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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같이 넓고 깊은 불교세계(佛敎世界)
<< 차 례 >>
◎ 부처(고타마 싯다르타)의 일생
◎ 인도 엘로라 석굴군(Ellora Caves)과 불교미술의 금자탑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 혜초(慧超)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건축물<사진>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의 일생
석가모니(釋迦牟尼:BC 563~BC 483)는 석가족(釋迦族)의 성자(聖者)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세존(世尊), 석존(釋尊), 불(佛), 여래(如來) 등 존칭이 10여 개고, 아명(兒名)은 싯다르타 고타마(Gautama Siddhartha)라 하며 서양에서는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 부른다고 한다.
인도(印度)의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Himalaya) 기슭의 카필라 성(Kapilavastu:가비라성)을 중심으로 석가족(釋迦族)이 사는 작은 산촌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부족장(部族長)을 슈도다나(首圖馱那)라고 불렀고, 일반적으로 정반왕(淨飯王), 백정왕(白淨王), 진정왕(眞淨王)이라 불렀다고 한다.
석가모니(釋迦牟尼:Siddhartha)는 정반왕(淨飯王)의 왕비인 마야부인(摩訶摩耶)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7일 만에 어머니인 마야(Maya) 부인이 죽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의 손에 자랐다.
탄생(천상천하 유아독존:룸비니) / 수행 중 / 사찰에 모시는 석가모니 / 보제수(菩帝樹:스리랑카)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왕비 마야(Maya)는 꿈에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 태기(胎氣)가 있었는데 산달(産月)이 가까워지자 풍습에 따라 출산(出産)을 하러 친정(親庭)인 콜리성으로 떠난다.
늦은 봄 화창한 날씨에 왕비 일행이 카필라성과 콜리성의 중간지점인 히말라야 산맥을 지나다 꽃이 만발한 룸비니(Lumbini:네팔) 동산이 보이자 잠시 쉬어가기로 하는데 그곳에서 아들(싯다르타)을 낳는다.
붓다(Buddha:佛陀)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는데 발밑에는 연꽃이 받쳐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왼손가락은 땅을, 오른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요도중생 생로병사(天上天下 唯我獨尊 要度衆生 生老病死) 이것을 해석하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요컨대 나는 중생들을 생로병사에서 건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붓다(싯타르타)는 16세에 야소다라 공주와 혼인하고 아들 라훌라(Rāhula)를 낳지만 29세에 가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출가(出家)하여 갖은 고통을 이겨내며 동굴 속에 들어가 참선(參禪)에 몰입하여 35세 되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 동굴 앞 보리수(菩提樹) 나무 아래에서 ‘대각(大覺)’ 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본원(本源)을 단멸(斷滅)하는 확신을 얻었으니 곧 해탈(解脫)의 경지에 도달하여 부처(佛)가 된다.
이때 얼마나 참선에 몰입했던지 온몸에는 살이라고는 거의 없는 해골(骸骨) 형상이었다고 한다.
이 해탈의 장소가 인도 북동부 비하르(Vihara)주 부다가야(Buddha Gaya)인데 현재 마하보디사원(Mahabodhi Temple)이 있으며, 불교 성지(聖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곳이다. 싯다르타는 해탈(解脫)하여 부처(佛)가 된 이후 주로 인도 북부 바라나시(Varanasi)에서 설법을 했는데 이곳을 녹야원(鹿野苑)이라고 부르며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동산,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Buddha Gaya), 열반(涅槃)에 든 쿠시나가라(Kushinagar)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聖地)이다. 싯다르타는 80세가 될 때까지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말년에 식중독에 걸려 심한 이질을 앓다가 쿠시나가라(Kushinagar)에서 입멸(入滅)하여 일생을 마친다.
<에피소드>
스리랑카의 고도(古都)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서 보물로 지정된 거대한 보리수(菩提樹)를 보았는데 안내판을 보니 BC 245년, 인도 싯타르타가 해탈(解脫)한 부다가야(Buddha Gaya)의 보리수에서 묘목을 구하여 옮겨 심었다는데 이후 부다가야의 보리수가 죽자 이곳에서 묘목을 가져다 부야가다에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보리수가 최고의 보리수라 하여 보제수(菩帝樹) 임금 제(帝)를 붙였다.
<불교의 발상지 인도 기행>
인도 엘로라 석굴군(Ellora Caves)과 불교미술의 금자탑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 주(Maharashtra)에 있는 인구 100만 정도의 데칸고원 고대도시 아우랑가바드(Aurngabad)는 인도 중부의 관광거점 도시로 근처에 수많은 유적들이 있는데 인도 마지막 제국인 무굴제국 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가 황태자 시절 태수로 부임하였던 데서 도시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우랑제브(Aurangzēb)는 인도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Muhammād Shāh Jahān)의 아들이다.
