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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3. 모세의 찬양과 마라의 단물
2021. 5. 15. 이래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요즘 그 생각을 많이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그런 사건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저렇게 건재하고 있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 인생에 유익하도록 소화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출애굽 사건이 다 그러하다. 지난번에 기적에 대해 말할 때 말씀드렸는데 그 사건 자체를 생각하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는가. 그 백성이 가까스로 애굽을 빠져나와서 가는 길에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런 난관에 봉착했는데 그때 홍해가 갈라져서 통과했던 것이다.
이것을 출애굽기에 너무나 극적으로 묘사해 놓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홍해 길로 가는데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쫓아와서 맞부딪치게 되었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둘 사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무사히 건너오도록 인도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앞에서 인도하다가 애굽의 군대가 홍해 중간쯤까지 쫓아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접근하게 되었을 때 구름기둥이 뒤로 물러서서 이스라엘과 애굽의 군대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밝은 길로 왔고 애굽의 군대는 흑암에 가려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제주에서 한번 그런 구름을 보았다. 한라산을 넘어갔다 오는 길에 갑자기 새카만 구름이 앞을 덮었다. 짙은 구름에 쌓이니까 칠흑같이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카맣게 되어서 헤드라이트가 5미터도 비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차를 세워야 했다. 그런 것이 흑암이다.
애굽의 군대가 아무리 말을 타고 별짓을 다한다 해도 앞이 막히니 어떻게 가겠는가.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에 이스라엘은 밝은 길로 건너왔고 다 건너오고 나니까 양쪽에 쌓여있던 물벽이 허물어지면서 애굽의 군대가 몰사했다. 물벽이 허물어지는데 말이 소용있겠는가, 기병이 소용있겠는가. 그대로 다 몰사했다. 이 이야기를 사실대로 해석하면 너무나 신나는 이야기다. 전쟁이라고 생각하면 세상에 그런 전쟁이 어디 있겠는가. 이스라엘은 이 감격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 미리암의 노래가 나온 것이다.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이런 노래가 출애굽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시편이다.
시를 읽을 때는 산문을 읽듯이 하면 안된다. 시는 감격 속에 쓴 것이고 영감과 감정과 비전이 포함된 새로운 문학이다. 평면적인 문학이 아니고 입체적이고 평소에 생각할 수 없는 시상이 떠올라야 나올 수 있는 것이기에 시는 일반 문학과 다르다. 시는 문학 중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중국 고전에 사서삼경이 있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이 사서고 시전, 서전, 주역이 삼경이다. 경(經)이라는 말은 베틀에서 세로 줄인 날줄을 의미한다. 성경(聖經)이라고 할 때 경이 그런 뜻이다. 바이블이라고 하는데 바꿔질 수 없는 것, 불변하는 것, 신의 명령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시를 읽을 때는 그런 감동으로 읽어야 하고 성경도 마찬가지로 날줄과 씨줄이 있는 셈인데 날줄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씨줄은 사람에 의해서 왔다갔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홍해를 건넌 것은 ‘이런 일이 어찌 있겠느냐!’라고 할 일이다. 이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천하무적이 아니겠는가? 누가 당하겠는가. 이런 일이 하나님의 백성 앞에 있다면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보기 어렵다.
다윗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오랜 역사에서 왕국을 세워 유명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국을 세웠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 때에 나라가 둘로 양분되었고 그 다음부터 지리멸렬한 상태였다가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유다왕국은 BC 587년에 망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시편에 있는 대로, 이 노래대로 왜 안될까? 왜 이런 세계가 안오는가?’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이런 희망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원하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얼마나 기대를 갖고 있었겠는가.
그들은 지금도 통곡의 벽에 서서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주먹을 치면서 통곡한다고 한다.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특이한 백성인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원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소망한 것이다.
우리도 이 소망을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이 소망 속에서 나온 것이 계시록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쓴지 이천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어찌된 것인가?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의 생각대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나서 마지막에 얻어진 것이 사람의 구원이다.
