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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묵상글 들 (연중 20주 월요일-얼치기와 양다리 걸치기의 슬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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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0주 월요일-얼치기와 양다리 걸치기의 슬픔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두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과 <슬퍼하며>입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저의 느낌도 두 가지였습니다.
<얼치기>와 <양다리 걸치기>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부자 청년이 십계명
실천은 다 했다고 답하며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다시 묻자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어찌어찌 하라고 말씀하시지요.
요즘 우리말에 <2% 부족하다>는 말이 유행인데
이 말은 완전함에 딱 2%가 부족하다는 뜻이며.
아주 조금의 부족 때문에 완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뜻이지요.
이 청년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이 복음을 가지고 강의할 때마다
이 청년이 참으로 딱하다는 뜻으로 많이 얘기하곤 하였기에 이번에는
제가 딱하다고 생각하는 이 청년과 저를 비교해봤는데 이 청년이 2%
부족하다면 저는 그보다 훨씬 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성이 이 청년보다 부족하고,
십계명을 이 청년은 잘 지켰다고 자신있게 말하는데 저는 그럴 수 없고,
가진 것을 다 팔지도 이웃과 잘 나누지도 않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도 한 때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고,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도 했으며,
십계명을 전혀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을 팔아 이웃과 나누는 것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부족했고 하긴 했지만 얼치기로 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과 비교할 때 이런 것들보다 더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저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점입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가 많은 재산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고 슬펐나 본데 저는 슬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슬퍼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더니 저는 비록 얼치기일지라도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고 있고,
그래서 목표를 향해 줄달음쳤다고 한 바오로 사도와 달리
주님을 따르면서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천천히 따르고,
어떤 때는 멈추기도 하고 낙오되기도 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Sequela Chisti와 Imitatio Christi, 곧
그리스도를 따르기와 그리스도를 닮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든 닮기 위해서든
주님 바라보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고,
강도와 차원을 높여가면서 바라보기를 해야 합니다.
클라라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대의 정배를 닮기를 갈망하면서, 그분을 응시하고(Intuere),
그분을 깊이 생각하고(Consedere), 그분을 관상하십시오(Contemplare)."
이러해야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오늘 부자 청년처럼 가진 것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주님을 따라 나서긴 했는데 주님을 따라가다가 주막집에 들러 쉬다가
놀다가 보니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주님을 놓치고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러고도 슬퍼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부자 청년과 달리
저의 슬픔은 '양다리 걸치기'와 '얼치기'의 슬픔이라고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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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재산이 넉넉하고 지위가 높음을 ‘부귀’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귀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만, 부귀는 칼날이나 창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방종하게 굴면
사람의 뼈와 살을 베고 찌릅니다. 그런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책 『설원』에는 부귀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부’는 만족할 줄 아는 데 있고 ‘귀’는 물러남을 구하는 데 있다.” 만족하고 물러날 줄 아는 지혜만 있다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 모두 예수님을 따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예수님께 질문을 드린 한 젊은이가 모든 계명을 잘 지켰음에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주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납니다.
