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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좌초한 경재개발 수출로 돌파구
늦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64년 8월 어느날 오후 부산시범일동의 신발 생산업체 국제고무 사장실. 공장 한 구석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공간은 요란한 기계소리와 한증막을 방불케 하는 무더위로 가득찼다. 허름한 탁자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사이다로 목을 축이며 입씨름을 계속했다. 양태진 (梁泰振.작고) 사장과 수출 독려차 서울에서 내려온 박충훈 (朴忠勳.78.산업개발연구원장) 상공부장관,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공업1국장이었다. "梁사장, 금년에 얼마까지 수출할 수 있다는 거요. " 吳국장이 추궁하듯 물었다. "우리 회사 사정상 도저히 30만달러는 불가능합니다. 5만달러 이상은 어려울 것같습니다. " 梁사장이 하소연하듯 대답했다. 두 사람의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자 가만히 듣고 있던 朴장관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梁사장, 회사 사정도 있지만 정부 방침도 있고 하니 금년에는 10만달러 수출하는 걸로 합시다. " (오원철씨 증언) 대통령은 수출 총사령관 64년 5월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朴장관은 '수출만이 살 길' 이라며 수출증대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주요 수출업체들을 직접 방문하고 나섰다. 朴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달러 부족으로 좌초될 위기에 몰리자 달러 확보를 위해 수출관계 장관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당시 상공부장관 박충훈씨는 "朴대통령은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이었고, 나는 그 밑의 참모장격이었다" 고 회고했다. 그가 언제부터 수출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는지, 그의 이런 태도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누구였는지 증언을 통해 점검해 보자. 먼저 60년대에 상공부차관과 두차례의 상공부장관, 부총리겸 기획원장관을 지낸 박충훈씨의 증언. 5.16직후부터 수출에 중점을 뒀다는 얘기다. 60년대 재무.상공부 장.차관을 지냈고 69년부터 78년까지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경제를 챙긴 김정렴 (金正濂.73) 씨의 증언은 다르다. 60년대에 상공부 화학과장.공업1국장.차관보를 거쳐 청와대 경제2수석을 역임한 오원철씨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박충훈장관이 취임 하루전에 나를 불러 중점을 둬야 할 업무에 대해 묻기에 '외화고갈과 경제파탄을 막기 위해서는 수출밖에 해결책이 없다' 고 말했습니다. 朴장관은 취임직후 나를 경공업담당인 공업1국장에 임명했지요. 그래서 수출 주종품목이 될 수 있는 경공업으로 공업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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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이었던 김용태 (金龍泰.71.전공화당 원내총무) 씨의 증언. 이어지는 김용태씨의 증언. 이런 과정을 거쳐 군사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 로 규정된 기업인들은 점차 수출과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탈바꿈한다. 이 시기의 박정희의 초조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또 있다. 61년 7월부터 64년 5월까지 2년10개월동안 경제기획원장관을 일곱번이나 갈아치운 것이다. 경제총수의 수명이 평균 5개월을 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 후의 경제장관이나 참모들이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장관을 교체해 보고 국내 기업인을 동원해 봐도 부족한 재원을 메울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돼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朴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64년 5월 경제기획원장관에 장기영 (張基榮.작고.전한국일보 회장) 씨, 상공부장관에 박충훈씨를 각각 임명했다. 장기영장관은 뱃심이 좋아 별명이 왕초였다. 