왜 모든 것이 안되는가? 그 원인은 전부 사람에게 달렸다. 왜 그런 승리, 그런 영광이 오지 않는가? 동산을 나온 인간으로는 안된다. 무슨 수를 써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육신적으로는 될지 몰라도 우리가 출애굽기를 보면서 ‘이런 일이 어떻게 생기겠는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육신적으로는 초능력적인 무기가 개발되어서 하루아침에 중국이라도 꼼짝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남북이 기적적으로 통일된다 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나라가 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그 세계가 오지 않는다. 어떤 기적을 통해서 국가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역사적인 문제가 풀린다 해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나라는 오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다투고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큰 나라끼리 마음만 맞추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편안히 살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궁극적인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만이, 이 복음만이 영원한 것이다. 사람이 바뀌어서 다른 나라가 되어야 되지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환경만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이 두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처음 둘로 갈라질 때 힌두교를 믿을 사람은 인도로 가고 모슬렘을 믿을 사람은 파키스탄으로 가게 했다. 그때 삼천 만 명이 이동을 했다고 한다. TV에서 보았는데 두 나라는 1년에 한 번씩 국경을 열고 양쪽 근위대가 나와서 거기서 쇼를 한다. 양쪽에서 관람객들이 보고 있다가 쇼가 끝나면 문을 닫는다. 정말 평화로운 풍경이다. 불교권이라서 그런지 서로 갈라질 때도 그렇게 평화롭게 전쟁이 없이 갈라졌다. 그런 일도 드문일이다. 인도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럴 때는 힌두교가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북한에 갈 사람은 가고 남한에 올 사람은 오면 아주 간단한 문제고 싸울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안된다. 그래서 인도 사상이 발전하면 전쟁없이 평화롭게 되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렇게 되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이 하나님 나라가 되었는가?
여기서 영적인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사람이 달라져야 세계가 달라지지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데 세계가 달라지겠는가. “평등, 평등” 하지만 사람이 그대로 있는데 평등이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평등하려면 무력이 있어야 한다. 무력이 없으면 평등이 불가능하다. 물질적인 평등이 오면 자연히 권력의 불평등이 생긴다. 권력이 똑같으면 물질적인 평등이 되겠는가. 누군가는 감독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물질이 평등하면 권력이 평등해지지 못한다. 평등해지면 좋을 것 같지만 저절로 되겠는가.
그러나 구속 안에는 그런 불만이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우리의 평등은 그런 문제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다. 진정한 모세의 노래가 완성되는 날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발견되는 날이다. 그 안에서 발견되면 싸우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왜 싸우는가? 싸우지 않을 수 없어서 싸우는 것이지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왜 싸우느냐고 물어보면 “이런데 싸우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한다. 싸우기 싫은데 싸운다는 것이다. 용병이 그런 것이다. 용병이니까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어도 싸워야 한다. 사람이 꼭 그런 것 같다.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것이다.
핏불테리아는 죽을 때까지 싸운다고 한다. 두 놈이 싸우는 것을 보니까 싸우다가 지치면 두 놈이 서로 기대고 누워 있다가 힘이 생기면 일어나서 또 싸운다. 그대로 두면 둘 중 한 놈이 죽는다. 죽을 때까지 싸운다. ‘야, 저놈은 죽으려고 태어났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것이 용병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까 싸우는 것이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싸울 필요가 없다. 뭐하러 싸우겠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 외에는 싸우지 않을 방법이 없다. 모세의 노래를 보면서 이런 심각한 문제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불렀으니 얼마나 감격적인 날인가!
이 날이 지난 다음에 그들은 마라에 이르렀다.
마라에 이르렀는데 물이 써서 백성들에게서 원망이 나왔다. 물이 쓰면 원망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물을 못먹는데 사람이 살겠는가. 당연한 일이다. 생기지 않을 일을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모세가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다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방금까지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물이 쓰니까 도로 원점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인간의 문제가 있고……, 이것이 출애굽기다. 요즘 사람들 같으면 ‘그래도 끝까지 믿음을 갖고 있어야 되지 믿음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그 자리에서 믿음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물이 써서 못먹는데 믿음으로 견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믿음으로 물을 마시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밥은 굶어도 사십 일은 살 수 있지만 물을 못먹으면 열흘을 못견딘다. 이것은 생명에 관계된 문제지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다.
