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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 둘째 마디 슬랩이 끝나고 오른쪽으로 B코스 방향으로 이동하는 부분.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특별한 돌출부가 없고 시야가 트이지 않아서 정확한 루트 파인딩이 필요하다. |
어떤 일의 단서가 잡히지 않을 때 생각지 않게 화장실에서 그 실마리를 푸는 경험을 종종 한다.
인수봉 아미동길의 개척자 이동일. 15년 전 중계동의 한 근린공원에서 그와 만나던 일이 문득 생각난 것도
뱃속에 든 무거운 덩어리를 비워내며 떠올린 기억이다.산을 떠나 조기 축구에 한창 빠져들던 그가 말했다.
“야, 나도 한때 열심히 산에 다녔어. 인수봉에 아미동길 있지? 그거 내가 만든 거야.”‘아니 그 뺀뺀한 아미동길이 설마…
.’ 그 말은 뜻밖이었지만 아미동길을 만든 것은 진정한 사실이었다.오늘 그와 함께 인수봉에 오르게 된 것은 허투루
들었던 그 기억으로 인해서다.
스포츠머리에 권투선수 같은 단단한 이미지의 이동일 씨는 그 발언 이후 사뭇 다르게 보였다. 70년대 한국 등산화의
역사 레드페이스의 주역이었다는 사실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이마 가운데 생긴 사마귀가
마치 별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가 아미동의 개척자란 사실을 알고 부터다.바위를 그만둔 지 너무 오래된 이동일 씨는
자신이 만든 길을 다시 오르는 일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등반을 결정하기까지 1년에 가까운 뜸을 들인
것도 마음을 다지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가벼운 걸음걸이에서 그가 나름대로 오늘을 기다려왔다는 감을 잡는다.
- 아카데미산악회와 이동일의 중간자 따서 명명
대슬랩을 오른 후 기존 B코스의 왼쪽의 크랙으로 오르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오르는 아미동길이다.
그러나 아미동의 출발은 언제나 무심히 지나치던 대슬랩에서 왼쪽으로 50여m나 동떨어진 누운 크랙이었다.
그간에 오르던 길은 앞뒤가 생략된 길임이 오늘 판명이 났다. “걔가 사월 초파일날 죽었어.”“우이산장에서
삼학소주 4홉들이 5병을 마신 다음날 로프 두동에 암벽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다시 선인봉으로 갔지.”인수봉
아미동길의 내력을 밝히는 과정에서 이용민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친형인 이용대(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씨의 증언을 통해서다. 이동일 씨가 따르던 선배 이용민은 이용대의 막내 동생이었던 것이다.
이동일은 180㎝가 넘는 훤칠한 키에 자상한 성격을 가진 이용민을 ‘장다리형’이라고 불렀다.
인수봉 언저리에서 죽치던 일이 생의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때. 이들은 바람재 오른 쪽 등성에 움막을 치고
거주하던 장씨의 방을 자주 드나들었다.그의 움막에 연탄 한차를 둘이서 져 올린 추억은 아직껏 지울 수 없는
무용담이다. 한 장의 무게가 3㎏ 넘는 연탄을 이동일이 20장 질 때 29장이나 지고 오르던 이용민의 괴력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아미동길은 1973년 4월 12일부터 6월 22일 사이에 이동일을 등반대장으로 김춘근·김병호
·권성진 그리고 고 이용민에 의해서 개척되었다.추측하건대 틀림없이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름의 유래는 예상과 달리 싱겁도록 간단하다.
모 월간지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연관이 있어서 아미(Army)라고 지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상은
아카데미산악회와 이동일의 중간자를 따서 붙인 이름일 뿐이다.개척에는 김덕현 박사와 강관원 박사·이동환 교수
·백정일·박정명·유인희·박해자 씨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보고서에 적고있다.
당시의 장비는 40m 로프 2동을 썼으며 해머와 하켄 그리고 군용 정글화를 신었다. 볼트를 많이 박는 것이 수치라는
말을 발표했을 만큼 당시의 클린 클라이밍 사조도 염두에 두었다.개척 작업은 시작하여 수 삼일만에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이용민의 돌발적인 사고로 주춤하게 된다. 이용민은 아미동 코스를 개척 중에 선인봉에서 추락사했다.
바로 우이동에서 짐 싸들고 선인봉으로 간 그날이었다. 아무리 그럴듯한 가정도 죽음을 정당화시키기엔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용민의 죽음은 평소 그가 흠모하던 영웅들의 삶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사고가 나던 날, 이용민은 만나기로 한 후배가 나오지 않자 개의치 않고 그대로 선인봉으로 달려갔다.그리고
로프 2동을 풀지도 않고 배낭에 넣은 채 단독으로 바위에 붙었다. 박쥐코스의 날개를 단숨에 꺾어 올랐다.
