의 동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네를 화형(火刑) 시키라고 명을 내리셨네. 그러니 오늘이 자네의 마지막 밤이 되는 셈이네."
관운빈의 볼이 씰룩거렸다. 어금니를 악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본천의 행보를 막을 수 없네. 설령 신이라 해도 어쩔 수 없게 됐네. 이 점은 자네도 인정해야 할 걸세. 만일 부인한다면 비참한 최후가 있을 뿐이지. 자네도 만난 적이 있는 살막주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지."
"뭣이? 그럼 그분도 네놈들에게 피살됐단 말이냐?"
관운빈의 노성이 석실을 울렸다.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네."
사마을지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그러나 관운빈은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으으, 이럴 수가! 그분은 당신과의 우의 때문에 내키지 않는 청부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당신은 그분을 죽음으로 몰고 갔단 말이오? 그러고도 당신이 한림삼수의 일인이며 그분의 벗이라 말할 수 있단 말이오? 흐흐... 그야말로 가증스런 일이군!"
사마을지는 돌아섰다. 그의 등이 가는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돌아서며 하나의 비녀를 들어 보였다. 그것은 관운빈이 지니고 있던 물건이었다.
"사내인 자네가 여인들이나 쓰는 옥잠을 지니고 있다니, 이것의 내력을 말해줄 수 있나?"
관운빈은 흠칫했다.
옥잠은 연꽃 세 송이가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으로, 과거 해적들에게 탈취당했던 선박에서 모용부인을 구해주고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정인으로부터 받은 정표다. 더러운 손을 썩 떼지 못하겠느냐?"
물론 모용부인은 그의 정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기가 싫어 그리 말했을 뿐이었다.
마군자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옥잠을 소매에 넣고는 돌아섰다.
그는 철창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고문하지 말라고 이르겠네. 내일의 화형에 대비해 마음의 정리를 해두는 게 좋을 걸세."
"흥!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관운빈의 경멸에 찬 말에 사마을지는 한숨을 쉬며 사라졌다.
②
천외천의 주군, 즉 천주(天主)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부인이 있었다. 그들은 정실과 소실로 구분되지 않은 채 모두 동등한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들에게는 각자 누각이 하나씩 배정되어 있었는데 누각의 이름에 따라 신분도 구분되고 있었다.
누각은 금(金), 은(銀), 옥(玉), 청(靑), 그리고 홍루(紅樓)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옥루부인(玉樓夫人).
그녀는 천외천주의 세번째 부인으로 오부인 중에서도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늦게 천외천주의 부인이 된 홍루부인(紅樓夫人)과 더불어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천외천의 후계자 싸움에서 한 발짝 물러난 채 고고한 기품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외천의 모든 이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었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나요? 군사?"
좀처럼 발길이 뜸하던 마군자 사마을지가 예고도 없이 옥루를 방문했을 때부터 그녀는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가 옥잠을 내놓자 그만 안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그 옥잠이야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의 눈을 뜨게 해주었던, 사나이에게 주었던 정표(情表)가 아니던가?
그와 작별하던 날 옥잠을 건네며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오늘날까지 그 사내의 모습은 가슴속에서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사마을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옥루부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직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내일 화형에 처해질 죄인의 소지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그럼 이 옥잠의 주인이... 바로 그 죄인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아!"
옥루부인은 허물어지듯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녀는 잠시 이성을 잃은 듯했다.
그녀는 섬섬옥수로 이마를 짚은 채 고통스런 번뇌에 빠져들었다. 사마을지는 침중한 눈빛으로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잠깐만... 군사."
옥루부인은 황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 죄인의 이름을 혹... 알고 계시나요?"
"관운빈이라 합니다."
"아!"
옥루부인은 절망에 찬 탄식을 토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사마을지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옥잠에 대해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소신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인께서 오 년 전 이곳에 오시던 날 머리에 꽂고 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온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군사께서는 저의 참모습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군요."