나무를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다는데 이 ‘나무’는 히브리어 원문을 찾아 보면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라 제재목이다. 이 단어를 창세기에는 살아있는 나무를 말할 때 썼다. 그런데 출애굽이 이후 대부분의 성경에서는 이것을 그냥 나무, 목재, 판자, 기둥을 말할 때 썼다. 산 나무를 꺾어 던지라는 말이 아니라 목재, 나무, 몽둥이 같은 것, 기둥 같은 것을 던지라고 해서 던졌는데 물이 달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나무가 쓴 인생을 달게 해 주겠는가. 어떤 나무가 우리 인생을 뒤바꿔 줄 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말할 때도 역시 같은 단어를 썼고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도 역시 같은 단어를 썼다. 특이하다. ‘나무’는 십자가라고 해석하면 좋을 것 같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하였다(신21:23). 십자가라는 말은 로마시대에 나온 말이고 원래는 그냥 나무다. 나무 기둥에 매달아놓으면 저절로 죽었다. 그것이 십자가로 변형된 것이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인데 그로 인해서 우리가 구속을 받지 않았는가! 내 쓴 인생이 달아졌다. 쓰기만 하던 인생이 달아져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싶게 되었다.
예수님이 “내 살을 먹으라.” 하셨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선생님의 살을 먹겠는가?’라며 수근거렸다. 그렇지 않겠는가. 멀쩡한 사람을 놔두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영생할 것이라.” 하셨지만 누가 그것을 먹겠는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질 수 없는 그것이 사람을 살린다. 역설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동산 밖에 나온 사람에게는 다 역설이다.
물 속에 있는 일과 물밖의 일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역설이다. 토끼가 용궁에 들어가서 “나는 간을 나무에 달아매 놓고 왔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간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왔다는 것이다. 용왕이 생각해 보니 모르겠지만 세상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별주부를 오라 해서 토끼를 육지에 데려가서 토끼 간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육지에 나온 토끼가 “야, 이 미련한 별주부야. 어떻게 간을 내놓고 다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세계가 다르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동산 안에 있던 세계를 모른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은 저주인 것이다. 그 외에는 알 수 없다. 우리도 달리면 죽으니까 당연히 저주라고 믿는다. 십자가에 달리면 죽는다고 가르쳐 줘야 죽는다고 알겠는가. 안가르쳐 줘도 다 안다. 우리가 볼 때 십자가는 저주다. 그러니까 다 버리고 갔지 그것이 축복으로 보였으면 버리고 갔겠는가.
만일 그것이 축복으로 보였다면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가져갔을 것이고 빌라도가 그 다음에 가져갔을 것이다. 유명한 사람들이 다 가져갔지 그냥 놓아두었겠는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다른 데 사용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지만 영생을 얻었다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주일학교 때부터 외웠는데 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경에 있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마지막 하신 말씀도 세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 살을 먹으면 영생한다.” 하셨다. 아직 안먹어봤으면 모르는 일인 것이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신 것이 맞지 않는가. 이미 주셨다. 그런데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내 살’을 먹지 않았으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기독교가 이천 년 동안 전파한 복음이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경을 읽어 보면 성경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공상만화는 이루어지고 있다. 만화는 이루어지는데 성경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사람들이 만든 것은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람이 구속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 번도 터치를 안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구속했다.” 이 말은 대가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속이니까 그 대신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이 어렵다. 분명히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 효과가 나지 않는다. 성경에는 내 대신 죽으셨다고 되어 있는데 나에게는 효과가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안가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고민했다. 왜 안되는가? ‘다른 사람은 잘 믿는데 나는 왜 믿어지지 않는가.’ 하고 고민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들을 보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못믿는 나만도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위선자들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면서 남에게 “안믿으면 지옥간다. 안믿으면 안된다.”고 강요한다. 그러니 욕을 안먹겠는가.
그렇게 믿었으면 달라져야지 하지 않겠는가.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으니 믿으면 달라져야 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너희는 그렇게 믿고서 무엇이 달라졌느냐?”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주일 날 예배당에 가는 것밖에 달라진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쓴 물에 나무를 넣으니 물이 달아졌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우리 쓴 인생에 이 나무 하나만 들어오면 다 해결이 되어 버린다. 신기한 일이다. 나무 하나만 들어오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버렸다. 쓴물에 던지라고 나무를 주셨는데 그 나무를 던지지 않는다. 그러니 물이 달아질 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가 그를 버렸으니 쓴 인생이 달아지겠는가. 믿으나 안믿으나 똑같다. 별 차이가 없다. 겉만 달라졌지 속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신기하다. 안될 것이 된다. 예수님이 죽었으면 실패한 것인데 그것이 성공이다. 거기서 성공이 되었다. 거기서 참 인생이 드러났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 참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참 사람이 무엇인지 몰랐다.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비까번쩍한 옷을 입고 다녀야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십자가에 죽었으니 사람이라고 생각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안에는 만유가 포함된다. 신기한 일이다. 미생물 하나라도 포함되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고하고 높은 사람 속에는 아무도 포함되지 못한다. 석가모니가 위대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포함될 수 없다. 공자님도 위대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포함되지 못한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실패한 이 사람 속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된다. 석가모니 안에서는 영원히 하나가 안된다. 평등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된다. 공자님 안에서도 하나가 안된다. 계속 힘쓰고 노력할뿐이지 하나가 안된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당장 하나가 된다. 나무를 던지니 물이 달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역설이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낳은 것, 이것이 역설이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축복을 잘못했는데 그것이 옳게 한 것이 되었다는 것, 이것이 역설이다.