쿨다바드(Khuldabad)에 있는 비비카 막바라(Bibi Ka Maqbara)는 아우랑제브가 죽은 왕비를 위하여 어머니의 능묘 타지마할(Taj Mahal)을 본 떠 17세기 중반에 건축하였다는 아름다운 능묘(陵墓)이다.
이 능묘는 타지마할(5대 황제 샤자한의 왕비 능묘)과 꼭 닮아 작은 타지마할이라고도 불린다는데 크기는 30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무척 아름다운 능묘였다.
아름다운 능묘 ‘비비카 막바라’ / 엘로라 제16굴 카일라쉬 사원
인근에 있는 3~7세기에 건축된 수많은 석굴사원과 3km 떨어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다울라타바드 요새(Daulatabad Fort)는 지나가면서 사진만 찍었고, 물의 정원 혹은 물레방아 정원이라고 부르는 인도 중세의 관개시설 겸 밀(麥)을 도정하던 물레방아가 있은 곳인 판차키 바바사(Panchakki Babashah)를 둘러보았는데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 순박한 인도인들이 기억에 남는다.
아우랑가바드 북서쪽 20km 지점에 있는 엘로라 석굴군은 바위산 중턱에 2km에 걸쳐 석굴사원 34개가 조성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각각의 석굴은 앞 땅바닥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1~12 석굴은 6~7세기에 조성된 불교석굴로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고, 13~29 석굴은 힌두교 석굴, 30~34 석굴은 8~10세기 가장 나중에 조성된 자이나교 석굴이다. 모든 석굴들은 보기에는 비슷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시는 신이 다른데 아름다운 부조들로 채워져 있고 그 중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제16 힌두교 석굴인 카일라쉬 힌두사원(Kailash Hindu Temple)이다.
이 카일라쉬 사원(Kailash Temple)이 다른 석굴과 다른 것은 단순히 굴을 판 것이 아니라 산을 통째로 파고 들어가(하늘이 보이도록) 바위산 자체로 사원을 조성하고 다시 그 뒤의 바위벽을 파내어 수많은 석굴을 조성한 것이다. 사원 앞쪽의 가로길이가 46m, 사원 뒤쪽 암벽 높이가 33m, 입구에서 안쪽까지 54m나 된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본전(本殿)건물은 물론 벽면들마다 가득 채워진 부조들이 눈부시고 사원의 탑 뒤에는 거대한 코끼리 상도 우뚝 서 있는데 이 모든 건축물들은 외부에서 만들어 가져다 세운 것이 아니라 모두 그 자리에 있던 돌을 파내고 조각하고 만들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그저 훌륭한 예술품으로 감상하며 감탄할 뿐이지만 바위산을 통째로 파내고 건물은 물론 온갖 조각들을 쪼아서 새긴 수많은 석공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경외감을 금할 수 없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북동쪽으로 106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잔타 불교 석굴군은 1819년, 호랑이 사냥을 하던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일행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면서 근 1.200여 년 동안 밀림에 묻혀 잊혀졌던 아잔타 석굴은 호랑이가 맞은편 절벽 밑으로 사라져서 내려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어마어마한 석굴군(石窟群)이 있었고 비로소 세상에 다시 알려졌던 것이다.
아잔타(Ajanta)는 엘로라(Ellora) 석굴군보다 몇 세기(世紀) 앞서 조성된 석굴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버스는 황량한 데칸(Deccan)고원을 달리는데 텅 빈 뱃속에다 날씨가 뜨거우니 금방 녹초가 된다. 4시간 쯤 달렸을까 버스는 메마른 평원에서 갑자기 수풀이 무성한 계곡 속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계곡 아래에 넓은 주차장이 보이고 몇 개의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나 하나만 달랑 내려놓고 가버린다. 그곳에 아잔타 석굴사원 매표소가 있었는데 마을까지는 다시 4km정도 더 가야한다. 입장료는 255루피(우리 돈 6,000원 정도)였다.
와고라강 계곡이 반원형을 그리며 흐르는데 바깥쪽 절벽, 높이 70m의 암벽에 조성된 30개의 불교석굴군은 BC 2세기부터 BC 1세기까지 조성된 전기 석굴군과 AD 5세기에서 AD 7세기까지 조성된 후기 석굴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총 길이는 1.5km에 이른다. 가장 오래된 석굴은 BC 2세기에 조성된 제10석굴이라고 하며, 이 아잔타 불교석굴군은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보고(寶庫)이자 초기 인도 불교미술의 금자탑(金子塔)으로 불리어진다.