모용부인의 눈에는 습막이 차올랐다.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사마을지를 한동안 바라보다 결심한 듯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군사께는 무슨 말씀이든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여쭙겠어요. 그분을 구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 방법을 일러주세요."
그녀의 처연한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사마을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갈등이 어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한숨을 쉰 후 입을 열었다.
"그는 지하뇌옥에 투옥되어 있습니다. 현재로써는 주군의 윤허 없이는 그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소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게다가 뇌옥에는 백이십 명의 일급고수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어 무력으로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군사, 불가능하다고만 말씀하시지 마세요. 제발 방법을 일러 주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하지 않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이든 저에게 일러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마을지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 후 그는 탄식하며 말했다.
"부인, 방법은 하나 있지만... 그것은......."
"말씀해 주세요. 제발."
"으음, 한 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뇌옥의 옥장(獄長)인 패군보(貝君保)란 자는... 지독한 색골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심이 서시면 소신을 불러 주십시오."
"......!"
모용부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사마을지는 깊이 읍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나간 후에도 모용부인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사마을지가 들려준 방법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뭘 어찌 하란 말씀이신가? 옥장이 색골이라니... 그렇다면.......'
모용부인의 옥용이 한순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그녀는 두 손으로 옥용을 감쌌다.
③
뇌옥의 옥장 패군보는 느닷없는 옥루부인의 부름에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곧 입이 벌어졌다. 무슨 일로 찾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아는 한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옥루부인을 드디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로 흥이 나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옥루부인은 그의 환상의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아온 어떤 여인도 옥루부인을 따라가지 못했다. 평소에 여색에 심취해 있는 그로서는 그야말로 이상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패군보는 급히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뇌옥을 나왔다. 그의 손에는 옥루부인이 직접 써 보낸 작은 지편(紙片)이 들려있었다.
'하필 이런 곳에서 날 찾으실까? 화장터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계신가. 그렇다면야 나만큼 상세하게 알고 있는 놈은 없지.'
패군보는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는 지금 옥사한 죄인들을 처리하는 화장터 입구에 와 있었다.
삼경 무렵이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패옥장, 여기예요."
문득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여인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시신을 화장시킬 때 쓰이는 장작들을 쌓아두는 헛간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곳의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패군보의 가슴이 공연히 두근거렸다. 그는 누가 볼까봐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재빨리 헛간 안으로 들어갔다.
"고마워요, 이렇게 나와주셔서."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긋나긋한 여인의 음성이 그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바로 옆에서 유등의 심지를 올리는 선녀같이 아름다운 옥루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옥루부인, 소인 패군보. 인사드립니다."
커다란 대머리가 깊이 꺾여졌다.
"아이, 패옥장. 이곳엔 우리 둘만 있어요. 그러니 격식은 치우세요."
살짝 눈을 흘기며 가느다란 세류요를 비틀어대는 옥루부인의 자태에 그는 혼이 반쯤 나가버렸다. 아니, 옥루부인의 옷차림을 본 그는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고 말았다.
놀랍게도 옥루부인은 속살이 은은히 비쳐보이는 망사의만을 걸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망사의 안쪽의 분홍빛 살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였다. 그녀는 속에 젖가리개와 한 장의 고의만을 걸치고 있어 늘씬한 팔과 다리가 유등빛을 받아 고스란히 비쳐 보이고 있었다.
패군보는 그만 숨이 턱 막혔다.
'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패옥장, 이쪽으로 앉으세요. 제가 술을 준비했으니 한잔 받으세요."
그러고 보니 헛간 바닥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금침이 한 겹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술병과 잔, 간소한 안주 등속이 차려져 있었다.
패군보는 당혹스러웠다. 감히 고개를 들어 마주볼 수조차 없는 지엄한 신분의 옥루부인이 한밤중에 망사의만을 걸치고 자신에게 술을 따르겠다니?
