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정리를 하다가 전에 썼던 야간비행 원고를 다시 보았습니다.
이 글은 이봉길 선생의 야간비행이란 책을 침대에 누워 단번에 다 읽어내린 후 그 즉시 써내린 독후감입니다.
이봉길샘 책이 주는 감동과 여운 덕이었겠지만....
남자의 향기
- 이봉길의 야간비행을 읽고-
나는 이봉길 선생을 문우(文友)로 알기에 앞서 산우(山友)로 먼저 만났다.
창수문단에선 나는 제법 원로에 속한다. 허나 창수의 선배이면서도 나는 늘 뒤쪽을 향해 엉덩이를 엉거주춤하니 빼고는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들을 내세우며 언제든 거기에서 도망칠 궁리만 했다. 자연 문우들과의 관계도 소원했으며 문단 행사에도 무관심하고 게을렀다. 그러던 중 내게 발송된 창수 메일을 통해 창수등산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이라고, 산? 산이라…그렇다면 산이나 한번 따라가 봐?
이렇게 해서 뒤늦은 첫 산행을 따라간 게 이봉길 선생과 첫 만남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산행으로 안면은 겨우 텄지만 솔직히 나는 선생의 글을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비단 이봉길 선생의 수필뿐이랴. 수필이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나는 모든 수필에 무관심했으며 특별히 좋아하거나 가까운 수필가의 작품집을 빼고는 배달돼 오는 수필집을 탑처럼 쌓아두기만 했다. 그러다 산행 횟수가 한번 두 번 늘어가면서 선생을 접할 기회도 잦아졌다. 그는 튀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 많은 분도 아니어서(나 또한 그러하고) 선생과 나의 거리는 늘 일정 수준 벌어져 좁혀들 줄을 몰랐다. 다만 이봉길이란 이름 석 자가 내 머리에 입력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 이름이 머릿속에 저장되고 나니 자연스레 선생의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봉길 선생이 채순애 선생과 나를 불러 저녁 자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의 저녁 대접에 보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선생의 글을 성실히 읽었다. 그 때 접한 것이 ‘야간비행’이었다. 그 날의 충격을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까. 선생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작가가 이끄는 야간비행의 공간으로 훅 빨려들고 말았다. 그는 독자인 나를 야간비행기에 태우고는 활주로를 거칠 사이도 없이 단번에 그 숙련된 조종 솜씨로 어둔 하늘을 향해 붕 날아오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첫 문단에서 나를 주춤거리게 하는 글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이다. 나이가 들고 보니 돋보기 코에 걸고 독서하는 것이 노동으로 여겨져 나를 매혹하는 글만 찾아 읽곤 하였다. 아니, 실은 시간도 없고 기운도 달려 매혹하는 글들조차 다 읽어내지 못하는 실정이라 해야 옳겠다. 그러니 지루하게 하는 글들을 어찌 읽어낼 것인가. 수필가가 많아지고 수필이 양산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를 매혹하는 수필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수려한 글 솜씨를 지닌 수필가는 수없이 많지만 문장만 매끈할 뿐 여운이나 음미할 거리가 적은 글들이 많았고 내 글 역시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태작들이 많았다.
이봉길 선생의 <야간비행>은 작가의 능란한 수사가 주는 문장의 맛과 다양한 소재에서 오는 즐거움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수필집이다. 하지만 독자를 끌기 위한 억지 기교나 현학 취미는 보이지 않는다. 평소 선생의 모습처럼 문장의 목청도 높이지 않는다. 더도 덜도 아닌, 심성 깊은 선생의 인품답게 그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매 작품마다 깊이 빨려들며 읽은 걸 보면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선생만의 내공 깊은 능력 덕이 아닌가 싶다. 이번에 상재한 수필집의 첫 장엔 내가 예상했던 <야간 비행> 대신 <다락방 창>이 나와 있었다. 작가마다 자기 수필집의 첫머리에 배치하는 글의 성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을 것이나, 자신의 역작이나 애착이 가는 작품일 것이라는 것엔 별반 차이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보면 선생의 가슴에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는 존재는 역시 어머니라 여겨진다.