밑에서 보던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후 혹점을 지나는 슬랩 위에서 꽃잎 하나가 바람에
날리듯 떨어지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바로 이용민의 추락이었다.불같은 열정이라 해도 좋고, 꽃이라 불러도
나무랄 수 없는 27세의 청춘은 바로 그 반반한 슬랩에서 바람처럼 사라져갔다.
◇ 1968년쯤으로 추정되는 해에 인수봉 정상에 오른 산악인들. 왼쪽부터 고 이용민(경기대 OB), 전수철(재미산악인), 이덕찬(경기대·동국대 OB), 미상. |
- 30년만에 꺼낸 이용민의 피묻은 수첩
‘장다리형의 익살스런, 덥수룩한 수염의 미소 짓는 얼굴이 나를 안심시켜준다’고 느끼며 4월 12일 시작했던 등반은
믿고 따르던 선배가 졸지에 사라진 탓에 전진을 멈추고 말았다.두 달 여의 애도 기간을 가졌어도 장다리형의 환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동일은 6월 21일 다시 아미동 크랙과 슬랩을 거쳐 이틀만에 등반을 끝낸다. 이때엔 김춘근과
홍건식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다. 샴페인을 들고 정상에 올랐으나 곁에 있어야 할 이용민의 생각으로 기쁨보다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잊을 수 없는 이용민의 사망은 올해로 꼭 30년이 되었다.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고이 간직해 온 그의 수첩을 이용대
씨는 조심스럽게 내놓았다.아직도 피로 얼룩진 그의 수첩엔 결코 버릴 수 없는 사항이 깨알같다. 1888년 19세의
나이로 바이스호른에서 죽은 오스트리아의 천재적인 등반가 게오르그 빙클러 그리고 1885년 도피네의 라메이쥬
남벽에서 추락한 에밀 지그몬디. 모두가 단독 등반가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들의 이름을 푸른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수첩엔 당시 산꾼들에게 묵시록 같았던 시 로제 듀프라의 ‘그 어느날’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으면
오랜 나의 산 친구여 전하여 주게
어머니에게는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나는 어머니의 곁에 있으니 아무 고통도 없었다고
그리고 사내답게 죽어갔다고
아버지에게는
전하여주게 아우에게는
너에게 바톤을 넘기는 것이라고
그리고 다정한 아내에게 전하여주게
내가 돌아가지 않더라도 꿋꿋이 살아달라고
당신이 옆에 없을 때에도
내가 항상 살아왔듯이
자식들에게는 내가 오르던 고향의 바위산에
나의 애탄 손톱자국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나의 친구 그대에게
나의 피켈을 집어주게
피켈이 치욕 속에 죽어가길 나는 바라지 않나니
어느 날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지고 가서
그 피켈을 위한 조그만 케른을 쌓고
거기에 피켈을 꽂아주게
빙하 위에 빛나는 새벽의 빛을
능선 위에 붉은 저녁 햇빛을
나의 귀여운 피켈이 되쏘아 비칠 수 있도록
나의 친구 그대에게 전할 선물
나의 함마를 받아주게
그리고 화강암에 피톤을 박아줄 것을
그것은 몸서리 칠 만큼 나의 유체를 흔들었나니
암벽이나 능선에 한껏 그 소리가 울리게 하여주게
아아, 친구여 나는 그대와 함께 항상 있나니
- 볼트가 유혹하는 빤빤한 슬랩
항아리 크랙으로 향하는 둘째 마디의 슬랩을 선등하는 윤재학(코오롱등산학교 대표강사) 씨가 볼트의 간격을 두고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아! 옛날엔 여기 만만치 않았겠어.”
‘고양이 발톱’이란 애명을 가질 만큼 등반실력이 뛰어난 그에게 이런 말이 나올 때 이용민의 큰 키를 다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아미동길의 상징인 크랙부분은 ‘신력’이 좋아지고 ‘초크’라는 응원군이 있다는 가정에선 어렵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볼트에 의지하지 않고 온전한 밸런스로 오르는 다섯째 마디 구간이 숙제다. 볼트를 잡거나
딛는 것은 하나의 유혹이다. 자유등반이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런 유혹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낮이나 밤이나 암벽에 매달려 노는 풀타임 클라이머처럼 그의 등반이 매끄럽지는 않지만 주춤대거나 망설이지
않는 스타일이다. 이동일의 결정이 빠른 덕에 우리의 등반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옛날에 이 빤빤한 데를
어떻게 올랐지”하며 혀를 내두르면서도 일곱째 마디의 가파른 슬랩을 또다시 뛰어오른다. 그의 행동에 카메라가
멎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구파발에서 동양산악회의 서순만 씨를 만나 원효리지를 같이 오른 것이
계기가 되어 암벽등반을 시작한 그도 이제 50살이 넘었다. 적지는 않지만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나이다.
그런데 이동일의 어금니는 벌써 틀니로 대체 되었다. 병맥주를 따듯 소주를 이빨로 깐 탓이다.