그는 취임 직전 朴대통령을 찾아가 "경제는 일사불란해야 합니다. 부처별로 고집을 세우면 배가 산으로 올라갑니다. 경제기획원장관은 인사권을 갖고 경제관계 장관들을 관장해야 합니다" 고 건의해 실질권한을 갖는 부총리가 됐다. 朴장관은 9개월만에 상공부장관에 재기용됐다. 그 무렵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을 지낸 문기상 (文基祥.71.문기상 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씨의 증언. 이 무렵 朴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 어느 날 朴장관은 朴대통령의 지방순시에 동행했다가 기차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 "朴장관, 우리나라 옛말에 사농공상 (士農工商) 이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공농사' 가 돼야 할 것같아. 朴장관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 당황한 朴장관은 얼떨결에 "각하, '상' 이 '공' 보다 앞서야 한다구요" 하고 되물으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다음 "제 생각에는 '공상농사' 가 더 맞을 것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물건만 만들면 뭣해요. 팔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수출이 제일이야" 라고 설명했다. 당장 수출을 하려고 해도 수출용 원자재를 구입할 달러가 없다는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자나깨나 문제는 항상 달러였다. 64년 당시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며 기존의 원조자금마저 급격히 줄여나갔다. 일본과는 국교수립조차 안된 상태였다. 朴대통령은 할 수 없이 눈을 유럽으로 돌렸다. 64년 12월 朴대통령은 수출용 원자재 구입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달러를 구하러 서독을 방문했다. 전세기를 동원한다는 것은 꿈도 못꿨다. 서독에서 보내준 루프트 한자 여객기를 60여명의 일반승객과 함께 타고 일곱곳의 경유지를 거쳐 28시간만에 서독에 도착했다. 수출진흥회의 15년 개근 국빈방문이었지만 朴대통령에 대한 대접은 초라했다. 연도에 걸린 태극기는 스무개 남짓. 숙소인 스위트룸은 10평도 되지 않았다. 약소국의 설움을 절감해야 했다. 한국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준 대가로 서독으로부터 얻은 차관은 4천만달러. 귀국한 朴대통령은 눈에 불을 켜고 수출문제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당장 수출진흥회의를 만들어 관계장관들과 경제4단체장을 참석시켜 매달 수출문제 전반을 검토케 했다. 첫 회의는 65년 1월 열렸다. 朴대통령은 79년 10월 사망 때까지 이 회의를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17.수출업자 특별대우...밀수에 걸려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1969년 1월20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제1차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주재했다. 한번 더 수출전선에 박차를 가할 필요성이 있던 시기였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회의록 내용. "68년도 지역별 수출목표 달성실적을 분석해 보면 상주공관이 없는 지역의 수출이 오히려 잘되고 있습니다. " 분위기는 한순간에 냉각됐다. 오원철 (吳源哲.69.기아경제연구소 고문)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의 증언. 수출진흥확대회의는 65년 1월부터 매달 열리던 수출진흥회의가 확대 개편된 것이다. 4년만에 정계.관계.경제계.학계.법조계등 각계 주요 인사 1백명 안팎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로 탈바꿈했다. 朴대통령은 이 회의를 다목적용으로 활용했다. 또 "대통령은 우리 편" 이란 인식을 기업인들에게 심어줘 '수출 기업인의 기 (氣) 살려주기' 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회의장에서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사람은 69년부터 74년까지 재무장관을 지낸 남덕우 (南悳祐.72) 씨. 그의 회고.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신나는 회의였다. 당시 朴대통령과 정부가 어느 정도 수출기업에 특혜를 주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일화 한 토막. 정부는 당시 수출기업에 대해 '소요량 증명에 의한 기술소득제도' 를 적용했다. 