이 불교 석굴군(石窟群)은 초기 불교의 역사와 불화(佛畵)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전기 석굴군은 불상을 모시지 않고 오직 수행의 공간으로, 5세기 이후인 후기 석굴군부터 불상을 모시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인도 불탑(佛塔)의 원조인 스투파(Stupa)의 원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각과 벽화들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천정과 벽면을 가득 채운 조각들과 현란한 색채의 프레스코화는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와고라 강변의 아잔타 석굴군 / 무릎 꿇은 코끼리가 있는 석굴 입구모습(16번 굴)
몸의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제대로 사진도 못 찍었다. 입구에 200루피 짜리 가마도 있었는데 타고 올걸 그랬다는 후회도 든다. 뱃속은 텅 비었는데 목으로는 콜라 밖에는 아무것도 넘길 수 없었는데 마침 매표소 인근에 팝콘을 팔고 있어 깔대기 모양의 신문지 봉지에 담아주는 것을 사서 한주먹 입에 넣었지만 도대체 목구멍으로 넘길 수가 없다. 메마른 입속에서 가까스로 녹여 목구멍으로 넘기려고 석굴사원 귀퉁이에 앉아 팝콘 깔대기를 옆에 놓고 콜라를 마시는 사이 랑구르 원숭이가 옆에 세워놓은 팝콘을 낚아채 도망친다. 그것을 빼앗으려 한 무리의 원숭이 떼가 뒤를 쫓고....
천신만고 쉬고 또 쉬며 그래도 악착같이 마지막 석굴까지 모두 둘러보았다. 입구로 나와 나무그늘에서 헉헉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서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니까 제법 또렷한 한국말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름은 아시라프 알리(Asiraf Ali)로 부산에서 1년 동안 여행사 가이드를 했다고 하며 한국 명함도 보여 주는데 매우 반가웠다. 날씨가 너무 덥다고 했더니 지금이 장마철 직전으로 가장 더울 때라며 한낮 기온은 섭씨 38~40도 정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며 자신도 곧 살기 좋은 한국으로 다시 가겠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 여행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하자 가는 방법이 아우랑가바드로 되돌아가서 비행기로 뭄바이로 간 다음 한국으로 가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고 한다.
이 친구의 소개로 택시를 탔는데 아우랑가바드 공항까지 3시간 정도 걸리고 차비는 1.200루피(3만원).
알리에게는 고맙다고 100루피와 입맛이 없어 한 개비 피우고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담뱃갑과 라이터까지 주었더니 입이 헤벌어진다. 더운 날씨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택시를 타는 것도 고역이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서남쪽으로 350km 지점에 뭄바이(Mumbai/Bombay)가 있다.
혜초(慧超) 스님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신라 경덕왕(AD 8세기) 때 불교의 한 종파인 밀교(密敎)에 심취하였던 혜초(慧超)스님은 만 4년간 인도를 여행하며 경전을 연구하였고, 이어서 인도 북단(北端)의 카슈미르(Kashmir),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데 갈때는 바닷길로, 올때는 육로를 통하여 중국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이 30세 전후였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총 6,000여 자로 쓴 두루마리 형태로, 일부분만 남아있는데 현재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300여 년 전, 혜초스님은 15살에 고국 신라를 떠나 중국과 동남아 각국을 돌며 불법을 공부하다가 19살에 천축국(天竺國:인도)을 향하여 떠나 4년간 순례를 하고 돌아와 남은여생을 중국에서 수행하다가 생을 마감하는데 당시 인도여행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황량한 불모의 땅(河西回廊) / 혜초스님 여행 루트 / 혜초스님 상상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란 뜻은 ‘다섯 천축국으로 여행 갔던 기록’ 이라는 뜻인데, 천축국은 당시 인도를 천축국(天竺國)이라 불렀는데 오천축국(五天竺國)이라는 말은 인도가 넓기 때문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지방을 한꺼번에 부른 이름으로 인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행기 원본은 3권이었다고 하나,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것은 사본으로 전체내용인지 요약본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하는데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유일하단다.
이 왕오천축국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황량한 사막도시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에서 원본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돈황(敦煌)은 예전 중국영토의 최서단 타클라마칸 사막 인근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곳으로 기원전(BC 2세기)에 세워진 고대도시로 훗날 실크로드(Silk Road)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다.
