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무서운 꽃
오 늘
사랑하는 빨간의자가 죽었다
휘청거리는 나무와 서서 바라만 보는 너와 너무하다고 하는 나, 접힌 페이지의 중간부터 불의 상징을 지나는 중이야 그러므로 나는 목각인형이야 한껏 줄을 비튼다고 해서 그게 춤이 되겠어 슬픔에 비트가 붙으면 더 빠르게 몸을 훑는데, 미는 힘이 부족해서 서로에게 갇혀 있나 봐 어쩌다 그늘을 열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가 보일 거야 내 낡은 손목을 기억하니? 자꾸만 엉키는 영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첫 페이지에 앉아서 빗줄기를 긋고 싶은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래 지상으로 묶인 줄이 풀리면 재빠르게 공중으로 사라지는 꽃의 사람들 어제는 목련의 줄이 풀렸고 오늘은 장미의 줄이 느슨해지고 있지 내 향을 기억하니 너의 하루에서 지우고 싶은 것이 뭐야 내 몸에 단물이 배어있을 때 붉게 사라지고 싶어 난 사과를 먹을 거야 이제부터 짓는 모든 죄는 사과 때문이지
그땐, 그때니까
시간은 언제든 시간만의 온도로 사라진다 어디에 미움이 숨겨져 있었을까 어디라는 건 어디에도 없다 꺼진 줄 알았던 불씨 하나가 악몽을 코끝에 풀어놓곤 했다 뜨거워진 숨 때문에 나는 달리는 중에도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직이라는 수신호들이 못 미더웠다 내 변명은 항상 엄마를 통과했고 나는 나를 앓느라 바빴다 내 눈에 힘이 들어갈수록 순해지던 엄마,
*
노랑나비가 앉은 엄마의 스웨터를 입으면 입술 끝까지 치근거리는 달큰한 허밍, 잘 자라 우리 아기- 불 꺼진 방을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주문이야 안도의 울음이야 나를 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물의 엄마 간절해지는 비주* 냉소뿐인 나의 뺨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엄마의 볼 엄마, 늦어서 미안해 난 영원히 엄마 딸만 할 줄 알았어 고개만 돌리면
*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야 나는 엄마가 놓여있던 유일한 흔적 잘 자 우리 엄마-
어제가 와도 다시 새로운 어제가 꾸역꾸역 와도 켜지지 않는 세상, 사막을 놓친 선인장은 저기 슬리퍼처럼 놓여 안녕을
* 볼뽀뽀
근작시
내 가방을 부탁해
우물진 잿빛 눈동자를 만나면 도망가야 해, 라는 충고를 기억했더라도 우리는 흘러내렸을까 휘청거리는 가스등이 발자국을 따라갈 때 푹푹 눈썹까지 차오르던 고요, 흔들리는 먼 곳의 불빛이 네 이름 같아서 깜빡거리는 세상 너는 으르렁거리다 잠이 들고 다시 깨어 울고 가끔 하품을 하다 노랠 부르지 가사가 틀려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네 노래와 틀려버린 나라는 방향, 가방 속엔 단지 그뿐
너는 왜 내게서 도망가지 않는 거야 가쁜 숨을 몰아쉬다 초인종을 누르면 가방 밖으로 튀어나오는 후렴 그리고 죽을 때까지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없는 단 하나의 얼굴,
거울을 통해서만 오로지 겨울 속으로만
사이를 두들긴 건 미처 숨지 못 한 충고와 숨기지 못 한 가방 저기 버려진 발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소리, 이 순간을 소울이라고 말할까 아니 숨을 참다 나란히 느려진 우울, 완벽하게 기댈 수 없어서 아름다운 우리라는 우울
시작노트
‘나’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당신, 불안하게 눈동자가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 흔들림마저 참 아름다울 뿐이야. 당신에게 고여 있는 상처의 힘을 알기에 나는 당신의 꿈속에 큰 창이 있는 집을 짓고 싶어. 그러므로 우리, 어느 날의 하루가 무척 쓸쓸하여도 슬픔의 뿌리를 지상으로는 내리지 말자.
오 늘 2006년 『서시』로 등단. 시집으로 『나비야, 나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