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해 여행가는 길이 콱 막혔다가 2년 만에 풀려가고 있어 어디를 갈까 궁리하던 중, 친구가 슬쩍 추천한 스페인이 맘에들었다. 유럽 여행은 일단 돈이 많이 드니까 우선 순위가 밀리곤 했었는데, 2년 동안 여행 못 가고 모은(?따로 모은 건 아니지만ㅎㅎ) 돈도 있으니 이번엔 큰맘먹고 질러볼까? 유럽 중에서도 겨울에 춥지 않은 스페인이 적당하고 영국 프랑스 스위스에 비하면 물가도 낮은 편이라는 것이 친구의 추천. 물론 볼 게 많은 나라라는 것은 당연한 전제 조건이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로 대표되는 선사시대 유적부터, 아랍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 수백년 된 대성당들, 그리고 천재 건축가 가우디와, 루벤스 고야 피카소 달리, 거기다가 최근에 만들어진 구겐하임 미술관까지...
준비하면서 여행 카페를 둘러보니 유럽이 내가 생각하던 유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매치기가 일상적이고 인종차별이 다반사며 호텔 침대에는 빈대가 있고 길거리에는 거지들이 많다고들 했다. 대도시 치안이 불안하며 기차고 비행기고 시간을 잘 안지킨단다. 이게 사실이라면 유럽이 망할 날이 멀지 않았구나, 어쩌다 이리 됐을까 걱정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대도시에는 경찰차들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중소 도시들은 길거리에 가방 놓고 돌아다녀도 될 만큼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길거리에서는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고, 버스나 기차 짐칸에 가방을 넣으며 도둑을 걱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론 우리가 가보지 못한 슬럼 지구도 있을테고 소매치기나 날치기 범죄가 자주 일어난다니 우리도 조심은 했지. 조심해서 손해볼 건 없잖아? 그런데 너무 조심하다보니 순수하게 사진 같이 찍자는 사람을 의심하는 일도 생기더라는... 하여튼 아군피해 없음. 망하더라도 망할 날은 아직 멀었다고 느꼈다.
스페인이 우리보다 나은 점: 문화유산이 많다. 운전자들이 횡단보도 앞에서 딱딱 선다. 풍력이나 태양광 설비가 많다. 길거리에 전봇대가 없다. 성소수자들이 거리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우리보다 못한 점: 길거리에서 담배를 많이 피운다. 꽁초도 많이 버리고.
바르셀로나 인아웃에 반시계방향으로 코스를 짜다보니 자연스럽게 포루투갈이 포함되었다. 맘만 먹으면 안도라 프랑스 모로코도 포함할 수 있었지만, 도장찍는 게 목표가 아니니 욕심을 버리고 프랑스 땅 변두리에 있는 비야리츠만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우리 프랑스 갔다왔다! ㅎㅎㅎ 그러고보면 유럽 여행이 처음은 아니다. 4년 전에 이스탄불을 다녀왔잖아?
스페인은 인구가 5천만 명이 조금 안되고 면적은 50만 제곱 킬로미터, 남한보다 5배이상 큰 나라다. 그런데 스페인 민족이란 게 없고 스페인어라는 것도 엄밀하게는 카스티야라는 스페인 중심부 지역의 언어일 뿐이란다. 뿌리가 완전히 다른 바스크어는 물론이고, 가는 지역마다 카탈루냐어 아라곤어 레온어 갈리시아어 발렌시아어 등등 지역 언어가 있는데 스페인어의 사투리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언어라고 한다. 갈리시아어는 카스티야어보다 포르투갈어와 더 비슷하다고 하고, 발렌시아어는 카탈루냐어의 방언으로 취급되기도 한다는데, 이정표나 안내문마다 바스크어/스페인어/불어 혹은 카탈루냐어/스페인어/영어나 갈리시아어/스페인어/영어/불어, 발렌시아어/스페인어 같은 식으로 여러 언어가 병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바스크와 카탈루냐는 독립 의지가 높다는데 과연 어떻게 국민통합을 이루고 버텨낼 것인지 아니면 갈라질 것인지 자못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어가 어디서나 통하기는 하지만 일부 지역민들에게는 어설픈 스페인어를 쓰는 외국인이 예뻐보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내적으로는 이렇게 복잡하지만 국외적으로는 통합 유럽의 일원이라 프랑스나 포르투갈 국경을 넘을 때는 국경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나간다.