도저히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군보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왜... 왜 이러시는지? 소인은 겁이 납니다요."
옥루부인은 사뿐히 다가와 그의 한쪽 팔을 잡아 끌었다.
"패옥장의 용맹함은 천외천의 모든 사람이 다 알아준다 하던데 오늘 직접 보니 소문이 과장된 것 같군요."
"아닙니다, 그건.... 단지... 소인은 옥루부인께서 왜 이러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입니다."
옥루부인에게 졸장부 취급을 받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패군보였다.
"그럼 이리 앉으셔요. 제가 왜 패옥장을 뵙자고 했는지 말씀 드릴 테니까요."
어깨에 뭉클한 젖가슴을 갖다붙이며 팔을 끌어당기니 패군보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금침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옥루부인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채 술을 따랐다.
일이 이쯤 되자 패군보는 짐짓 호방한 동작으로 술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그는 술맛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곁에 앉아 있는 옥루부인의 체향 때문이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왜 소인을 부르셨는지?"
"아이,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저에게도 한잔 주셔야지요."
팔을 가볍게 꼬집으며 콧소리로 보채는 옥루부인의 교태에 패군보는 황급히 두 손을 들어 공손히 술을 따랐다. 옥루부인은 요염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다시 패군보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도 술잔에 술을 따랐다. 연후 그녀는 갑작스레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놀렸다.
"실은 패옥장께 어려운 청을 드리기 위해 모셨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소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역시 패옥장은 듣던 대로 대범하고 자애스런 분이군요."
"아니올시다. 소인은 결코 아무에게나 호의를 베풀지는 않습니다. 헤헤헤."
거푸 서너 잔의 술을 비워낸 패군보는 이제 어줍잖은 농담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패옥장만 믿고 말씀드리겠어요. 지금 지하뇌옥에 감금되어 있는 관운빈이란 죄인을 아시지요?"
"예, 물론입지요. 그놈은 제가 직접 취조까지 했는 걸입쇼. 헌데, 어찌 그놈을 아십니까요?"
"그 사람은 저와 인척간이에요. 지하뇌옥을 드나드는 옥졸들의 입을 통해 그 사람이 지하뇌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이렇게 패옥장을 찾은 거예요."
"아, 그러셨군요."
패군보는 이제서야 모든 것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되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럼 옥루부인이 할 청이란 무엇일까? 내일이면 불귀의 객이 될 인척을 위해서.
그는 가능한 한 청을 들어주리라 마음먹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속에는 무엄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패옥장,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꼭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네? 패옥장."
속눈썹을 눈물로 적신 채 자신을 올려다보며 호소하는 옥루부인의 애처로운 모습이 더욱 그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는 짐짓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쉽지 않은 일이옵니다. 더구나 그 죄인은 다른 잡범들과 달리 천주께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중죄인이옵니다. 하지만... 꼭 보셔야겠다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긴 합니다만."
패군보는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 옥루부인을 바라보았다. 음흉한 그의 눈빛이 자신의 몸을 훑어 내려가자 옥루부인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러나 지금이 마지막 고비라 판단한 그녀는 입술을 잘근 물며 그의 품에 상체를 넌지시 기댔다.
"고마워요, 패옥장.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옥루부인의 야들야들한 팔이 패군보의 목을 뱀처럼 휘감았다. 동시에 그녀의 꽃잎 같은 입술이 그의 뺨을 간질렀다.
패군보는 처음에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슬며시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은 먼저 옥루부인의 둔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옥루부인이 거절하는 기색이 없자 그는 대담하게 망사의를 들추고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그럼... 패옥장. 지금 그 사람을 이리로 데려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옥루부인은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그렇게 말했다.
"예? 이리 데려 오라굽쇼?"
패군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 청이라면 소인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소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부인을 모시고 뇌옥으로 들어가 그자와 한번 상면케 하는 것 뿐입니다요."
