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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갠뒤 밝은 달-맑은 바람처럼 고고하게 풍류벗삼는 선인처럼 | |||||||||||||||||||||||||||||||||||||||
[기획] 편액의 숨결을 찾아서 (35) 무주 제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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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팔경은 오도제월(吾道霽月), 사전면구(沙田眠鷗), 우도탄성(牛渡灘聲), 향적귀운(香積歸雲), 지봉락조(芝峯落照), 용추폭포(龍湫瀑布), 원각모종(圓覺暮鐘), 칠연폭포(七淵瀑布)인데 제월정이 있는 오도재의 산마루에서 비갠 뒤 보는 둥근달과 정자앞 모래밭 가에서 기러기가 한가로이 졸고 있는 모습을 얘기하고 있다. 제월정기를 보면 1939년 사헌 김영훈이 손수지은 기문이 있으나 사실 그의 장남 죽헌 필수가 아버지의 여생을 보람있게 지내기 위하여 가솔들과 협력하여 정자를 지은 것이다. 즉 효심깊은 아들이 아버지의 휴식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정자라고 전해진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안에는 아버지인 김영훈이 직접 지은 제월정기문과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판이 걸려 있다. 제월이라고 정자 이름을 붙인 것은 경향 각지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 듬이 마치 비가 갠 뒤의 밝은 달과 맑은 바람처럼 마음에 거리낄 것 없이 고고하게 풍류를 벗삼아 살아가는 선인들과 방불케 하고자 함이었다. 즉 제월광풍(霽月光風)이란 말에서 유래했음을 볼 수 있다.
정자를 짓고는 제월정이란 편액은 덕수궁의 대한문과 창덕궁의 어수문을 쓴 소산 박래형의 글씨를 걸었다. 박래형은 평남 대동군 남곤면에서 1871년에 태어나 26세인 구한말 대과에 급제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탁지부 참서관으로 봉직하다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자 왜경의 눈을 피하여 야밤에 찾아온 곳이 산간오지인 무주 구천동이었다.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마을 훈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쳤고, 그의 명성이 무주와 진안 지방에 널리 퍼졌다. 특히 그의 여식은 무주 안성의 명문이 광산김씨 필수와 진안 마령의 함양오씨 재영에게 출가시켜 이 지방의 유림들과 돈독한 친교를 맺엇다. 즉 위에서 열거한 죽헌 필수와 사둔간으로 제월정편액을 청하자 썼을 것으로 본다.
박래형의 작품은 진안 강정모퉁이라 불리는 곳에 강정대라는 대각자를 비롯, 마이산 이산묘의 이산정사, 이택헌, 인지재 등이 있으며 김필수의 후손이 소장한 병풍이 있다. 그리고 진안역사박물관에는 박래형이 쓴 다양한 종류의 서첩과 교본이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