우리 생각에는 이삭이 잘못 축복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삭은 너무 호강스럽게 자라서 한 번도 인생의 고난을 겪지 않았고 연단을 받지 않아서 그랬다고 해석한다. 사람은 연단을 받아야 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해석이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경륜이 틀려버린다.
하나님은 이삭을 주셨다. 이삭은 하늘로부터 온 자다. 하늘로부터 온 자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하셨다. 아브라함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한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는 하늘로부터 온 자다. 하늘로부터 온 자는 눈을 감으나 뜨나 매 한가지다. 하나님이 쓰시니까 따로 실수할 수 없다.
오히려 이삭이 기력이 왕성해서 눈이 밝았으면 에서를 축복했지 야곱을 축복했겠는가. 그러니까 눈을 어둡게 해서라도 야곱을 축복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실 때가 있다. 나를 어리석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실 때가 있다. 나를 미련한 사람이 되게 해서 쓰실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미련해지면 안되지.’ 하면 쓰이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쓰시도록 두면 미련하면 미련한대로 쓰시고 지혜로우면 지혜로운대로 쓰신다. 내가 스스로 지혜로우면 될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그렇다고 멍청해지라는 말이 아니다. 멍청할 수도 있고 지혜로울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쓰시면 된다.
내가 아무리 ‘이 정도면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이 안쓰시면 쓰일 수 없는 것이다. 학력을 다 갖추고 요즘 교회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춘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 큰 교회는 박사 학위가 없으면 못간다고 한다. 큰 교회에 청빙받으려면 조건이 아주 까다롭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쓰시는가? 그렇지 않다. 나도 옛날에는 이런저런 조건을 갖춰야 하나님이 쓰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공부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갖추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갖추었기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니다.
참 기이한 세계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던 기이한 세계에 와 있다. 바울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이 하셨으니 복음이다. 어떻게 홍해를 건너왔을까! 건너오게 하셨으니 건너왔을 것 아닌가. 어떻게 쓴 물이 달아졌을까! 달게 하셨으니까 달아졌을 것 아닌가. 이것이 복음이다.
다 똑같다. 우리를 구속했으니까 복음이지 왜 복음이겠는가. 지금 우리는 그 안에서 누구든지 구속을 받았다.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참 사람이구나. 내 원형이구나. 내가 원래 동산에 있을 때 저런 사람이었구나.’라고 알면 즉시 구속된다. 모든 죄에서 해방된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던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많은 계명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켰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에 대한 개념은 율법에서부터, 율법을 지킴으로부터 온 것이다. 로마서에서도 법이 없었으면 범함도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법이 없으면 당연히 범법도 없다. 교통법규가 없으면 교통사범은 하나도 없다. 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다. 이상하게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고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세상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놓고 사람이 거기 제한을 받고 있다. 스스로 올무에 걸려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런 법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교통 법규를 만들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만들어놓고 제한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 모든 올무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원 인간’을 찾는 것밖에 없다. 그 사람이 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기독교는 율법을 버리고 왔다고 하지만 율법을 버리면 야만이 되고 만다. 그리고 도올 같은 사람들은 이적은 다 신화 같은 옛날이야기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만 복음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한 가지나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싶다. 한 가지도 못지킨다.
