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4일 ·
고향의 한 후배를 만나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의 한 찻집에서 고향의 한 후배와 차담을 가졌다. 그는 나의 구미초등학교, 중학교 2년 후배로 누리는 한때 구미면 원평6동(별칭 각산) 마을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그는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으로,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선산 구미 지역 ㅛㅣㄴ문사 지국을 운영란 언론인이자 명망 높았던 민족 지도자 박상희 선생이셨다. 또 그의 막내 삼촌(작은 아버지)은 대한민국 제5~9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그분의 큰 누나(박영옥) 부군이 곧 JP 김종필 전 국무총리였다.
1971년 나는 군에서 제대 후 경기도 여주의 한 시골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지내자 그때 나의 넷째 고모님은 먀우 안타깝게 여기면서 나를 효창동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만난 박준홍 후배는 나에게 정계 입문을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인재가 못 된다고 귀를 씻은 뒤 30 여 년 줄곧 평교사로 지내다가 퇴임했다. 나는 그재나 이제나 평생 운전 면허증도 한 번 가져보지 못한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아주 못난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 품 안에서 자랐다. 그때 시집의 한 마을에서 살았던 김호남(박정희 대통령 첫부인) 씨의 신랑 상모 양반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듣고 자랐다. 그분이 이 나라를 18년 간 아주 야무지게 통치를 한 대통령이 될 줄은 고향 사람 그 누구도, 그의 가족들조차도 언감생심 몰랐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작가로서 박정희를 그리고자 그분이 다녔던 구미초등학교(나의 모교)는 물론, 상모동 생가,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 서범대 부속고교), 그리고 멀리, 중국 창춘 교외 닐랄툰의 만주군관학교까지도 답사했다, 하지만 매우 어렵게 답사를 한 후에도, 끝내 작품을 탈고치 못했다.
그동안 내가 소설 박정희를 기필 한 건 10 여 차례가 훨씬 넘었다. 이제는 그분이 작고 한 지도 그새 40년이 넘었고, 그분 동지나 언저리 사람들도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됐다.
나는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를 네 차례, 버지니아 주 노퍽의 맥아더기념관도 두 차례나 탐방한 바 있다. 그때마다 각종 자료를 훑어 보고 그곳에서 여러 관계자 및 현대사 전문가도 만나봤다. 그리고 어렸을 때 어른들(나의 할머니와 상모동이 친정인 외숙모) 얘기와 그동안 내가 직간접으로 지켜본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자료들을 중심으로 소설화 시켜 보고자 한다.
이제 내 나이 80으로 이번 기회에 탈고치 못하면 끝내 나의 '소설 박정희'는 무산이 될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바른 이야기를 남기는 게 정녕 고향(구미) 출신 작가의 소명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쓴 박정희의 여러 단편적 이야기는 오마이뉴스 기사, 최근에 펴낸 <대한민국 대통령 그 빛과 그림자>(도서출판 삼인) 등에 일부 그려져 있다. 미리 그분 얘기를 더 듣거나 알고 싶으면 그 기사를 찾아보시거나 도서관에서 그 책을 대출 받아 읽어보시라.
이곳에 쓰고 싶은 얘기는 많다. 하지만 미리 너무 많은 걸 여기다 토해 놓으면 메인 작품이 빛을 바랠 것이다.
박정희, 그는 결코 자신을 변명하거나 호도하지 않았다. 나는 금오산 인으로 어떤 소명감을 가지고 그의 바른 한 인간의 참 모습을 그려 볼 예정이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하고 작가는 작품으로 말 한단다. 이제부터는 효 입을 닫고 후일 언젠가 작품으로 말하겠다.
사진 설명 ;
위 - 박정희 대통령 막내형 박상희 선생의 유복자로 전 대한축구협회장 박준홍 회장(왼쪽)과 필자(오른쪽)
아래 - 왼쪽 박정희 전 대통령 / 가운데 - 1948년 10월 항쟁 때 희생된 고 박상희 선생 / 오른쪽 - 구미 초등학교 후배들이 세운 박정희 대통령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