AD 4세기, 중국 전진(前秦) 시기에 처음 조성되기 하여 약 1,000 년간에 걸쳐 조성된 막고굴은 동굴의 수가 무려 1,000여개나 되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데 숱한 수난을 겪게 된다.
이 막고굴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제17굴인 장경굴(藏經窟)이 발견되고 나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청(淸)나라 때인 AD 1900년, 이곳 막고굴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도교 태청궁(太清宮)의 도사(道師) 왕원록(王圓籙)은 기금을 모아 허물어진 막고굴을 보수하고 있었다. 당시 일을 도와주던 노동꾼 양씨가 우연히 16호굴의 벽에 틈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벽 뒤에 작은 공간(방)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제17호굴 장경굴(藏經窟)이다.
벽을 허물고 들어가 보니 가로 2.8m, 세로 2.7m, 천정높이 3m의 자그마한 공간에 놀랍게도 5만여 점의 유물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보관 유물은 경전(經典), 고문서(古文書), 서화(書畫), 공예품(工藝品) 등이었는데 신라 혜초(慧超)스님이 쓴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왕원록은 수차례 중국 정부에 보고하고 보존 및 관리를 건의하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그냥 보관하라고만 하였다고 한다. 왕원록은 중국 정부에서 막고굴 보수비용을 대주지 않자 몇 푼 안 되는 돈에 유물 일부를 팔아서 막고굴 수리비용으로 충당하였다고도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장경굴(藏經窟) 뿐만 아니라 다른 굴들도 크고 작은 도굴과 도난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왕오천축국전 원본 / 17호굴 장경동 입구(오른쪽) / 왕원록
1906년, 영국의 역사학자 오렐스타인(Aurel Stein)이 이곳에 들러 약 1만 점의 유물을 가져간 것을 필두로, 1908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6천여 점을 가져갔다고 한다.
러시아의 고고학자 올덴부르크(Oldenburg)는 2회에 걸쳐 석굴 벽화를 뜯어갔고, 미국 예일대학의 워너(L. Warner)는 벽화와 벽에 붙어있는 불상까지 떼어갔다고 한다.
거기에 일본도 합세하여 후일 정토진종(淨土眞宗/西本願寺)의 종주(宗主)가 된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까지 젊은 시절 탐사대를 조직하여 둔황 막고굴의 유물을 약탈한다.
문화재도둑들☞ 올텐부르크 탐사단(러시아) / 오렐스타인(영국) / 폴 펠리오(프랑스) / 오타니 고즈이(일본)
현재 막고굴(莫高窟) 17호굴 장경동(藏經洞)에 보관되었던 유물들은 영국대영박물관에 1만여 점이 있고, 프랑스가 가져간 6천여 점은 파리 국립도서관과 프랑스국립박물관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신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다. 그 밖에 레닌그라드에 1만여 점, 일본에 2천 여 점, 중국 북경에 1만점 정도 보관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다.
혜초스님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에 실려 있는 스님의 한시(漢詩)를 찾았는데 혜초스님은 여행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시인의 재질도 갖추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在南天路(재남천로) - 남천축국(南天竺國) 가는 길에서
月夜瞻鄕路(월야첨향로) 달 밝은 밤 고향길 바라보니
浮雲颯颯歸(부운삽삽귀) 뜬구름 너울너울 돌아가고 있네
緘書參去便(함서참거편) 저 구름 편에 소식 전하려 하였더니
風急不聽廻(풍급불청회) 휘몰아치는 바람 내말을 듣지 않네
我國天岩北(아국천암북) 내 고향은 저 하늘 끝 북쪽인데
他鄕地角西(타향지각서) (나는 지금)머나먼 이역만리 서쪽 변방 끝에 있네
日南無有雁(일남무유안)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누가 이 소식을 전하러 고향으로 날아가리
*颯(삽)-바람소리 삽(의성어) *日南(일남)-현 베트남 중부지방 *林(림)-계림(경주)
略題述其愚志(약제술기우지) - 나의 마음을 간단히 적다
不慮菩提遠(불려보리원) 깨달음이 멀다고 걱정 않는데
焉將鹿苑遙(언장녹원요)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只愁懸路險(지수현로험) 가파른 길 험하다고 근심할 뿐
非意業風飄(비의업풍표) 업풍(業風)이 몰아쳐도 개의치 않네
八塔難誠見(팔탑난성견) 여덟 탑을 보기란 정말 어려운데
參著經劫燒(참착경겁소) 오랜 세월 겪으며 거의 타버렸으니
何其人願滿(하기인원만)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目覩在今朝(목도재금조) (그러나)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鹿苑(녹원:녹야원)-부처님이 처음 설법 한 곳 *業風(업풍)-업보(業報)로 돌아오는 바람
*八塔(팔탑)-석가모니의 탄생, 성도, 최초 설법, 열반의 장소 등에 세워진 8가지 기념물(탑)
悲冥路(비명로) - 저승길을 슬퍼하다
故里燈無主(고리등무주)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어
他方寶樹摧(타방보수최) 타향에서 보배로운 나무가 꺾어져 버렸도다.
