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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단은 원래 영양읍 흥림산 달구터 사람이었다. 달구터는 산세가 닭의 알집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황용골 입구에 있는 달구터 능선 아래에는 영양 남씨 시조 묘가 있었다. 황용골은 원래 황용사(黃龍寺) 절이 있었던 절골로 소년장사가 무예를 수련했던 장수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조선 중종 원년(1506)에 태어난 구당(九唐) 남단(南丹)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우주만물은 하나에서 시작되었으며 마음의 근본과 사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천지의 조화를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는 천문과 역학, 풍수지리와 복서에 능한 도인이 되었다.
그런 그가, 나이 서른 살에 모친이 괴질로 죽자 달구터를 떠나 수비면 수하리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수하리의 금 씨 처녀와 혼례를 올리고 화전을 일구며 정착을 했다. 그리고 인근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에 살고 있는 남사고와 호형호제하는 지기가 되었다. 남단은 우리가 흔히 주경야독(晝耕夜讀),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낮에는 화전을 일구어 감자와 콩을 심고 밤이면 지천으로 흔한 반딧불을 방으로 불러 모아 그 빛으로 경서를 읽고 도(道)를 닦으며 정진을 하였다.
반딧불은 딱정벌레목 반딧불이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경북 북부 지방에서는 개똥벌레라고도 불렀다. 모 가수가 부른‘개똥벌레’라는 가사 속에는 “저기 개똥무덤이 내 집인 걸“ 하고 나온다. 매년 8월에 청정지역 수비면 수하리 일대에서 개최하는 반딧불이 관련 축제나 반딧불이 천문대 등 각종 시설과 행사는 이런 연유가 있었다.
구당(九唐) 남단(南丹)은 기인이었다. 그는 천리 밖을 내다보고 축지법을 하는 도인이었다. 남단은 자시 무렵이면 밤하늘에 천문을 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인시가 되면 새벽이슬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땅을 주름 잡는 축지법으로 한양을 다녀 온 것이다. 그런 그가, 남사고에게 이번 별시 과거 길을 만류 하고 있었다. 말을 안 해도 한양 가봐야 낙방한다는 것이다.
“구당, 난 그만 갈라네.” 남사고는 김이 새서 그만 울진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더라도 점심은 들고 가셔야제.” 구당이 만류를 했다. 그의 아내가 개다리소반에 삶은 감자 두 그릇을 들고 툇마루에 내려놓았다. 두 사람이 감자로 점심요기를 하고 있었다. “우린 금생에는 벼슬과 인연이 없네. 자넨 참봉이 전부야, 차라리 명산대찰이나 유람하며 세상 구경이나 하시게.” 실제로 울진군 근남면에 살았던 격암 남사고는 구당의 말처럼 벼슬길에 나가지 못했다. 격암은 성품이 곧고 학문을 좋아하며 안자육훈(安子六訓)을 실천하는 선비였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못했다. 역학과 천문, 풍수지리에도 능했던 남사고는 생전에 벼슬이라고는 참봉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는 수비면 수하리에서 구당 남단과 천문지리와 역학을 같이 공부하며 사변홍곡(蛇變鴻鵠)하는 도인들이었다.
“저길 보게.” 단이 사고에게 밤하늘에 별을 가리켰다. 그 별은 수병좌(水甁座) 동쪽으로 홀로 외로이 음산한 붉은 색을 띄며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못 보던 별인데.” 격암이 말했다. “동쪽 왜구들에게 큰 인물이 태어났네. 저 별이 오십년 뒤에는 조선에 큰 재앙이 될 걸세. 저 화근을 없애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돼 걱정일세.” 남단이 크게 낙담을 하며 한탄을 하였다. “왜구들이야 노략질하러 자주 오잖나.” “아닐세. 임진년에 저 별이 조선을 삼킬 걸세, 조정은 분당으로 당파싸움을 하고 왕은 의주로 몽진을 해야 할 걸.” “그럼 백성들은?” “죄 없는 백성들이 걱정이지.” 구당 남단은 임진년에 왜구 침략을 막기 위해 애를 쓴다고 했다. 수하는 하늘의 별자리를 가장 잘 볼 수가 있는 곳이었다. 실제로 남사고는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탄생을 세상에 예언을 했다. 그리고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눠 당파 싸움을 경고 했으며 임진왜란을 예언했다.
두 사람은 왜란에 대비하여 황용의 장수바위(영양읍 황용리 소재)로 무예와 힘을 키웠던 소년 장수를 왜나라에 보내 풍신수길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남단은 소년장수를 소백산으로 보내 죽령에서 고니시 유키나카의 한양 진군을 차단하려고 했다. 그런데 황용의 소년 장수가 계모의 시샘에 날개를 잃고 죽는 바람에 두 사람의 꿈은 무산되고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지금도 격암 남사고(1509-1571)는 잘 알려져 있으나 남단은(1506-?)언제 졸 하였는지 기록이 없다. 단지 그는 노년에 구도실에서 도를 공부하기위해 그를 따랐던 사람들과 함께 일월산(1219m)에 입산을 했다는 이야기만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도실(求道室)은 현재의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道谷)의 옛 지명으로 전국에서 난세에 도(道)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생긴 마을 이름이다.
지금도 심성이 바른 사람들은 수하에서 자정이 지나 해와 달의 산을 바라보면, 검은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반딧불에 둘러싸여 일월산으로 날아가고 있는 남단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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