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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죄
죄는 불법이라.(요일3:4)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싶다면, 죄라고 하는 엄청난 주제를 고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를 깊이 파야 합니다. 기초가 잘못되면 치명적인 해를 입기 때문입니다. 거룩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은 주로 인간의 타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에 대해 몇 가지를 분명히 언급하고, 거룩에 대해 계속해 가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독교의 뿌리는 죄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는 것이 명백한 진리이다. 이 자식이 없는 칭의, 회심,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언어와 명칭”(행18:15)의 문제에 불과할 뿐, 그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이 되게 하실 때, 가장 먼저 그 마음을 조명하여 자신이 죄책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하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물질적인 창조가 “빛”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창1:3), 영적인 창조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심으로 영적인 생명이 시작됩니다(고후4:6). 오늘날 대부분의 오류와 이단, 거짓 교리는 죄에 대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 영혼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짓되고 불완전한 치료책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이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19세기 교회를 통틀어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죄에 대한 더 분명하고 온전한 가르침입니다.
1. 죄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이 주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 “죄인”이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세상에 실존하는 “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죄” 지은 사람에 대해서도 자주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말합니까? 이런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합니까?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지적인 혼란과 모호함이 있다는 사실이 두렵습니다. 가능한 한 간명하게 죄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성공회 종교강령 제9조에서 천명하는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죄”는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죄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본성적으로 야기되는 것으로, 각 사람에게 있는 본성의 타락과 거짓됨을 일컫는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원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에서 아주 멀리 떠나 있고, 본성적으로 악을 향해 기울어져 있어서, 육체의 소욕이 항상 영혼의 소욕을 거스린다. 그러므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를 받을 만하다.
요컨대, 죄는 계층과 지위, 이름과 나라, 백성과 방언을 막론하고 온 인류에게 드리워진 엄청난 도덕적 질병입니다. 여인에게서 난 자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법에 완벽히 합치하지 않는 모든 상상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죄”는 “불법the transgression of the law”입니다(요3;4). 우리 안팎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성품에 완벽하게 합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사소하고 미미한 불일치도 죄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목전에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주의 깊게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현저하게 드러나는 사악한 행위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그 점을 명백히 하셨습니다(마5:21-28). 심지어 한 시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웃으면서도 악한(惡漢)일 수 있다.”
신약성경을 면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죄에는 행함commission으로 짓는 죄와 행하지 않음omission으로 짓는 죄가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공동 기도서를 통해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함”으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간과함”으로 죄를 짓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마25:41-42). 경건한 어셔 대주교는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에, 참으로 심오하고도 사려 깊은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되, 특별히 내가 하지 않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하지만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할 수도 있고, 죄책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죄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죄로 알고 의식할 수 있을 때까지, 죄는 우리에게 죄가 아니다”는 현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 어떤 증거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부당하게 홀대받은 책인 레위기 4장과 5장, 그리고 민수기 15장은 무지에서 비롯된 죄 역시 백성을 부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속죄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레4:1-35, 5:14-19, 민15:25-29). “그 주인의 뜻을 몰라서 행하지 못한 종”이라 할지라도 그 알지 못한 것 때문에 죄를 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역시 “매를 맞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우리 주님은 분명히 가르치십니다(눅12;48). 비참하리만큼 불완전한 우리의 지식과 자각만으로 자기 죄악됨을 헤아리는 척도로 삼으려 한다면, 이는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레위기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면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2. “죄”라고 불리는 이 엄청난 도덕적 질병의 근원과 원천에 대해 몇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너무나 불완전하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어 두렵습니다. 이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우선 인간의 죄악됨은 밖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해둡시다. 어렸을 때 잘못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닙니다. 나약한 그리스도인이 되뇌는 말처럼 나쁜 친구들이나 그릇된 본보기에서 기인한 것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과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창1:26-27) 죄가 없고 의로웠던 우리의 첫 조상이 원래의 의에서 떨어져 죄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남자와 여자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고, 악을 향해 치닫는 본성과 마음을 물려받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5:1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입니다.(막7:21). 갓 태어난 천진난만한 아기를 보고 가족들이 “천사”같다고 하고 “때묻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 아이도 어린 “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 요람에 누어 방긋 미소 짓고 까르르 웃기도 하는 이 작은 피조물이 그 마음에 온갖 종류의 사악한 종자를 다 갖고 있다니요! 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살펴보면, 그 키와 생각이 자라감에 따라 악한 것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반면, 선한 것으로부터는 늘 뒷걸음질 치는 성향이 있음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 속임과 악한 성량, 이기심, 방자함, 완고함, 탐욕, 시기, 질투, 정욕의 싹과 조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탐닉하도록 내버려 두면 엄청난 속도로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누가 이 아이를 가르쳤습니까? 이 아이는 어디에서 그런 것을 배웠습니까? 성경만이 이 물음에 대답을 줍니다! 자기 자녀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어리석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내 아이는 원래 바탕이 착한 아이인데 나쁜 아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어. 공교육이 문제야.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소홀해서 그렇지, 원래는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반대입니다. 모든 죄와 첫 번째 원인은 그 아이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지 결코 학교나 친구 때문이 아닙니다.