사실 젊은이의 질문은 두 가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였고,
둘째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번째 질문을 스스로 되묻고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내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는 것이 무엇일까?’로 말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 많은 무엇이 우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유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사랑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라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의 말을
인용하시면서 ‘친절한 사랑은 오로지 내어 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체험하게 한다.’(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94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의 시편도 이 ‘부’와 ‘귀’를 노래합니다.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
영화 속에 있으면서도 지각없는 사람은,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시편 49[48],17-18.21).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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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6-22: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이란 자신의 만족과 함께 하느님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편안함이었던 것 같다. 이 질문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받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준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고 한다.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던지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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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새벽을 열며.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빠다킹신부님.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있다, 없다.’입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100대는 무엇이 없을까요? 답은 ‘다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많아서 평생 힘들게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런데 세대별 있는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10대는 ‘끼’가 있다, 20대는 ‘젊음’이 있다, 30대는 ‘짝’이 있다, 40대는 ‘폼’이 있다, 50대는 ‘멋’이 있다, 60대는 ‘가족’이 있다, 70대는 ‘쉼’이 있다, 80대는 ‘추억’이 있다, 90대는 ‘소망’이 있다, 이제 마지막 100대는 무엇이 있을까요? 답은 ‘천국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대별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계속해서 바뀌어 나간다는 것이지요. 지금 세대에 필요한 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필요 없을 수도 있고, 또 지금 세대에 필요 없는 것이 과거나 미래의 세대에서는 꼭 필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없다고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또 있다면서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서도 안 됨을 깨닫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자 젊은이가 주님을 찾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선한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젊은이는 이제까지 다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부족함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질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못했던 이 젊은이는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의지가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것을 주님 때문에 버리는 것을 늘 주저하게 됩니다. 의지가 너무나도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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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신학자는 무릎을 꿇고 신학을 연구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연구는 쓸모가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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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인생.
꽃길을 걸을 때는 라르고(largo)
꽃들과 눈 맞추고 얘기하며 ‘매우 느리게’ 걸어가요.
산행을 할 때는 안단테(andante)
하늘을 보고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느리게’ 한발 한발 디뎌요.
일상의 삶은 모데라토(moderato)
게으름과 성급함은 버리고 ‘보통 빠르기’로 생활해요.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는 알레그로(allegro)
재지 말고 멈칫하지 말고 ‘빠르게’ 내밀어요.
어쩌다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면 비바체(vivace)
두려워 말고 ‘빠르고 경쾌하게’ 행동해요.
인생의 시간은 프레스토(presto)
바람같이 쏜살같이 매우 빠르게 흘러가니까요.
음악과 인생이 이렇게 연관 있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하나 봅니다. 정연복 시인의 ‘음악과 인생’이라는 시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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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한상우 신부님.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긴 장마가
끝났습니다.
오랫만에
맑은 날씨속에서
산길을 걸었습니다.
산길을 걸으며
계곡의 물길을
보았습니다.
계곡의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러모양의
나무토막과
찢겨져
떨어져내린
수많은 나무가지들을
만났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로
잘 흘러가는
것입니다.
흘러가야
썩지 않습니다.
흘러가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믿음은
내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로막는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하느님이
앞에 계셔도
재물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이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하느님께 중심을
두는 아름다운
결단입니다.
집착과 지나친
욕심으로는
우리 영혼이
자유로울 수 없고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있어야 할
우리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따른다는 것은
절제와 절도를
일깨워줍니다.
압박과 강요가
아닌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됩니다.
나눔은
따르는 것이며
하느님께로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믿기에 오늘도
하느님께로
흘러갑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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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연중 제20 주간 월요일
텃밭의 호박을 보았습니다. 꽃이 피더니 드디어 호박이 열렸습니다. 2개가 옆집 울타리를 넘어갔습니다. 참 사람 마음이 요상합니다. 우리 울타리에도 넉넉하게 호박이 열려있었는데 옆집으로 넘어간 호박이 아깝게 여겨집니다. 호박은 굳이 울타리를 가리지 않고 생긴 대로 열리는데 나는 왜 울타리를 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소유가 있고, 권리가 있는 세상입니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세상입니다. 커다란 창고를 세우고 재물을 채우지만 부자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거스를 수 없다면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는 자캐오를 예수님께서는 축복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바늘귀처럼 작게 보일 뿐입니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8차선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울타리의 호박은 내가, 옆집으로 간 호박은 옆집에게 나눠주어야 하겠습니다.
지붕 공사로 비용이 제법 들어갔습니다. 정부의 지원금으로 해결 할 수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나눔의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평생구독자이신 어르신께서 노안으로 신문을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또다시 구독료를 보내 주셨습니다. 코로나19로 남미로 가는 신문의 발송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르신께서 후원금을 가져오셨습니다. 미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시다가 지금은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8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손수 운전하셔서 신문사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던 것처럼 어르신들께서 보내주신 구독료와 후원금은 딱 지붕 공사의 비용 만큼이었습니다.