독자는 그 <다락방 창>을 여는 순간 어미 잃은 소년 이봉길을 만나게 된다. 첫 장부터 작가는 독자의 누선을 자극한다. 아마도 그 글을 읽은 독자, 특히 여성 독자라면 모성 본능에 누구나 한 번쯤 어미 잃고 우는 소년 이봉길을 가슴에 품어 안았으리라. 나도 다락방에 숨어들어 울고 있는 그 소년을 품에 안고 글을 읽어나갔다. 어둠 내리는 다락방 창가에서 별이나 세고 있는 소년 이봉길의 슬픔에 깊이 이입되려는 순간, 그는 손바닥 만한 바다와 하늘, 그리고 성긴 별들에 갈증을 느끼며 바다건 하늘이건 더 크고 넓은 세상을 향한 도약을 동시에 꿈꾸며 범상찮은 전조증상을 내보인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넓은 바다, 한없이 열려 있는 하늘을 한 눈에 다 넣어버리고 싶었다’며, 그는 눈물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독자인 내게 반전을 예감하는 충격을 가해온 것이다. 내게 있어 이 대목은 인간 이봉길을 읽어내는 키워드가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성 내지는 다중적 면모가 함께 내재되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이봉길 선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만큼 선생과 교분을 쌓은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남자이건만 굳이 자신의 눈물 많음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가 언제적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건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작품상으로 보면 어머니를 상실한 이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제는 한 가정을 이룬 지아비이자 어버이가 된지 오래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그의 내면엔 끊임없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 소년이 내재되어 있음을 본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영원한 여성성을 향한 뿌리 깊은 그리움이 도처에서 절절히 묻어난다.
그래 선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문장은 웬만한 여류의 수필을 뺨칠 만큼 섬세하고도 아름다우며 결 고은 서글픔까지 자아낸다. 책의 말미에 실린 권예자 선생의 글에 이미 상세한 예문이 수록되었기에 나는 여기서 그 미문들을 일일이 열거하진 않으련다. 그렇다고 이런 섬약한 모습을 선생의 전부라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위에서 이미 밝혔듯, 그는 눈물 많은 남자의 행위라고 도무지 볼 수 없는 놀라운 모반의 낌새를 곳곳에서 예고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머니를 향한 목마름 못지않게 그는 보다 큰 세상, 보다 높고 넓은 곳을 향하고 싶은 사나이다운 욕망으로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하여 그는 한 때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마도로스를 꿈꾸었고, 그 꿈은 마침내 윗바다인 하늘을 날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마도로스의 꿈>에서 볼 수 있듯, 하늘을 날면서도 바다를 향한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실토하기도 한다. 그가 끊임없이 높은 산을 오르고 험준한 바위를 타고 방랑하듯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쩌면 그 먼 옛날, 다락방 창을 통해 한눈에 넓은 바다와 하늘을 다 넣어버리고 싶었던 허기를 풀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책을 읽어내리며 한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선생과 산을 오르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앞으로 오토바이를 탈 것이며 마츄픽츄에도 가고 싶다고. 일찍이 무한한 하늘을 다 넣어버리고 싶다고 토로했던 선생의 그 거대한 허기를 다 채우려면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이봉길 선생의 수필집 <야간비행>은 여성인 나에게 대단한 대리만족을 안겨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남성의 향기가 나는, 남성 수필의 전범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작가가 펼쳐주는 너른 바다와 하늘을, 로마와 인도와 폴란드를, 공룡능선과 선덕여왕릉을, 수락산과 용문산의 얼음꽃을 한껏 즐기고 취하면서 모처럼만에 한권의 수필집을 지루한 감 없이 쌈빡하게 읽어 내렸다. <자전거 2>에 나오는, ‘자전거의 바퀴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체인 감기는 음색이 가을 정취와 어우러져 로드리고의 안달루시아 협주곡으로 들린다’는 대목을 읽을 땐 절로 살짝 웃음이 나고 말았다. 아직 자전거를 배우지 못해 한이 많은 내가 어느 새 선생의 자전거에 무임승차하여 그가 들은 안달루시아 협주곡을 듣는 듯한 때문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그의 어떤 작품에서도 유머나 위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의 방어능력 중 가장 성숙된 방어 능력이 유머와 승화라 하였던가. 그렇다면 문우 이봉길 선생의 깊은 눈물이 언젠가는 승화하여 유머로 피어날 날을 나는 기다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남자의 향기 그윽한 야간비행의 즐거움에 조금만 더 머물러 있고 싶다. (2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