율법에 대해서 물으니까 예수님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두 가지밖에 안되니 너무 쉽지 않은가.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옳습니다.” 하고 “아멘” 했지만 되겠는가. 못지킬 말씀이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것을 예수님 말씀이라고 좋다고 따라 한다. 산상수훈을 두고 보훈(寶訓)이라고 하고 전 성경의 히말라야 봉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주다. 한 개도 못지킨다. 산상보훈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만 한 개도 못지킬 복음이다. 말씀은 맞는데 못지킨다.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말은 맞는데 못지키니까 아니라 하지도 못한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아닙니다.”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는데 “아닙니다. 틀렸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율법과 십계명을 요약하면 이 두 가지만 남는다.
하나님 말씀은 역설이다. 우리는 지금 불가능한 것 같은 세계를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는 전혀 안될 일,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구속을 말해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을 왜 저렇게 자꾸 얘기하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이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믿으라는 하시는가!
나는 옛날에 믿음이 없어서 ‘어떻게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더구나 CCC에서는 맨날 믿음을 강조하는데 나는 그런 믿음이 안생겼다. 그래도 맨날 부르짖는 것이 큰 믿음이었다. 김 목사님도 큰 믿음을 강조하셨다. 보험회사를 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오늘 가면 틀림없이 한 사람은 계약을 맺는다. 한 사람은 된다.’ 이 믿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 보험회사다.
충주 있을 때 바로 옆에 보험회사가 있었는데 아침마다 난리였다. 노래부르고 박수치고 마지막에 나갈 때는 할렐루야 하고 나갔다. ‘오늘은 한 사람은 된다.’고 믿고 나가야 되니까 매일 그 용기를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교회가 커질 것이다. 오십 명만 있어도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고 나가면 그 교회는 금방 커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교회인 줄 알지만 그것은 보험회사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갈 길을 이루어 놓은 것,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놓은 것, 이것이 복음이다. 나로서는 구속을 받을 수 없다. 그 자체를 모르니까 안다 해도 못간다. 그런데 예수가 이루어 놓으셨다. 그가 이루어놓으셨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집을 다 지어놓으셨으니까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문패까지 다 붙여 주셨으니까 들어가면 내 집이다. 등기부에 올려놓고 문패까지 붙여 주었는데 무엇을 어떻게 더 해 주겠는가. 의심되면 등기부등본을 보면 된다.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복음은 바꿀 수도 변경할 수도 없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내가 죽도록 노력해 봤자 해도 해도 안되는 일밖에 없다. 창세기 3장에는 네 앞길에는 가시덤불뿐이라고 하셨다. 해도 해도 되는 것이 없다. 가시덤불은 해마다 나온다. 씨를 뿌리지 않고 수고 하지 않아도 계속 나온다. 오늘 깎아 놓으면 내일 또 나온다. 잔디밭에 잡초를 뽑아 보니 매일 뽑아야 할 것이 나왔다. 각북에 있을 때 잔디밭이 크니까 둘이 앉아서 매일 풀 뽑기를 했는데 매일 뽑아도 매일 나왔다. 그렇게 해 주니 주인이 아주 좋아했다. 집을 잘 관리해 준다고 그 집을 팔게 되면 우리에게 팔고 싶다고 했다.
세상은 잡초밭과 같다. 계속 뽑지 않으면 안된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에 세 번 살피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을 살핀다고 되겠는가. 다섯 번을 살펴도 안될 것은 안된다.
이 나무를 기억하자. 어떤 나무를 지시해 주셨는데 지시하신 그 나무를 넣으니 물이 달아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지시하신 나무가 십자가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내 인생은 씁니다. 써서 못살겠습니다.”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저 나무를 네 인생에 넣어라. 그러면 된다.” 하시지 않겠는가. 또 다른 말을 하신다 해도 내용은 이것이다. 다르게 말씀하시더라도, “너는 대구교회에 가라.”라고 말씀하셔도 그 말이 그 말이다.
대구교회에 와도 이것이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대구교회가 다른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이것 한 가지밖에 다른 것이 없다. 지금 하나님께 “내 인생이 씁니다. 도저히 못먹겠습니다.” 하며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갖다 넣으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한 나무를 갖다 넣으라고 하신다. 뭐라고 말씀하셨든지 간에 그 한 나무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다. 대구 교회에 가라 하셨어도 십자가 있는 데로 가라는 말이니까 대구교회에 와서도 이것을 피해가면 헛일이다.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이런 신기한 세상을 살고 있다. 세상이 볼 때는 전혀 안되는 일, 불가능한 일을 우리는 믿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 보면 참 이상한 것은 그대로 된다. 안될 것 같은데 가보면 그대로 된다. 이것을 우리가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쉬워진다.