옥루부인은 급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패군보는 뭉클한 그녀의 젖가슴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아이, 패옥장. 그리했다가는 제가 지하뇌옥을 사사로이 출입했다는 사실이 소문날 테고 그 소문을 천주께서 들으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거예요. 패옥장도 무사치는 못할 거구요. 그러니 번거로우시더라도 잠시만 이곳으로 데려오세요. 네?"
"......."
패군보의 눈알이 디룩디룩 굴렀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자신도 크게 경칠 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옥루부인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망사의를 뚫고 튀어나올 듯이 풍만한 젖가슴이 어른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망사의를 찢어버리고 터질 듯한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어버리고 싶기만 했다.
그는 눈자위를 경련하며 말했다.
"부인의 딱한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자를 밖으로 끌어내오는 것은 소인도 능력 밖이옵니다. 죄송합니다."
패군보는 이를 악물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유혹이 강하다 해도 전지전능한 천외천의 주군을 떠올리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
옥루부인의 얼굴이 밀납처럼 창백해졌다.
그런 옥루부인을 향해 패군보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곤 몸을 돌렸다. 망연자실해 있던 옥루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았다.
"알겠어요, 패옥장. 제가 너무 무리한 청을 드린 것 같군요. 이제 그 말씀은 그만 하기로 하고 우리 남은 술이나 비우기로 해요. 사실 이런 일이 아니었다 해도 한 번쯤 패옥장을 은밀히 뵙고 싶었어요."
"예?"
패군보는 어리둥절해졌다.
"워낙... 그 방면에 강한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과연 어떨까 하고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얼굴이 발개지면서 어렵사리 말을 하는 옥루부인의 모습에 패군보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기야 내 절륜한 정력은 알만한 놈들은 다 아는 일이지. 흐흐, 그 소문이 옥루에까지 퍼졌던 모양이군. 하지만 설마하니 옥루부인이 나 같은 놈하고......?'
패군보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옥루부인은 얼른 그를 잡아 당겨 다시 자리에 앉힌 후 술잔을 그의 입술에 갖다댔다.
"어서 마셔요, 네?"
엉겁결에 술을 들이킨 패군보는 내심 부르짖었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돼! 어서 이곳을 나가야 해!'
이때 다시 한 잔의 술이 다가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것마저 마신 후 내심 각오를 다졌다. 이젠 일어서리라고.
"어머! 이런......."
옥루부인이 뾰족한 소리를 냈다. 마시던 술잔이 기울어졌는지 술이 그녀의 가슴에 엎질러졌던 것이다. 패군보는 그녀를 바라보다 그만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옥루부인이 술을 닦는다고 앞섶을 풀어헤친 것이었다. 그 바람에 눈처럼 흰 속살이 노출되었다.
'헉!'
패군보는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손수건으로 가슴의 술을 닦는답시고 젖가리개마저 살짝 젖힌 바람에 유등빛 아래 두 쪽의 풍만한 젖가슴이 태반이나 드러난 것이었다.
옥루부인은 달짝지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술에 젖어 영 불편하네요. 좀 벗어도 되겠죠?"
패군보는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되구 말굽쇼. 편한 대로 하십시오. 소인은 좋습니다요."
패군보는 엉겁결에 그렇게 말한 후 시선을 깔고 말았다. 마주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게다가 주군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책이 일어난 것이었다.
옥루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망사의를 젖혔다. 망사의가 허리 아래로 스르르 흘러 내려가며 눈부시게 흰 아랫배까지 드러났다.
"패옥장, 아까는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사실 관운빈이란 죄인은 인척이 아니라 과거의 제 정인이었답니다."
"허! 그, 그렇습니까?"
