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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11)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 있다 -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 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복 있다 - 그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에게 그들이 복 있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그 일곱 번째인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를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 있다고 하셨으니, 먼저 화평하게 하는 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란 말은 ‘화해시키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 단어는 본문에 단 한 번 나옵니다.
이 ‘화평케 하는 자’에서의 ‘화평’은 다른 말로는 ‘화해’, 또는 ‘평화’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화평’이란 말로 번역되었으므로 이 말로 사용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사용하신 것에서는 일반적인 안녕(평안)의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의 화해를 증진시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개인간에서나 가족간에서나 또는 사회적이며 국제적인 사이에서 서로 간에 지킬 점을 지키며 불화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에서 평화를 생각하며, 또한 UN과 같은 국제적인 평화 기구에 있으면서 이런 저런 회의를 갖고 전쟁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하는 것에서 평화를 도모하는 것에서 화평이 있을 것을 생각하며, 또한 기근, 지진 등의 재앙으로 재산상의 피해를 입고 신체상의 고통을 당하며 빈곤의 불행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여 나누며 도움을 주어 해맑은 웃음을 가져다주는 것에서 화평이 있을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화평’의 개념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온 나라가 일어나 뜻을 함께 하며 손을 잡고 노력할지라도 그런 것에서는 참된 화평이 없습니다.
왜 그러겠는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왜 그런 것에서는 예수께서 제자에게 말씀하신 화평이 없는 것인지요. 우선, 사람의 마음이란 화합을 이루었다가도 그것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득실 관계에서 불리하며 손실을 입으면 언제든지 분리되는 것이며, 마음이 상하면 언제든지 바뀌어 깨져 분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입으로는 화평을 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한 법입니다(시 28:3). 그러니 화평을 도모하는 사람의 마음이 언제까지나 항상 일관되게 유지되지 않는 한에는 참된 화평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사람에게서 완전한 화평이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peacemakers, 곧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어서 화평에 있을지라도 그런 것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임하게 한 화평이 아니기 때문에 화평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사람들이 화평을 만들어 화평에 있는 것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주신 화평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화평케 하는 자‘에 있지 못하며,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화평케 하는 자’라고 하면서 그들이 복 있다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앞에서의 경우에서와 같이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화평케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 성취된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의 의미와 화평케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면 구약에서 예언해 주신 말씀에로 가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성취로 있는 복을 선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라고 하였습니다. 화평을 가져다주어서 영원히 안정 있고 안락하게 사는 것은 ‘의’(공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또한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산들이 제자리를 떠나며 언덕들이 몹시 요동쳐 흔들려도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사랑>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며 그들과 맺은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을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찌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말하였습니다(나 1:15).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적 앗수를 멸망시킴으로써 산들을 넘어와 전하는 전령의 소식은 유다를 화평에 있게 함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절기 -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을 지칭 - 와 하나님께 자원하여 지키기로 약속한 바인 서원 - 유다가 앗수르의 압제를 받는 가운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 어떤 서원을 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음 - 을 지키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셨으며, 실로 이것을 또 다시 악한 자가 범접하지 못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죠. 대적자 원수를 멸망시킴으로써 마침내 화평에 있게 하신 좋은 소식을 전령이 산을 넘어 숨가삐 달려와 전해주며 시온을 향해 구원이 이르렀다며 “네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몇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의한 구약의 예언에서 나타내신 화평은 하나님이 왕이 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심으로,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심으로써 그분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악한 대적자가 감히 범접하지 못합니다. 범접하였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을 재앙<심판>의 화가 되셔서 멸망시키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심에서 화평이 있으며 또한 그 화평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왕인 한에는 영원히 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화평의 실현을 이스라엘과 맺은 ‘화평의 언약’을 통해서 하십니다. 