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변(沿邊)지역의 역사
고구려 전성기 / 발해 / 외금강 금강문 / 외금강 삼선봉
우리나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를 잠시 살펴보면 당시는 예상컨대 국경선이 고무줄처럼 자주 부풀어 오르고 줄어들던 때라 분명한 경계선이 없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현재 중국영토인 만주지역과 요동(遼東) 반도 전역이 고구려 영토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영토가 3배 정도나 커져서 중국 동북부지역은 물론 동부해안인 산동(山東)반도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지만 영토가 안정될 시기의 고구려 영토는 사진과 비슷한 영역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초대 동명성왕(東明聖王/BC 37~BC 19)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보장왕(寶藏王/642~668)에 이르러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기까지 700여 년간 지속(持續)되었던 강대국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소수림왕(小獸林王/371~384) 때에 불교의 전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3)에 이르러 광대한 영토 확장 등이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고대사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流民)들이 후고구려를 세우기도 했지만 곧이어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국하고 확장하는데 과거 고구려 영토에 동만주(東滿洲)지역도 추가된다.
발해(渤海)는 AD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698년 대조영이 말갈족(靺鞨族)들을 거느리고 동만주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당은 705년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맺었다.
초대 고왕(大祚榮/698~719)부터 제15대 인선(諲譔/906~926)까지 228년간 지속되었던 발해는 5대 선왕(宣王)에 이르러 연호를 건흥(建興)이라 고치고 요하강(遼河江) 일대의 후고구려지역까지 확장하여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때 5경 15부 62주(五京 十五府 六十二州)를 설치하고 정비하여 대국의 기틀을 공고히 했으며 후세 사람들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면 대조영을 고구려의 유장(遺將)으로 단정하고 발해사를 고구려사(高句麗史)의 연장(延長)으로 보았는데 중국은 발해가 중국 영토의 일부였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발해사(渤海史)를 한국사(韓國史)의 일부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국과 우리 대한민국의 국경선이 어디까지인지가 매우 모호한데 국가 간의 합의(合意)로 국경선이 확정되어 비석으로 남은 것이 위에 언급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고 유일한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한국과 중국이 정식수교(修交)로 국가 간 조약을 한 것이 1992년에 맺은 한중수교(韓中修交)이다. 한중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기 위하여 중국을 방문하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2002년 2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2004년, 동북공정 사무처가 발표한 내용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역사 또한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한중간 외교 문제로 비화(飛化)되었다.
한국도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 고구려사 연구재단(硏究財團)을 발족했는데 연구내용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있다.
나는 북한 금강산 개방시 북한을 방문하는 행운이 있었는데당시 찍은 외금강을 둘러본 사진이 있기에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