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넘어갈 때보다도 조용하다. 국경을 표시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국경 비슷한 것으로 휴전선밖에 모르는 우리로서는 정말 별세계다. 포르투갈과는 1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신경써야 하는 정도. (스페인은 영국보다 서쪽에 있지만 영국보다 1시간 빠른 서유럽 시간대를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겨울에는 8시가 넘어서 해가 뜬다. 우리나라와는 8시간 차이, 서머타임 기간에는 7시간 차이가 난다. 포르투갈은 영국 그리니지 시간대)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일주하기로 하고 도하 경유 바르셀로나 인아웃하는 카타르항공 표를 샀다. 인당 왕복 130만원, 아시아나 직항보다 20만원 이상 싸고 출도착 시간대도 괜찮다. (밤 출발 낮 도착, 낮 출발 낮 도착). 단점이라면 물론 경유라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 직항은 14시간 반이면 가는데 당시 경유편 중에서는 가장 빨랐던 우리 비행기는 가는 데 20시간 20분이 걸렸다. (10시간 50분 비행 후 경유 2시간 반, 다시 7시간 비행). 올 때는 편서풍의 도움을 받아 17시간 15분(경유 3시간 포함). 14시간 계속 타는것보다 10시간/7시간 나눠 타는 게 낫다는 속설에 기대어 경유편을 정당화했는데, 결과적으로 장시간 비행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으니 잘된 셈이다.
바르셀로나 2박 - 사라고사 2박 - 산세바스티안 3박 - 빌바오 2박 - 부르고스 2박 - 살라망카 1박 - 레온 2박 - 폰페라다 1박 - 라코루냐 1박 - 산티아고 델 콤포스텔라 1박 - 포르투 3박 - 리스본 3박 - 파루 1박 - 세비야 4박 - 코르도바 1박 - 말라가 2박 - 그라나다 2박 - 마드리드 5박 - 발렌시아 3박 - 바르셀로나 5박
숙박비도 엄청 올랐다고 해서 잔뜩 걱정을 했는데, 경비 절약할 곳은 숙소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다. 시설의 최소 조건은 화장실이 달린 2인실, 구글 평점이 4는 넘어야 하고, 주요 관광지까지 걸어갈 수 있는 위치 -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저렴한 숙소중를 열심히 찾아냈더니 46박에 총 380만원이 들었다. 평균 8만원이 조금 넘은 수준, 동남아나 튀르키예에 비하면 3배가 넘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다. 결과는 대부분 기대 이상의 만족스러운 숙소여서 더 싼 델 찾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났을 정도. 대도시는 상대적으로 방값이 비싸서 바르셀로나 숙소들은 하루 10만원 정도(도시세 포함) 줬고 마드리드에선 13만원을 줬는데 모두 그럭저럭 4점짜리는 됐고, 중소 도시의 6-8만원대의 숙소들은 거의가 5점을 줄만했다. 말라가 숙소만 방이 작고 침대가 작아서 3점. 유럽 각지에서 숙박비외에 도시세를 추가로 받고 있다는데 스페인에서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만 인당 박당 3유로를 받았다. 포르투갈에서는 리스본에서 12유로 (2인 3박, 2유로씩), 포르투의 아파트형 숙소에서 8유로 (2인 3박, 왜 8인지 계산이 안나옴)를 주었다.
도시간 이동은 주로 버스를 이용했다. 명절이면 특별 열차를 투입하는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이 나라들은 주말과 명절에 차편이 줄어든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후와 연말연시에는 미리미리 이동편을 준비해야 했다. 시간대마다 버스비가 다르고 날에 따라서도 다르며 언제 끊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이상한 나라. 주로 ALSA 버스를 이용했는데 단골이라고 바우처도 주고 노인표도 가끔 주고 해서 고마웠지만, 가끔 같은 노선에서 Flix 버스가 더 싸게 나와서 Flix도 몇 번 탔다. 마드리드 - 발렌시아 구간은 고속철도가 빠르고 저렴해서 기차를 탐.
단거리 이동을 포함해서 버스와 기차에 들어간 총 비용이 130만원. 역시 동남아에 비하면 3배쯤 들었다.
그리고 관광지 입장료가 역시 130만원 정도.