예전에 읽은 만화인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밥이 있었고, 숟가락이 있었습니다. 다만 숟가락이 몹시 길었습니다. 지옥은 긴 숟가락을 자기 입에 넣으려다보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대부분 흘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탓하며 불평하였습니다. 천국은 긴 숟가락으로 이웃의 입에 밥을 넣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서로의 입에 밥을 먹여주니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배려해주는 나눔의 문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합니다. 복음을 읽어보면 청년은 아주 모범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잘 지켰고, 그릇된 길은 가지 않았던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칭찬을 받을 거라는 기대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청년의 대답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계명들을 잘 지켰고, 나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런 다음 나를 따라 오시오.’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슬퍼져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이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사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어떤 분들은 가족들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족은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두려움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사실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걱정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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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여정 - 회개, 만남, 버림, 따름 -
요즘 저에겐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침 식사후, 점심 식사후 산책때 잠시 시냇가를 걷는 것입니다.
‘시냇물’ 동요를 부르며 시냇가를 걷다보면 늘 거기 그 자리에 물오리들을 보게 되고 사진도 찍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물오리가 아니라 오랜만에 맑게 흐르는 시냇물을 보는 즐거움 때문입니다.
시냇물이 마르면 그때는 시냇가의 산책도 끝날 것입니다.
흘러야 삽니다.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그대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흐르는 구원의 여정입니다.
이런 주님의 방향을 잊고 정체되어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될 때 썩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분도 수도자의 삶은 밖으로는 정주의 산같은,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같은 내적여정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 우리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그 자리에 머무르지만 내적으로는 구체적 일과표라는 회개의 시스템에 따라 계속 흐르는 강처럼 삽니다.
바로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셋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대로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한 구원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는 이점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 부자는 참 좋은 사람이요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인간의 본능적 영적 갈망을 대변하는 구도자의 모범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사막 수도자들은 물론 우리의 궁극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접근법이 지혜롭습니다. 저는 여기서 웃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실현이자 하늘 나라의 구원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한 젊은이 때문입니다.
‘나무들’이란 구체적 수행들만 봤지 ‘숲의 주님’을 보지 못한 부자입니다.
수행엔 충실했는데 삶의 방향이자 삶의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까맣게 잊은 어떤 젊은 부자입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구원인데 주님을 만나지 못한 수행이니 영원히 목마를 수 뿐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하는데 계속 손가락의 수행에만 몰두하는 참 좁은 시야의 젊은 부자입니다.
이웃관계의 금령의 계명도 다 지켰고 부모 공경과 이웃사랑도 다 했는데 영적 갈증과 삶의 허기는 여전합니다.
이에 비하면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영적 갈증과 허기를 해결하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구원의 여정에 빛나는 이정표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매일 미사입니다.
무엇을 행하여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따라야 구원입니다.
말그대로 주님과 만남의 은총의 선물이 구원입니다.
아무리 수행에 충실해도 삶의 방향, 삶의 목적,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적 갈증과 허기의 해결은 요원합니다.
젊은 부자의 말이 내면의 답답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삶은 구원의 여정이자 주님과 만남의 여정임을 까맣게 몰랐던 부자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감으로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의 여정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젊은 부자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궁극의 처방을 제시합니다.
바로 다음 복음 말씀은 사막 은수자의 아버지 안토니오를 회심시킨 말씀이기도 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소유의 삶에서 존재로의 삶의 전환을,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나를 따라라” 말씀대로 당신을 따라, 맑게 흐르는 강으로 살라는
구원에의 초대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여정은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맑게 흐르는 구원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관계만이 근원적 영적 갈증과 허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완전한 삶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있음의 표지가 주님을 따르는 일이요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관계입니다.