원자재 수입때 수출에 소요될 물량보다 더 들여오는 것을 인정해줘 수출하고 남은 원자재를 국내시장에 팔 수 있게 특혜를 준 것이다.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고 국내에선 구경도 못해본 제품을 내다팔기 때문에 수출업자들에겐 큰 이권이었다. 당시 상공부에서는 원자재 소요량의 18% 정도를 더 수입할 수 있도록 인정해주었다. 상공부 수출진흥과장을 지낸 문기상 (文基祥.71.문기상합동특허법률사무소 소장) 씨의 증언. "수출업자들이 당시 인기품목이던 나일론등 원자재를 마구 들여오다가 66년 가을 검찰 밀수합동수사반에 적발됐지요. 대통령이 기업인 편을 들어주니 기업인들은 거리낄게 없었다. 상당수 기업인들이 아직도 朴대통령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朴대통령은 또 집무실에 기업별 수출현황을 막대그래프로 그려놓게 해 수출실적을 매달 체크하고 목표에 미달하면 관계부처와 기업을 독려했다. 그러다보니 수출업무를 직접 담당한 상공부는 '수출 스트레스' 를 가장 심하게 받았다. 오원철씨의 증언. 대통령이 세운 수출목표를 실무부서가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문기상씨는 "그때는 수출업자보다 상공부 관리들이 더 설쳤다" 며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야근을 밥먹듯이 했다" 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관료주도형 경제성장이 '한강의 기적' 을 낳는데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다. 60년대와 70년대 경제개발의 중심축을 담당한 경제관료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새 경제모델을 필요로 한 시기에도 '과거의 영화' 에 집착해 변신에 실패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화시대에 갖가지 규제로 묶어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발목잡는" 존재쯤으로 인식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朴대통령의 제일 관심사가 수출이다 보니 수출업무를 담당하는 상공부의 발언권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상공부는 수출업자들에게 갖가지 혜택을 주었다. 일반대출 이자율이 25%였던 68년의 경우 수출 기업인에 대한 수출특융 이자율은 6%였다.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했다. 또 수출소득에 대해서는 80%까지 소득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 당시 하늘의 별 따기였던 해외여행도 수출업자에게는 예외였다. 60년대 운동화와 고무제품등을 수출하던 동신화학 전무였던 임호 (林虎.68.삼보주식회사 대표이사) 씨의 증언. "당시 수출회사라고 하면 관청이나 은행에 가서 목에 힘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혜는 정부의 선정대상에 포함된 소수 기업에 해당되는 얘기였다. 당연히 특혜를 받지 못하는 기업들은 특혜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 특혜대상 기업은 물론 특혜를 받으려는 기업들도 때론 입막음과 감사의 표시로, 때론 로비를 위해 기회있을 때마다 관료와 정치인들에게 '작은 뜻 (微意 또는 寸志)' 과 '성금' 을 건넸다. 이 부정부패의 고리는 지금까지 우리사회 발전에 큰 짐이 되고 있다. 이런 부작용을 남기면서도 수출제일주의 정책은 결실을 거둬 66~70년 연평균 수출성장률은 36.8%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70년대초 정부에서 내걸었을 때 코방귀의 대상이었던 '80년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 수출 1백억달러 달성' 이란 목표도 3년 앞당겨 77년에 달성했다. 朴대통령은 지방순시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현장방문을 즐겼다고 한다. 오원철씨의 증언. "하루는 朴대통령께서 수출용 스웨터를 만드는 마산 한일합섬 섬유공장에 들렀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朴대통령의 시선이 옆에서 안내하던 김한수 (金翰壽.작고) 사장의 눈과 마주쳤다.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 金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고 朴대통령께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경이적인 '고도성장과 수출신화' 가 있기까지 근로자들이 치른 희생은 컸다. 대통령의 일회적인 온정주의 시책으로 근로환경이 개선될리 없었다. 70년 11월 평화시장 근로자 전태일 (全泰壹) 씨가 동료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수출제일주의와 고도성장의 화려함 뒤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한 단면이었다.