3. 인간에게 있는 이 엄청난 도덕적 질병인 “죄”의 정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만이 죄의 정도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본성적으로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6;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입니다(렘17:9). 죄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성향과 지적 기능에 창궐한 질병입니다. 사고와 정서, 추론의 능력과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양심조차도 확실한 안내자로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워져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양심 역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입니다. 요컨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습니다(사1:6). 공함과 예의 바름, 점잖은 매너, 단정한 몸가짐, 교양 등과 같은 얄팍한 덮개로 죄라는 질병을 가릴 수는 있지만, 죄는 이미 성향과 체질에까지 깊이 전이되어 있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많은 위대하고 고상한 기능까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예술과 과학과 문학 등에서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서”,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본성적 지식과 사랑과 경외함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탁월한 것조차도 타락으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그것이 오히려 타락의 사실과 정도를 더욱더 부각시킬 뿐입니다. 동일한 피조물인데, 어떤 일에 있어서는 너무나 고상하고, 어떤 일에서는 너무나 저급합니다. 너무나 위대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옹졸합니다. 너무나 고귀하면서, 또한 너무나 천박합니다. 웅장한 것을 고안하고 만들어 내는 데는 탁월하면서도, 그 마음의 성향은 너무도 저급하고 비굴합니다.
이집트의 카르나크와 룩소르에 있는 건축물,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웅장한 건축물을 설계하고 세울 만큼 탁월한 능력이 있는 반면, 거기서 악한 신들과 새, 짐승, 기는 것들을 숭배합니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을 만들어 내고,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와 같은 걸작들을 써 내려가면서도, 로마서 1장에 묘사한 것과 같은 혐오스러운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39개조 종교강령 제20조)을 비웃고, 우리를 성경 숭배자라 놀려대는 사람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오직 성경이 가진 우리만이 이 매듭을 풀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훼파된 성전과도 같아서, 한때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장엄함을 흔적으로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창문과 기둥들이 복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습니다. 지금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장엄한 모습을 어렴풋하게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남은 것이라고는 고귀한 지위에서 떨어져 버린 쇠락한 영예뿐입니다. 원죄와 타락한 끔찍한 결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만이 인간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 외에도 죄는 모든 인류의 보편적 질병이라는 사실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동에서 서, 극에서 극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를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이 땅의 모든 대륙에 자리 잡은 나라들을 다 살펴보십시오. 이 땅의 모든 대륙에 자리 잡은 나라들을 다 살펴보십시오. 무론 대소하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천한 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과 지위의 사람들을 모든 환경과 조건에서 한편 살펴보십시오. 결과는 항상 동일할 것입니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뿐 아니라 태평양의 외딴섬들도 살펴보십시오. 동양의 호사품과 서양의 예술과 문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책과 돈, 증기기관과 화약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사는 섬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 섬들은 현대 문명의 악덕에 전혀 물들지 않았지만, 가장 악독한 형태의 정욕과 잔혹함, 속임과 미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섬에 살고 있는 사람 역시, 다른 것은 몰라도 죄짓는 법은 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인간의 마음은 항상 본성적으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합니다(렘17:9). 죄가 휘두르는 권세와 죄가 가진 보편성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창세기의 계시와 모세의 설명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인류는 모두 한 부모에게서 났고 그들이 타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창세기 3장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있는 모든 곳에서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상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이 사실을 부정하면 그 즉시 우리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인간 타락의 균일성과 보편성으로 인해 도무지 풀리지 않는 엄청난 “불신앙의 어려움”이 초래된 것입니다.