사람에게 참된 화평이 없는, 언제나 자신을 다스릴 왕이 없음으로 화평하지 못한 불행의 고통에 있음을 이스라엘은 죄 아래 있는 자신들에게 임하는 심판으로 항상 겪는 전쟁과 재앙에 의해서 겪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불화로부터 화평에 있게 할 왕을 ‘화평의 언약’을 통해서 예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화평에 있게 하시는 왕이 되심은 ‘화평의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시게 되는 ‘언약자’ 메시야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그들과 맺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는 관계성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왕과 그 백성’의 관계를 맺으심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 오심으로써 실현되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면, 그분이 불려지는 여러 이름 중에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란 이름과 함께 ‘평강의 왕’이라고 불려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이 ‘화평하게 하는 자’, 곧 ‘평강의 왕’은 구약 예언에서 계시되고 있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더 이상 죄의 무서움과 그로 인한 죽음의 심판의 두려움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죄로부터의 구원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음부<죽음>의 권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빼앗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보살핌을 받고 있는 화평에 있게 하심으로 그리스도는 ‘화평의 실현자’가 되십니다. 그런 까닭에 ‘화평하게 하는 자’란 말은 ‘구원자’란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자’의 또 다른 말이 ‘화평하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들에게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는 일의 작정하심을 이루시기 위한 준비 속에 있게 하신 자들로 열 두 사람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함으로써 제자 삼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게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악한 자들에게 팔아 그들의 손에 넘기는 일을 함으로써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던 사람으로 우리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곳인 악한 자의 처소로 그에게 합당한 곳으로 갔습니다만, 악한 자는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서 그는 그에게 맡겨진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가 하는 일을 그 또한 드러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섬김으로써 자신들에게 임한 그분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 곧 화평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들은 화평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화평을 다스리는 것 속에 있기에 ‘화평을 누리는 자’로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그분의 천국 복음 전파와 가르침과 이적에서,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러 오신 십자가의 구속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재림이 가져올 것에서 낱낱이 아주 여실히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는 ‘화평을 위해서 일하는 자’, ‘화평을 이루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를 통해서 이미 그들이 어떤 자로 있게 될 것인지를 예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로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할 자로서 예수께로부터 받아 맡는 사도의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 곧 화평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은 가장 위대한 화평케 하는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그들이 유대인으로 있건 또는 이방인으로 있건 간에 하나님과 막힌 담을 무너뜨려 완전히 헐어버림으로써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 하셨듯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그들 간에 막힌 담을 무너뜨려서 완전히 헐어버려 그들 사이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선민의식’과 ‘율법을 받은 자’라는 것으로 ‘율법을 행하여 지킴으로 구원 받는다’란 ‘특권의식’으로 있게 되는 다툼과 그 불화로부터 그 모두를 불식시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를 화평에 있게 하시는 것은 일반적 개념에서의 아무런 근심 걱정 염려가 없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이 그들이 믿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하나 됨’, ‘믿음의 하나 됨’인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의 전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히 지어져 올라가고 그 집을 이루는 한 구성원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지속 되어가는 화평에 있습니다. 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전파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요, 이들이 곧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로 세우신 자신의 제자 삼은 자가 전하는 예수님 자신을 터로 제공하시고 그 위에 ‘화평케 하는 자’인 교회를 세워나가시기 위하여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우리가 그 피에 가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롬 3:25). 바울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외에도 많은 성경 구절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드려져서 죽음을 당하신 대속의 피를 통해 우리가 ‘화평(화목)한 자’요 또한 ‘화평(화목)케 하는 자’에 대하여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롬 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살전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요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예수님은 이 ‘화평한 자’요 또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복 있는 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여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45)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대의 산악과 언덕을 넘어 화평에 있게 하신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셨다!”라고 알리는 사람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말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 소식을 전하는 ‘화평케 하는 자’를 자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말함으로써 그들을 지칭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부름을 받은 것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몸의 연합에 있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복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에게서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라는 복이 성취되었다면, 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받는 우리의 존재가 어떤 정체성에 있는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해 나가시는 화평케 하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