18.중앙정보부
절대기아 (饑餓) 로부터의 해방은 5.16직후부터 박정희 (朴正熙)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먹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무렵 그가 집착했던 대목은 한국땅에서 나는 석유였다. 바람이 간절하면 때론 꿈으로도 나타난다던가. 과묵.신중.침착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박정희가 이 때문에 지나치게 흥분, 결과적으로 우스갯감이 된 적이 있다. 76년 1월 '영일만 석유' 얘기는 대표적으로 알려진 케이스. 이 보다 10년 앞서 그는 석유사건때 못지않게 흥분한 적이 있다. 쌀 (볍씨) 때문이었다. 보릿고개와 보릿고개 사이에 산다는 자조 속에 65년도 저물어가던 무렵의 대통령 접견실. "우리 이제 보릿고개 넘길 효자 하나 생겼어. " 박정희는 시간이 좀 남는다 싶으면 '손님들' 에게 으레 이렇게 볍씨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한쪽에 나란히 세워둔 유리상자 속의 볍씨를 가리키며 "이게 그거야, 희농 (熙農) 1호. 알도 많고 병충해에도 강하고" 라는등 칭찬에 열을 올렸다. 희농1호는 당시 언론에 '기적의 볍씨' 라고 소개됐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64년 이집트에서 훔쳐온 나다 (Nahda) 를 박정희의 '희 (熙)' 자를 따 희농1호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65년 실험재배에서 광주등 다른 곳은 실패했으나 서울대농대 이태현 (李台現.작고) 교수 책임하에 이뤄진 수원에서만 일반벼보다 30%이상 다수확 가능 판정을 받았다. 당시 중정3국장 보좌관 김영광 (金永光.66.전국회의원) 씨의 증언. 그는 수원농고 출신이란 이유로 차출돼 실험재배 경과를 1주일에 한번꼴로 박정희에게 보고하느라 수원시험포에 살다시피 했다. "쌀, 쌀 하던 땐데 얼마나 좋아하셨겠습니까. 일반벼도 함께 가져오라시길래 국광등 다섯가지를 따로 담아 갖다드렸어요. 그걸 비교해 가며 자랑하시는 거예요. " 박정희는 그때 걷힌 30가마를 "한톨도 먹지 말고 종자로 쓰라" 고 지시하는 한편 李교수를 이듬해 2월 농업진흥청장에 임명한다. 김형욱 (金炯旭) 정보부장은 한술 더 떴다. '제2의 문익점' 이라고 자랑이 늘어졌다. 훔쳐온 사실을 알게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중정에 대한 국회내무위의 국정감사장에서도 희농 견본을 내놓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희농1호는 실패했다. 67년 일반농가에 보급, 재배결과 씨받이마저 어려운 흉작에 그쳤다. 때마침 닥친 극심한 가뭄 탓도 있었지만 한국의 기후나 풍토에 맞지 않는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박정희의 반응에 대한 증언은 드물다. 희농실패에 대한 시비가 잦아들고 새농사가 시작될 즈음인 이듬해 5월 조용히 '희농 청장' 이태현의 사표를 받은 것이 고작이다. 박정희의 실망은 컸던 것같다. 70년 연두회견에서 '진짜 기적의 볍씨' 통일벼 (당시 명칭 IR667) 를 소개하면서도 "과거 (희농)에 안됐기 때문에 이것도 되겠느냐고 의심할지 모르지만 틀림없이 될 것" 이라고 사족을 달았다. 희농 이후 박정희는 어떤 '상품' 에도 자신의 이름을 붙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통일벼의 대성공 덕분에 덮여진 희농1호 에피소드는 식량자급에 대한 박정희의 열망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는 식량자급을 가난추방의 첫걸음으로 간주했다. 식량문제 해결없이는 국가안보 또한 없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이른바 '박정희식' 은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좌우 살피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사고방식.행동양식을 말한다. 통일벼 보급과정에서도 박정희식이 적용됐다. 통일벼는 국내연구진과 국제미작연구소 (IRRI.필리핀 소재)가 5년 연구끝에 개발한 다수확품종으로 70년 일반농가에 실험적으로 보급,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맛이 없다, 찰기가 부족해 식으면 푸석푸석해진다, 모양이 길쭉해 이상하다는등 시비가 잇따랐다. 71년 2월5일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의가 끝난 뒤 가진 통일쌀밥 시식회. 대통령으로부터 퇴짜를 맞으면 어쩌나 하는 심정에서 김인환 (金寅煥.작고) 농진청장이 무기명으로 써달라며 'IR667 (통일벼는 그해말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 검정조사표' 를 배포했다. 朴대통령은 굳이 날짜와 사인을 적어놓고는 ▶색깔 = 좋음▶차진 정도 = 보통▶밥맛 = 좋음이라고 응답했다 (사진 참조) .