젊은 부자의 반응은 바로 탐욕에 소유된 인간의 보편적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젊은이의 삶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복음 사가입니다.
아마 젊은이에 대한 주님의 정확한 진단은 이 부자에게 평생 화두가 됐을 것이며
혹시 주님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어도 그의 삶에는 결정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삶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여정입니다.
그냥 막연한 되는 대로의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와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버림과 추종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에제키엘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아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너희는 너희를 낳으신 하느님을 저버리고, 너희를 세상에 내신 하느님을 잊어버렸다.”
주님을 잊을 때 '무지의 늪'에서 표류하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기억해야할 주님이시며 날로 깊어져야 할 주님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물론 모든 성인들과 신심깊은 형제들 모두가 우리에겐 회개의 생생한 표징이자
상징이 됩니다. 다시 주님께 돌아와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새롭게 구원의 여정에 오르라는 회개에의 초대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어제 받은 도반 사제의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수도원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려 가려고 합니다.
내일 고해성사를 주실 수 있으신가요?”
주님과 구원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는 평생 성사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요
주기적으로 바치는 고백성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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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질문을 던집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미 규정하고 있으니, 그의 질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심판과 보상은 우리 계산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의 합리성이나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성조들 시대부터 통용되어온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스라엘인이라면 기본적으로 당연히 준수해야 하는 계명들을 제시하십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이 젊은이는 율법의 눈으로 보아 꽤나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에 대해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잠시의 고민도 없이 즉각 선언할 수 있다는 건, 늘 계명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힘을 쏟던 사람이던가, 아니면 아예 무관심하게 되는 대로 막 살던 사람의 농담이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마태 19,21)
그런데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단어를 꺼내십니다. 스스로가 이미 최대한 노력하고 있음을 자신하는 젊은이에게 최종적으로 도달하고픈 고지는 하느님의 완전함임을 예수님이 간파하신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젊은이가 더 분발해야 할 단계는 없어 보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은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는 특별한 길을 알려 주십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물이 우상 자리를 꿰어차고 있으니,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어려운 도전이 될 권고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집안의 멸망과 한탄을 자기 삶에 끼어든 사건으로 생생히 보여 줍니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에제 24,21)
주님께서 벌이실 이 비참한 사건은 이미 예언자가 아내를 잃고도 애도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으로 미리 예견됩니다. 성전은 율법, 경신례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고 자랑입니다.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무한히 교만했던 그들이 성전을 잃는다는 것은 하느님 현존이 그들을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 멸망하여 유배를 가게 될 것이고, 유배지에서 그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도 조상 대대로 지켜온 관습에 따른 애도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나라와 자기 신을 잃은 백성에게는 이 모든 게 사치일 뿐이니까요. 성전은 무너지고, 율법은 잊혀지고, 경신례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을 떠받치던 기둥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스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일, 참 중요합니다. 모든 국민이 법을 준수하고 불법을 삼가야 국민의 안녕과 국가의 안전이 유지되듯이, 신앙 생활에서도 계명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질서를 지켜줍니다. 오늘 복음 속 젊은이가 보여 준 모범처럼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만만 해도 사실 훌륭하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삶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수칙들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다가 잃어버린 성전과 율법과 경신례처럼, 엄밀히 말해 없어도 살 수 있는 비본질에 가깝습니다. 성전이 없다고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율법이 없다고 사람 사이의 도리와 양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또 경신례가 없어도 하느님 은총의 기억과 감사가 우리 마음 안에 새겨져 있다면 언제 어디에 있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본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문제입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처음 젊은이가 던진 질문 속 "무슨 선한 일"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이 "선한 일"을 "사랑"이라고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마태 19,17)는 예수님의 대답 속의 그 "한 분"이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자 젊은이는 자기 질문에 돌아온 응답이 너무 버거워 슬픔 중에 떠났지만, 괜찮습니다. 비록 그가 지금 최종적 고지에 도달할 수 없긴 하지만, 아마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해답이 계속 그의 가슴에서 메아리칠 것이고, 언젠가는 그를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아니어도 되고요. 꼭 하늘의 보물을 차지할 수 없어도, 꼭 사랑의 실천까지는 아니어도 그의 책임감과 의무 이행이 사회의 기본을 구성하는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하느님은 구원에 있어 그리 째째하신 분이 아니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나에게는 무엇을 바라시는지 헤아려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원칙과 기본에 성실한 것만으로 족하다고 하시는지, (사실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선한 일"로 한 걸음 더 나아오기를 바라시는지, "사랑" 때문에 전적으로 봉헌하고 헌신하길 원하시는지...