뜻밖의 고백에 패군보는 고개를 들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자위가 경련했다. 옥루부인이 상체를 완전히 벗고 있었다. 터질 듯이 부푼 젖가슴을 묶어두고 있는 가느다란 젖가리개를 제외하곤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천주의 품에 안기기 전에 이 몸은... 그분과 깊은 사이였답니다. 그분은 저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해주었어요. 특히 여인으로서의 기쁨이 무엇인지까지......."
옥루부인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코먹은 음성으로 말했다. 동시에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패군보의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하지만 천주는 절 만족시켜 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잡혀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전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 이런 심정 패옥장은 아실 거예요. 일단 방사의 기쁨을 알게 되면... 음......."
옥루부인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손은 한껏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젖가슴을 옭아매고 있는 한 장의 천조차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그녀는 눈을 초생달처럼 가늘게 뜨며 물었다.
"패옥장은... 절 만족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
패군보는 가슴을 벌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다 갑자기 손을 뻗었다.
"부인!"
와락!
패군보의 손이 옥루부인을 껴안았다. 참고 참았던 이성의 둑이 와르르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북!
하는 소리와 함께 옥루부인의 가슴을 옭죄고 있던 젖가리개가 찢겨 나갔다. 하늘을 찌를 듯이 팽팽한 두 개의 젖가슴이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패군보의 동작은 거칠었다.
그는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옥루부인의 젖가슴을 움켜쥐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자신의 의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흐응, 죽은 자는 궤짝에 실려 나올 수 있다고 들었어요. 부디 그 사람을 죽은 자로 위장시켜서 데려오세요. 난... 그 사람의 환상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을 잠깐만 볼 수 있다면 저도 편한 마음으로 패옥장과 운우지락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제발 그리해 주세요."
막 바지를 벗으려다 말고 패군보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그의 욕망은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빨리 욕망을 터뜨리고 싶었다.
그의 눈알이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다 옥루부인의 젖가슴에 눈이 멎었다. 만지기만 해도 터질 듯한 젖가슴이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탄력이 넘치는 젖가슴, 이미 남자를 알고 있는 젖가슴이었다. 정상에 얹혀 있는 두 개의 유실(乳實)은 가늘게 떨리며 남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패군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옥루부인이 일러준 대로 한다면 그자를 데리고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만에 하나 사실이 발각나면 그의 목은 성치 않을 것이다.
옥루부인은 더욱 자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받쳐들어 보이며 허리를 흔들어댔다.
"어서 다녀오세요. 여기서 한 걸음도 가지 않고 패옥장을 기다릴 테니까요. 어서요."
"으으......."
패군보는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발정난 짐승의 그것과 흡사한 신음이었다.
"으아아아아!"
마침내 그는 맹수의 포효와 같은 소리를 내며 밖으로 달려나가고 말았다.
"아아!"
옥루부인은 참고 참았던 탄식을 토해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한 줌의 힘도 남아 있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온갖 수치스러운 교태를 떨었음에도 그녀는 치욕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을 행했을 뿐이었다. 만에 하나 필요하다면 패군보에게 몸을 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녀의 결심이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남은 것은 하늘의 뜻만 기다릴 뿐.......'
옥루부인은 무릎을 모아 끌어안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④
패군보는 반 시진도 안되어 궤짝을 들쳐업은 채 헛간으로 돌아왔다.
쿵!
그는 궤짝을 바닥에 내던진 후 충혈된 눈으로 옥루부인에게 다가왔다. 옥루부인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젖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분명... 그 사람이지요?"
"확인해 보시오."
패군보의 말투가 달라져 있었다. 옥루부인은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궤짝 뚜껑을 열어젖혔다.
사실이었다.
관운빈은 궤짝 속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뚜껑이 열리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혈도가 제압된 데다 지난 열흘 동안 모진 혹형을 당해 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었다.
옥루부인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백공자님!"
"......?"
관운빈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유등빛을 받은 데다 달라진 주변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모용부인?"
마침내 그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래요, 저예요."
옥루부인은 황급히 그를 끌어낸 후 와락 껴안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오? 부인이 어떻게 이곳에......?"