나는 교단에서 까닭없이 제명되었다. 내가 모르는 일로 나를 제명했던 것이다. 그때 너무 억울했다. ‘이럴 수 있나!’ 그런데 두세 번 겪는 동안에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충주로 갈 때도 그러했다. 의정부로 가기로 약속되었는데 그날 아침에 발령장을 읽는데 충주로 가라는 것이었다. 합판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놓고 각 지구에 못을 박아놓았는데 촛불을 자기가 갈 곳에 꼽으라고 하기에 나는 약속된 대로 의정부에 꼽았다. 그런데 부를 때 보니 충주였다. 어떤 사람이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나는 충주로 밀려났다. 그래서 충주 형제들을 만났고 충주 형제들을 만났기 때문에 위치만 니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충주로 가지 않았으면 못만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급한 일도 없고 바쁜 일도 없다. 내가 설교를 하면 다 좋다고 했으니까 답답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충주에 가서 설교를 하니까 듣는지 안듣는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콱 막혔던 것이다. 그때야 답답했다. 그 전에는 답답한 일이 없었다. 일은 답답해도 하나님 말씀 때문에 답답한 일은 없었다.
충주에서도 청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청주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본부에 가니까 “대구로 좀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주로 가려던 사람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구로 오게 된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갈 청주로 어떤 사람이 밀고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또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도 한번 경험해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리고 대구에 있다가 쫓겨났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오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는데도 때가 되어서 나가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대구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다. 경험을 해 보니 신기하다. 밀리고 밀렸는데 어떻게 여기 와 있는가! 계속 밀렸는데 어떻게 왔는가!
나는 안아프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병원에 들어가서 죽었다 살아났다. 그런데 번쩍 이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랬으면 이 생각이 안났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 주님의 부르심 안에서는 한 개도 헛된 일이 없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래도 절대로 헛된 일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 생애도 마찬가지다. 밀리기도 하고 욕도 얻어먹기도 하고, 어찌 하다 보니 십자가까지 밀려가셨다. 그래서 죽으셨다. 다 끝나버린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남아서 예수님이 끝난 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버리고 간 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구속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천 년 동안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말이 없다. 찾아보니까 그 유명한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말이 전혀 없다. 나는 전에 이런 줄 모르고 그들이 하는 말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잘 안되니까 내가 검사해 보게 된 것이다. 안되니까 한 것이지 여러분이 처음부터 다 아멘했으면 나는 그런 신학자들이 뭐라고 했는지 찾아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만족하니까 나는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앞이 막히니까 ‘아이고, 왜 이런가? 다른 사람은 뭐라고 했는가?’ 하고 찾아보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망설였던 것이다. 망설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들도 말을 안해 놓았고 처음 듣는 말이니까, 더구나 나 같은 사람이 말하니까 당연히 망설였던 것이다. 굉장한 사람이 말했으면 몰라도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말하니까 ‘저것이 진짜일까, 저것이 전부일까? 저것이 마지막 복음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통해 또 한발짝 발전하게 되었다. 절대로 손해 볼 일은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할렐루야! 무슨 일이 되어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다 옳게 써 버리시는데 어찌하겠는가. 물이 쓰면 달게 만드실 것이고 홍해가 있으면 갈라지게 하실 것이니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이런 일이 없이 그냥 왔더라면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가 가라고 해서 그냥 잘 나왔으면 아무 것도 없을 것 아니겠는가. 가라 해 놓고 또 쫓아오고 했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가 그때는 할 수 없으니 나가라고 보내 주었지만 보내고 생각해 보니 ‘내가 속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또 쫓아오면서 ‘이제는 너희가 꼼짝 못하겠지.’ 했는데 자기들만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고생은 했지만 광야 사십 년을 이렇게 왔으니 할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옛날에 전쟁 때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전쟁판에서 온 사람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옆에 포탄이 떨어지는데 그런 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오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이야기를 들었다. 편안하게 육군본부에나 있다 온 사람은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지만 전쟁 통에서 안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았다.
나도 할 말이 너무 많다. 그것이 다 내 밑천이고 재산이다. ‘아예 고생 안하는 것이 낫지.’ 하고 살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앞으로 이 흥미진진한 광야 길을 우리가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