자비롭고 자유로우신 주님의 구원은 한 도식 안에 박제되어 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을 듯합니다. 조금 더 욕심이 난다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면 되겠지요 나에 대한 주님의 바람과 지금의 나의 방향성이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면서 우리의 순례 여정은 무르익어갈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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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19,20)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19,16)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19,17)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생명을 위한 계명들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19,20)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그 젊은이는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결정적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에 대한 묵상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소중한 재물에 집착한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재물을 포기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슬퍼하며 떠나간 것을 보니.
구원에 결정적 장애가 될 수 있는 나에게 부족한 한 가지, 집착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로 나아가는 복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돌아가신 이정숙 사비나 어머니의 사후(死後) 첫 번째 맞이하는 생신일입니다. 어머님의 생신일은 음력 6.28이고, 이루카 신부의 서품일은 양력 6.28인 것이 참으로 오묘합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천상과 지상에서 함께 하느님의 나라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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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이영근 신부님.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
유대인들은 부와 재산은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와 재산을 가지는 것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이는 생명을 얻는 데는 선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생명으로 가는 길의 시작은 되지만, 완성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더 나아가 행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질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 실수하지 않고 죄짓지 않는 사람, 악습이 없고 상처주지 않는 사람, 상처가 없고 성숙하고 교양 있는 사람, 능력 있고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완전무결한 사람,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일까?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께로 와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받은 복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복을 받은 이는 복을 주는 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팔라”, “주라”, “오라”, “따르라”는 네 가지를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는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십계명을 넘어, 이웃사랑을 넘어, 원수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 것까지 따르는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기고, 그의 실상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율법을 지켰다 하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나아가서 자신을 비우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나누고 선을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 바로 이것이 당신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1-22)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지, 아니면 머뭇거리고 주저하거나 슬퍼하고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말씀을 따름으로써,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가리고 있는 겹겹의 옷을 벗기시고, 벌거숭이로 만드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제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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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연중 20주간 월요일.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에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 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재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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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24,15-24
마태오 19,16-22
‘댐’이 되기보다 ‘폭포’가 되리라!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한 일일까요? 이것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자신이 선하다고 정한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여기고 하지만 사실 악한 일을 경우도 많습니다.
만약 자기 생각으로 선한 일이라고 여기는 일들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석가모니도 선한 일을 말하고, 공자 맹자도 선한 일을 말합니다.
선한 일로만 구원에 이른다면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어떠한 일을 할 때, 그것이 선해지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어야 합니다.
개가 죽어가는 주인을 구했다면 이것은 사람 쪽에서 보면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개는 그것이 선한 일인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주인에게 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으로서 아무리 선해지려고 노력해봐야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세계 1위 부자 ‘빌 게이츠’는 어머니의 권유로 2위 부자 ‘워런 버핏’을 처음 만납니다.
처음에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단 만나고 보니 말이 잘 통했습니다.
‘어떻게 더 많은 돈을 벌 것인가?’만을 생각해오던 빌 게이츠에게 워런 버핏은
‘어떻게 잘 쓸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선재단을 설립하면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2010년 설립된 빌 게이츠 재단의 자선단체가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
입니다.
빌 게이츠는 자기 재산의 95%를 기부하기로 합니다.