모용부인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펑펑 쏟았다.
이때였다.
"옥루부인, 이제 약조를 지킬 차례요."
뒤에서 음침한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옥루부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패군보는 옷을 벗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수고했다, 패군보."
문득 등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와 그는 머리털이 쭈뼛해졌다.
"누구... 끅!"
돌아보려는 순간 뒷통수 옥침혈이 따끔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빙글 돌아갔다.
쿠웅!
마치 썩은 나무등걸인 양 그는 둔중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너무나 허무하게 황천길로 직행해 버린 것이다.
사마을지가 발끝으로 그의 시신을 굴려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한편,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관운빈은 그를 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위선자,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옥루부인은 황급히 말했다.
"백공자님, 무슨 말씀이세요? 이분은 백공자님을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어요."
"......?"
관운빈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옥루부인과 사마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마을지는 가볍게 포권했다.
"소신은 밖에서 동정을 살피겠습니다.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사라졌다. 옥루부인은 문득 얼굴을 붉혔다. 관운빈이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옷을......."
그녀는 미리 준비한 의복을 내밀었다. 관운빈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오. 하지만 옷 입을 힘도 없구려."
"그럼 제가......."
옥루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잠시 후 관운빈은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부인, 대체 어찌된 일이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답답하구려. 말씀해 주시오."
"미안해요. 모든 걸 말씀 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너무나 다급해서요.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랍니다."
이때 사마을지가 다시 들어왔다. 그는 허락도 받지 않고 관운빈을 등에 업었다. 막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걸음을 멈추며 옥루부인을 돌아보았다.
"부인,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나가는 건 불가능해집니다."
모용부인의 창백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서 가셔요. 제 걱정은 마시고, 전...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마군자는 얼굴에 흑색의 몽면을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갔다. 관운빈은 마음이 답답해 뭐라 물어보려 했으나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사마을지가 어느새 그의 아혈(啞穴)을 짚어버린 것이다.
사마을지는 그를 업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옥루부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안녕히 가세요, 공자님. 부디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있기만을 간절히 빌겠어요. 사랑합니다. 공자님......."
쏴아아.......
거침없이 흐르는 물결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관운빈은 무겁기만한 눈까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아직도 사위는 어둡기만 했다.
"자네를 인수할 사람이 있을 걸세. 자네가 이곳에 온 이후부터 주위를 맴도는 자들이 있었네. 아마도 자네를 찾기 위해 온 자들인 것 같네.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노부가 함께 있어 주겠네."
사마을지는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관운빈은 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굴려 보았다. 작은 조각배 속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운귀고원(雲貴高原)의 울창한 원시림 사이를 흐르고 있는 작은 강물 위였다.
시간은 강물처럼 쉬임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두 사람은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사마을지가 얘기하고 관운빈은 듣는 편이었다. 사마을지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특히 한림삼수 시절의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자신이 천외천을 선택했고, 천외천이 가는 길이 곧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관운빈은 그때마다 코웃음칠 뿐이었다.
"당신은 잘못 선택했소. 친구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이 어찌 옳은 길이란 말이오?"
"아아! 자넨 모르네. 어찌 수십 년간의 일정을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할 수 있겠나?"
"듣기 싫소, 대인대의하지 않으면 어느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오."
"허허! 언젠가 날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네. 지금은 비록 서로의 심장을 향하여 칼을 겨누는 입장이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처지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네."
"......."
관운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살막주의 죽음으로 그는 사마을지에 대한 증오심이 깊기만 했다.
사마을지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저 아래서 인기척이 들리는군. 아마 자넬 구할 사람들일 걸세. 그들에게 전해주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
"그럼, 부디 잘 가게."
휙!
사마을지는 신형을 날렸다. 그가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관운빈은 한숨을 쉬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옥루부인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부인은 어찌 됐을까?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감사 드립니다
즐독입니다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