박정희의 일갈. "누가 이걸 맛없다고 그래. 비싼 돈주고 외미 (外米) 사먹는 처지에 밥맛 따지게 됐어?" 더이상 다른 참석자들의 답변은 들어볼 필요가 없었다. 당시 농림장관 김보현 (金甫炫.73) 씨의 증언. "통일벼는 일반벼보다 키가 작아 지붕이엉을 엮는데 나쁘다는 얘기가 나왔지요. 朴대통령께서 '지붕을 개량하면 되지 무슨 소리냐' 고 일축하데요. 농촌 지붕개량이 신속하게 이뤄진데는 통일벼 영향도 클 겁니다. " 박정희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독설가' 김학렬 (金鶴烈.작고) 전부총리는 열성적인 통일벼 옹호론자였다. 박정희의 시식을 며칠 앞두고 농업진흥청에서 예비시식을 하는 도중 섬뜩한 독설을 퍼붓는다. '통일벼 박사' 허문회 (許文會.70.서울대농대 명예교수) 씨의 증언. "누군가 밥맛 얘기를 꺼내면서 조기보급 신중론을 폈지요. 그런데 그 양반 '이게 어디가 어때. 배부른 놈들이구만. 맛없다는 놈들 칼로 배를 찔러버려야 돼' 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 통일벼가 일반농가에 본격 보급된 72년부터 일반벼를 고집하는 농민들의 저항 때문에 소동이 벌어졌다. 일부 농촌지도원들은 통일벼 보급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반벼 모판을 밟아버리거나 모내기를 끝낸 일반벼를 뽑아내고 통일벼를 심도록 강요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당시 농진청 식량작물과장 이효근 (李孝近.72) 씨는 "사후관리를 잘못해 피해를 본 경우에도 농민들이 농촌지도소로 몰려가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보상을 요구하곤 했다" 고 회고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뿌리내린 통일벼는 74년 3천만섬, 77년 4천만섬 돌파등 기록적 쌀증산을 주도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그 덕분에 77년 1월 대북 (對北) 쌀지원을 제의할 수 있게 됐다. 그는 그해 12월 농진청을 방문, 그 뿌듯한 마음을 '녹색혁명성취' 라는 휘호로 남겼다. 그러나 통일벼는 박정희 사후 다시 맛 시비에 휘말리고 쌀이 남아돌면서 91년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박정희는 식량증산운동과 더불어 잡곡혼식.분식.무미일 (無米日.1주일에 한번씩 각종 음식에서 쌀을 쓰지 않는 날) 등 절미 (節米.쌀 덜먹기) 운동을 강행했다. 72년 12월22일 김종필 (金鍾泌) 국무총리를 경유, 김보현농림장관에게 보낸 16절지 6장 분량의 친서 일부. '…주2회 쌀 안먹기를 5회정도로 증가하여 절미를 강행하고 벌칙을 강화하여 미곡상.음식점등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하여…. ' 이렇듯 박정희는 절미운동 위반을 중대한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는 암행단속반이 들이닥쳐 솥단지를 뒤지는가 하면 각급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벌이는등 진풍경이 속출했다. 그중 압권은 잡곡을 섞은 생선초밥 (스시) .주요 관광수입원인 일본인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스시에도 잡곡을 섞도록 한 것이다. 관광협회는 73년초 보리로 만든 스시를 들고 김보현농림장관을 찾아가 "먹어보라" 며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순 쌀로 만드는 것을 인정해준 유일한 사례는 경주법주. 청와대 외빈 접대용을 제외하고 전량 수출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서울 P호텔 일식코너에서 근무한 이병환 (李柄丸.50) 씨가 "처음에는 비웃던 일본사람들도 차츰 고개를 숙이더라" 며 들려주는 잡곡 스시 제조담. "보리는 식으면 찰기가 없는데다 조금만 넣어도 검은색이 번져요. 그래서 보리는 조금 넣고 콩.팥.차조로 대신했지요. 국수 삶은 물을 남겨뒀다 생선에다 살살 묻혀가며 말고, 별 꾀를 다 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차조가 골치예요. 이게 초하고는 안 어울리는 거라. 할 수 없이 미리 초를 손에다 묻혀 차조를 피해 비비느라 손이 벌겋게 헤어지고요. 하루 반가마를 그렇게 만드니 배겨납니까. " 우여곡절끝에 달성한 식량자급에 대한 비판도 있다. 농약을 많이 써야 하는 통일벼 때문에 농약중독 피해가 급증하고 메뚜기.미꾸라지등이 들판에서 사라지는등 박정희시대에 농촌의 생태계 파괴가 시작됐다며 "그 피해는 식량자급을 몇년 앞당긴 이상의 후유증을 남겼다" 는 지적이다. 그러나 농업진흥청 전세창 (田世昌.50) 지도관은 "배부르니까 나오는 소리" 라며 "굶주림 때문에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북한의 참상을 보면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느냐" 고 반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