워런 버핏도 재산의 99%를 기부하기로 하고 게이츠 재단에는 83%를 내놓기로 합니다.
이후 수많은 재벌의 기부 릴레이가 이어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젊은 부자 청년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부자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빌 게이츠는 그 부자 청년보다는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모든 재산을 기부하라고 하면 빌 게이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며칠 전에도 빌 게이츠는 빈곤국 코로나 백신 공급을 위해 1억 5000만 달러를 지원하였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선의 영광은 빌 게이츠와 그 재단에 함께 도움을 주고 있는 워런 버핏에게 돌아갑니다.
물론 그 일도 훌륭하고 주님께서 갚아주시겠지만, 더 완전한 선행은 ‘선하신 분은 주님뿐’임을 입증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분들은 마치 ‘댐’과 같은 역할인 것 같습니다.
댐은 홍수 조절도 하지만 가뭄 때 품고 있던 물을 공급하여 그 물줄기가 메마르지 않게 합니다.
이 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참으로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도 댐과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될 것인지에 혼돈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돈을 모았다가 필요한 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의 섭리보다는 나의 의지로 선행을 하려는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때그때 흘려보내 주려 노력합니다.
선하신 분은 주님 한 분 뿐이십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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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에제키엘 24,15-24
마태오 19,16-22
한 걸음만 더
한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반성도 했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도 큰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지요.
황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물질문명의 극치 속에 살아가다보니, 은연중에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경향이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나 수도공동체 역시 이런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그 수도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창살 안에 가두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습니다.
스스로 문명세계를 등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평생을 그 좁은 테두리 안에서 마무리 짓습니다.
이분들의 선택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이 싫어서 그 길을 선택했을까요? 세상에 혐오감을 느껴서 일까요?
그도 아니면 실연이라도 당했을까요? 세상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였을까요?
그런데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만 가두었을 뿐 그분들의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삶 전체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했었는데, 그분들의 얼굴에는 ‘행복해죽겠네’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세상을 등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아픔과 상처에 민감했습니다.
그분들의 입술에는 세상을 위한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보다 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보다 완벽히 스승 예수님을 닮기 위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스스로 그 험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 때로 알다가도 모를 분이십니다.
때로 한없이 여유로우시고, 끝까지 인내하시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분이시지만, 때로 요구가 얼마나 많은 분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온 한 청년에게, 그 지키기 어려운 계명들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켜온 요즘 보기 드믄 청년에게 큰 상급을 내리시거나 칭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특별히 열심히 신앙생활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저희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자신들의 어린 제자들에게 힘에 부치는 요구를 많이 하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어린 소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깜짝 놀라 이렇게 반문하곤 했습니다.
“신부님, 제게 지금 장난치고 계신 거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예요?”
돈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애야, 성인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네게 매일 주어지는 일과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으로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래,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고 말거야.”
은혜롭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확실하게 공표했습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습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들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모두를 성화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일상에 대한 충실과 꾸준한 기도생활로 보다 완전함에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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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송영진 모세 신부님
http://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id=1987528&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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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7. 연중 제 20 주간 월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제는 에제키엘의 이스라엘 성전의 짓밟힘, 유린(蹂躪) 과 완전한 사람은 가난 이에게 재산 팔아줌'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힘, 그들의 눈의 즐거움, 영의 그리움이 성전을 더럽히신다. 아들 딸들은 칼엘 맞아 쓰러진다. 고 예언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라. 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단의 인간적 필요의 향유함을 버려야 하늘 나라의 보물을 차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시간의 각 현장을 되돌아 가서 봅니다. 나와 사람들. 활동, 곧 만남, 대화, 행위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잘못, 부정과 거짓을 보며, 나의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와 함께 묵상합니다.
-. 지난 모든 일과 만남에 감사하며, 그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들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게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야기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는대로 하였다.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지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 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24,15-24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 ... "'살인해서... 간음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 거짓 증언해서는 안된다.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하고.... '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절은 이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묵상.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 그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 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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