그 귀한 이를 한낱 소주 병따개로 썼어도 후회하지 않는 그의 삶의 방식에서 파이팅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일등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세상사를 생각할 때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새클턴이 남극탐험 때 보여준
일화는 생각할수록 유쾌하다. ‘우리는 성공하거나 아니면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그는 남겼었다. 그러나 27명의
대원들과 함께 634일 동안 남극의 바다를 떠다니며 성공하지도 못했고 죽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BBC 방송국은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11월에 지난 1천년 간 최고의 탐험가 10인을 선정했을 때 마르코 폴로·페르디난드
마젤란·아문센 같은 엄청난 인물들과 함께 새클턴이 당당히 포함되었다. 성공이 아니고 위대한 실패의 대가였기
때문이 아닐까.
“구조되길 원하지 않았는데 괜히 가서 꺼내준 것 아닐까?” “그곳에서 살게 내버려두지.”
“영하 70°가 넘으면 사람이 어떻게 돌아버리는가 관찰하고 싶었나?” “배도 더 고파봐야 해….”
산친구들과 함께 그 유명한 일화를 두고 칭찬을 빙자하여 빈정댄 것은 상거지가 되어가도 여유를 잃지 않은
낙천성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오늘 해거름이 되기 전에 아미동길의 전 루트를 다 오르고 인수봉 정상에 선 것은
이동일 씨의 빠른 판단 덕이라 해야겠다. 그것은 고민을 담아두지 않으려는 이동일의 낙천성 때문이리라. 머리
나쁜 사람은 화장실에 가서야 비로소 한 생각을 간신히 건질 뿐인데….
◇ 아미동길 개념도 |
- 인수봉 아미동길
인수봉 아미동길은 1973년 봄 아카데미산악회의 이동일 씨와 김춘근·김병호·권성진 그리고 경기대 산악부 출신인
이용민 씨에 의해 개척되었다. 등반 루트의 전장은 240m이며 총여섯 마디로 나누어 등반을 했으나 그 이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곱 마디로 끊었다. 난이도는 인수 B코스의 항아리 크랙의 왼쪽을 지나는 이후의 다섯째 마디 슬랩이
5.10a로 평가되어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있던 일곱째 마디 슬랩의 난이도 역시 비슷할 것이다.
루트의 출발은 인수 정면 슬랩에서 왼쪽으로 50m쯤 돌아간 지점의 하단부 누운 크랙에서 한다. 등반 루트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융통성 있는 연결이 필요하다. 아미동은 서면벽의 오버행으로 하강길을 뚫어 ‘아미동
하강길’이라고 명명한 것이 특징이다. 하강길은 1971년도에 인수봉의 대형 조난 사고 이후 남서면의 하강길이
붐빌 때를 고려하여 만들었다. 하강 길이는 총 80m로 두 번에 나누어 하며 하단부는 오버행을 거쳐 내려와야 한다.
첫째 마디(40m)
홀드와 스탠스가 양호한 반침니 스타일의 누운 크랙으로 스태밍 자세로 오를 수도 있다. 크랙이 넓어서 중간에
확보물 설치가 애매하다. 25m쯤 오른 후 왼쪽으로 건너가서 쌍볼트에 확보한다.
둘째 마디(30m)
홀드와 스탠스가 양호한 밴드를 왼쪽으로 건너서 오래된 링볼트를 따라 오른다. 이후 움푹 움푹 패인 곳을
스탠스 삼아 푸시로 슬랩을 오르게 되며 상단부는 얄팍한 밴드를 통과하는 미세한 슬랩이다.
셋째 마디(20m)
인수B코스 크랙 쪽으로 이동하여 왼쪽 V형 침니를 올라 마디를 끊는다.
넷째 마디(30m)
언더 크랙으로 연결한다. 이후 레이백이 기능한 크랙을 지나고 좌향 크랙 위의 볼트를 넘어 왼쪽의 경사진 턱으로 오른다.
다섯째 마디(40m)
왼쪽 방향으로 연결된 볼트를 지나 벙어리 크랙을 오른손으로 당기며 오른 후 왼쪽으로 이동하여 확보한다.
개척 당시에는 뼈처럼 돌출된 바위를 잡고 직상했다.
여섯째 마디(40m)
바위가 널린 넓은 쉼터에서 왼쪽 슬랩과 넓은 크랙을 지나 15m쯤 오르면 키가 낮은 소나무가 나온다.
그리고 B코스의 마지막 디에드르 크랙이 시작되는 곳에서 왼쪽 슬랩으로 이어 오르게 된다.
일곱째 마디(40m)
볼트와 하켄을 이용한 슬랩으로 15m쯤 왼쪽 위에 설치된 쌍볼트에서 슬랩으로 직상한다. 오래된 볼트가 '
연이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미세한 홀드에 안정된 밸런스를 요한다. 상단부는 움푹 패인 슬랩으로 연결되어
나무가 있는 곳에서 끝나지만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왼쪽크랙이 끝나는 곳에서 쌍볼트에서 마디를 끊고
볼트를 통과하여 정상까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