회심하여 성령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도 여전히 그 속에 완고함이 있는 것을 보면, 죄의 정도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성공회 신앙고백 제9조가 이 사실을 잘 말해 줍니다. “오염된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인간 타락의 뿌리는 너무도 깊이 드리워져 있어서 우리가 거듭나고 새롭게 되고, “깨끗하게 되고, 성화되고, 의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산 지체가 된 이후에도, 집 안의 벽 곳곳에 남아있는 나병처럼 우리 마음 저 밑바닥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질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물론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신자의 삶은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몸부림, 매일의 사투, 속사람을 지키기 위한 빈틈없는 경계, 영과 육의 싸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탄식” 같은 모든 것들이, 바로 죄가 얼마나 거대한 능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는 저 원수는 과연 힘이 세고 강한 놈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며 유게를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첫댓글 거룩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은 주로 인간의 타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에 대해 몇 가지를 분명히 언급하고, 거룩에 대해 계속해 가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거룩의 반대가 죄이기에 죄를 알면..거룩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생겨난다.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독교의 뿌리는 죄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는 것이 명백한 진리이다..아멘 그렇다..
죄를 모르고 어찌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죄를 모르고 어찌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신할 수 있겠는가?
이 지식이 없는 칭의, 회심,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언어와 명칭”(행18:15)의 문제에 불과할 뿐, 그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합니다.
가장 먼저 그 마음을 조명하여 자신이 죄책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게 하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그렇다...죄책을 심화시키고 난 후,,죄책에서의 해방감을 맛보게 하신다....
오늘날 대부분의 오류와 이단, 거짓 교리는 죄에 대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멘...그렇습니다. 가짜 구원받은 사람들....가짜로 모아서 교회라 칭하는 기독교회들..모두 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 현재 한국 교회도 그러하다...가짜들의 합창이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원래의 의original righteousness에서 아주 멀리 떠나 있고, 본성적으로 악을 향해 기울어져 있어서, 육체의 소욕이 항상 영혼의 소욕을 거스린다. 그러므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를 받을 만하다....질적으로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본질적인 죄인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할 수도 있고, 죄책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죄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주인의 뜻을 몰라서 행하지 못한 종”이라 할지라도 그 알지 못한 것 때문에 죄를 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역시 “매를 맞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우리 주님은 분명히 가르치십니다(눅12;48).
어렸을 때 잘못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닙니다.모든 죄와 첫 번째 원인은 그 아이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지 결코 학교나 친구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본성적으로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6;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입니다(렘17:9).
요컨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습니다(사1:6). 공함과 예의 바름, 점잖은 매너, 단정한 몸가짐, 교양 등과 같은 얄팍한 덮개로 죄라는 질병을 가릴 수는 있지만, 죄는 이미 성향과 체질에까지 깊이 전이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훼파된 성전과도 같아서, 한때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장엄함을 흔적으로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산산이 부서진 창문과 기둥들이 복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습니다. 지금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장엄한 모습을 어렴풋하게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남은 것이라고는 고귀한 지위에서 떨어져 버린 쇠락한 영예뿐입니다
회심하여 성령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도 여전히 그 속에 완고함이 있는 것을 보면, 죄의 정도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성공회 신앙고백 제9조가 이 사실을 잘 말해 줍니다. “오염된 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인간 타락의 뿌리는 너무도 깊이 드리워져 있어서 우리가 거듭나고 새롭게 되고, “깨끗하게 되고, 성화되고, 의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산 지체가 된 이후에도, 집 안의 벽 곳곳에 남아있는 나병처럼 우리 마음 저 밑바닥에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질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물론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신자의 삶은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몸부림, 매일의 사투, 속사람을 지키기 위한 빈틈없는 경계, 영과 육의 싸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탄식” 같은 모든 것들이, 바로 죄가 얼마나 거대한 능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줍니다.
거듭났을지라도 잠시만 한 눈 팔면..죄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는 저 원수는 과연 힘이 세고 강한 놈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며 유게를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