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민(서울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의 산문집 『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푸른사상 산문선 53).
저자는 유년 시절의 고향 생각과 그리운 사람들과의 추억 등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사연들을 담백하게 술회하고 있다. 저자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연한 보랏빛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바쁜 일상으로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2023년 12월 10일 간행.
■ 작가 소개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미국 하버드대학교 초빙교수, 일본 도쿄대학교 외국인 객원교수,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버클리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산동대학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현대문학사』(1, 2) 『한국계급문학운동연구』 『이상 연구』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소설과 운명의 언어』 『문학사와 문학비평』 『분석과 해석』 등이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린다. 사람은 잊어버리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 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마다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있는 일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담겨진 사연들은 모두가 고향을 떠나면서 생겨났다. 고향 생각은 언제나 연한 보랏빛으로 내 어린 시절과 겹친다. 그리고 거기에는 다시 만나고 싶은 얼굴들이 옛 모습 그대로 가득하다. 그 시절의 얼굴들을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나는 그리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떠오르는 그 시절을 기억하는 순간마다 가슴 벅찬 행복을 느낀다. 그리움이란 내 마음의 거울이다. 문득 내 앞에 다가와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다.
■ 산문집 속으로
“글쎄, 아침에 나가보니 수선화가 두어 송이 벌어졌네.”
어머니가 전해주는 꽃소식이다. 노란 수선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담장 아래로 여기저기 수북하게 돋아나던 이파리 가운데 꽃대궁이 올라왔는데 작년보다 좀 이르게 오늘 아침 꽃망울이 터졌다고 자랑이시다. 이른 봄날 아침 수선화꽃으로 어머니는 사뭇 즐거우신 모양이다. 어머니의 전화는 언제나 첫마디가 꽃소식이다. 하얀 목련이 꽃대궐을 이루었다고 전화하시면서, 건넛집 새댁이 딸애를 낳았는데 아기 울음소리만 들어도 너무 반갑고 고맙다는 말씀이다. 뜰 안 잔디밭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피어난 할미꽃 이야기를 전하시던 어머니는 보름 전 세상을 떠난 솟재고개 너머 최씨댁 할머니 이야기로 이어간다. 아들이 보고 싶다는 말씀 대신에 모란꽃이 큰 잔치마당을 벌였는데 한번 내려오지 않겠느냐고 꽃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담장으로 벋어 올라간 능소화꽃 이야기 끝에 선창가 장씨네 아주머니가 갑오징어 한 꾸러미를 보내왔다고 자랑이시다. (「꽃소식」, 11~12쪽)
헌책방에서 구한 낡은 책, 하지만 내가 꼭 가지고 싶었던 귀한 책을 책상 위에 펼쳐놓았을 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헌책은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것이다. 처음에는 돈을 주고 사서 소중하게 읽은 후 소용이 없어지면 내다 버린다. 헌책에서 묻어나는 것은 흘러간 시간의 내음만이 아니다. 그것이 돌고 돌아오면서 묻혀온 사람과 장소의 향취도 짙게 풍긴다. 나는 이 독특한 책의 냄새가 그리 싫지 않다.
(「헌책의 향기」, 224~2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