神靈去何處(신령거하처) 신성한 영혼은 어디로 가버렸기에
玉貌已成灰(옥모이성회) 옥 같던 모습은 이미 재가 되었는가?
憶想哀情切(억상애정절) 잊지 못하고 그리워서 슬픈 감정 간절하지만
悲君願不隨(비군원불수) 그대 소원을 따르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오.
孰知鄕國路(숙지향국로) 고향으로 가는 길 누가 알고 있는지
空見白雲歸(공견백운귀) 흰 구름 돌아감을 헛되게 바라보네
*같이 여행을 한 동료(중국인 승려)가 타지에서 죽어서 깊이 슬퍼함
逢漢使入蕃略題四韻取辭(봉한사입번약제사운취사)
-서역으로 들어가는 한나라 사신을 만나 간단히 운을 취해 짓다.
君恨西蕃遠(군한서번원) 그대는 서역이 멀다고 한탄하고
余嗟東路長(여차동로장)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한다
道荒宏雪嶺(도황굉설령) 길은 거칠고 고개에 엄청난 눈 쌓였는데
險澗賊途倡(험간적도창) 험한 산골엔 도적떼가 날뛰는구나
鳥飛驚峭嶷(조비경초억) 새는 날다가 가파른 산 높이에 놀라고
人去難偏樑(인거난편량) 사람은 굽은 나무 의지하며 어렵사리 넘어가노니
平生不捫淚(평생불문루) 평생 눈물을 흘리지 않았건만
今日灑千行(금일쇄천행) 오늘은 하염없이 떨어지누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역으로 가는 사신을 만나서 귀향하기 힘듬을 토로하고 북받쳐 눈물을 흘림.
冬日在吐火羅逢雪述懷(동일재토화라봉설술회)
-겨울에 토화라에서 눈을 만나 마음에 품은 말을 적다
冷雪牽氷合(냉설견빙합) 서늘한 눈, 얼음에 붙어 합하고
寒風擘地烈(한풍벽지열) 차가운 바람, 땅을 쪼갤 듯 사납다.
巨海東墁壇(거해동만단) 큰 바다는 얼어서 단(壇)을 이루고
江河凌崖囓(강하릉애설) 강물은 벼랑을 물어 뜯는다
龍門絶瀑布(용문절폭포) 용문에 폭포는 끊어지고
井口盤蛇結(정구반사결) 우물은 똬리 튼 뱀처럼 엉켰나니
伴火上陔歌(반화상해가) 불에 의지해 계단 오르며 노래하도다
焉能度播蜜(언능도파밀) 어떡하면 파미르를 넘어갈 수 있는가
*吐火羅(토화라)-현 아프가니스탄 북부지역의 옛 명칭 *播蜜(파밀)-파미르(Pamir) 고원
獨夜月(독야월) - 홀로 달밤에
凄凄北風衣鴛被(처처북풍의원피) 차가운 북풍은 이불 깃에 불고
涓涓西月生惠庵(연연서월생혜암) 아리따운 달은 혜인암 비추니
僧讀經夜相恩處(승독경야상은처) 홀로 독경하는 스님 임 그린 눈물이
衣滴寒塘惠草時(의적한당혜초시) 빗방울 되어 옷깃에 떨어지네
*衣鴛被(의원피)-원앙새를 수놓은 이불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 건축물<사진>
불치사(佛齒寺)<스리랑카> / 담불라 석굴사원<스리랑카> / 담불라 황금사원<스리랑카>
보제수(菩帝樹)<스리랑카> / 제타와나마라야 다고바(佛塔)<스리랑카> / 갈비하라야 사원 터<스리랑카>
아잔타 석굴 와불상(26번 굴) / 내 팝콘 강도 랑구르 원숭이<인도 아잔타> / 녹초가 된 나<인도 아잔타>
인도 불탑 스투파(Stupa) / 스리랑카 불탑 다고바(Dagoba), 일본 법륭사 5층탑 / 우리나라 석탑(石塔)<Pagoda>
불탑의 모양이 나라마다 다소 차이가 있는데 세월이 지나며 점차 변화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