자랑할 게 많은 문화 강국이라지만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 웬만하면 10유로 20유로 달라는데 들어가는 데마다 다 감동적인 건 아니라구요.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서 보는 게 옳은 줄은 알지만, 입장료를 너무 준다는 생각에 "그냥 외관만 볼래"하는 경우도 생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통화는 물론 유로고, 카드 사용이 활발해서 현금이 거의 필요없을 정도다. 그러나 미사 헌금통이나 버스킹 돈통에는 아직 카드가 설치되지 않았고, 일부 작은 박물관에서 현금만 달라는 경우가 있었다. 시골 버스에서도 현금만 통하는 경우가 있었고 구엘공원 매점에서도 3유로 이상만 카드를 받는다고 했으니 현금이 아주 없으면 살짝 곤란하기는 하다. 리스본에서는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포르투갈 카드만 받는다는 억지를 부려서 할수없이 ATM에서 현금을 인출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효자 노릇을 한 카드가 있다. 트래블월렛이라는 외화전용 선불카드인데 원화 통장과 연결해 놓고 수시로 필요한 외화로 충전(환전)해서 체크카드처럼 사용하고, 현금 출금도 할 수 있는 카드다. 중요한 것은 원화에서 외화로 바꿀 때 수수료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환전우대율 100%라는 것. 덕분에 20만원 정도 절감할 수 있었다. 이거 광고인가? 트래블로그라는 비슷한 카드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은행 계좌만 연결할 수 있다고 하더라. 앞으로 더 좋은 서비스들이 나오길 바라며.
스페인은 식당 물가가 비싸고 마트 물가는 싸다고 들었다. 그래서 준비한 카드가 미니미니 밥솥. 딱 두 공기 밥을 할 수 있는 작은 밥솥을 들고 가서 매일 저녁을 해 먹었다. 반찬은 준비해 간 쌈장(현지 아시아마트에서 보충)과 현지마트에서 산 상추와 chorizo (썰어놓은 소세지?) 가끔은 문어나 오징어. 마트 소고기 값이 싸다고 해서 잔뜩 사다가 구워 먹을 작정을 했지만, 고기 구울 수 있는 숙소는 두 군데밖에 없었고 마침 그 근처에는 큰 마트가 없어서 소고기는 못 구워 먹었다. 돼지고기만 한 번.
아침은 숙소에서 빵과 치즈, 요구르트, 잼, 과일, 커피 등으로 해결하고 (호텔 조식이 7-12유로 정도 했는데 한 번도 안 사먹음), 점심은 식당에서 사먹었는데, 처음에는 이 사람들 식사 시간에 적응을 못해서 많이 헤매기도 했다. 12시에 갔더니 1시에 오라 하고, 다른 식당은 1시에 갔더니 2시에 오라 하고, 어디는 2시에 갔더니 5시에 오라 하고, 어디는 5시에 갔더니 문이 닫혀있고 7시에 연다 하네. 손님들 여러 테이블에 앉아서 먹는 거 보고 들어갔는데도 주방이 끝나서 술만 판다고도 하고... 밥먹기 힘들어서 빵집으로 가기도 했다. 거긴 하루 종일 먹을 걸 파니까.
차츰 적응을 해서 문 연 식당을 찾아 스페인 음식을 먹어보니 맛있는 음식도 많지만 음식이 짠 곳이 많았다. 미리 덜 짜게 해달라고 요청한 경우에도 짠 음식이 나올 정도. 그러면 스페인 음식은 다 짜다? 그러나 물론 그건 아니다. 짜지 않고 맛있는 경우도 많았으니 일률적으로 sin sal 소금 빼라! 이라고 외칠 일은 아니다. 각 지역의 특색 음식을 먹어보겠다고 메모는 해갔지만 못 먹어본 게 많다. 그런가하면 우연히 들어간 콜롬비아 식당에서 맛있게 먹기도 했고 아스투리아스 요리를 한다는 식당에서는 듣도보도 못했던 암소 골수 요리라는 것을 먹어 보았다.
아침 저녁 해먹고 점심 사먹은 비용을 모두 합치면 260만원. 어마어마하게 먹었네. 하지만 1인당 하루 10만원 잡으라던 카페 회원님들의 조언과 비교하면 1/3도 안 들었잖아. 밥솥 덕을 많이 봤다.
46박 49일 이베리아 반도 여행 총 경비는 (소소한 쇼핑 제외하고) 1200만원 정도. 큰 돈을 썼지만 상대적으로 조금 쓰고 잘 다녀왔다는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