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량과 이여송의 북경 집터 풍수
2019년 8월 10일
명대에 지식인들은 대체로 술사(術士)들이 보는 운명과 관상을 잘 믿지 않았으나, 오히려 지식인들이 보는 운명과 관상은 가끔 믿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식인들은 집터와 무덤 터를 보는 풍수도 잘 믿지 않았습니다.
卷七,「星相」:
術士談命、談相,百無一中,然士人則有奇驗者。
출처:沈德符,『萬曆野獲編』,卷二十,「居第吉凶」:
집터가 좋은지 나쁜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검증된다. 내(沈德符)가 알기로는 대학사 엄숭(嚴嵩, 1480-1567)이 살았던 옛날 집터는 3번이나 재산이 국가에 몰수되고 가족이 처벌 받은 적이 있다. 집터는 북경 동성대가(東城大街)에 있는데, 석대인 골몰길(石大人 胡同, 현재 북경 外交部街)처럼 상가들이 늘어선 번화가이다. 먼저 영종황제시기에 무관으로서 군공을 세웠던 충국공(忠國公) 석형(石亨, ?-1460)이 국가로부터 받아 살았던 집터이다. 석형이 패망한 뒤에는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았다. 뒤에 함영후(咸寧侯) 구란(仇鸞, 1489-1552)이 집터를 사들여 살면서 세력이 커졌는데 석형 못지않았다. 죽은 뒤에 법에 따라 효시되고 적몰 당하였는데 참화는 석형보다 심하였다. 현재 이 집터에는 철물을 주조하는 용광로를 설치한 제련소가 있다. 곁에 커다란 집이 있는데 석형이 사용하였던 별채인데 커다란 규모는 다른 건물보다 몇 배나 크다.
현재는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이 국가로부터 받아서 살았다. 이성량이 1591년 파직당한 뒤부터 북경에 돌아와 여기에 살았다. 이성량 부자 6명 모두 대장군이 되었고 1품까지 진급하여 존귀하게 번성함이 천하에 떨쳤다. 이성량이 병들어 집안에서 죽었고, 큰아들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이 몽고족 정벌에서 패전하여 죽었고, 이여송의 큰아들 이세충(李世忠)이 정원백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세충은 성격이 건방지고 포악하여 깡패들과 어울리면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결국에는 아무도 그를 보호해주지 않았다. 현재도 집안에는 할아버지(이성량)의 영구가 있는지 10년이 지나도 묻지 못하였다. 다른 건물들은 모두 남에게 저당 잡히고 그 돈으로 가축을 잡고 술을 사서 흥청망청 써버렸다.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성량 집안의 몰락을 알고 한숨을 쉬었고 풍수쟁이의 말이 헛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 이밖에도 최근의 역사소설 『我的天啟生涯之晚明中興』에서는 李世忠이 외동딸 이삼낭(李三娘)을 두었는데 성격이 거칠었다고 묘사하였습니다. 16살에 파혼 당하자 화가 나서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가서 남자를 죽였고 집안에서 그녀를 요동지방에 숨겼다고 합니다.
沈德符,『萬曆野獲編』,卷二十,「居第吉凶」:
地理吉凶,時亦有驗。如余所知,嚴分宜舊第,已三度籍沒矣。其在東城大街者,如石大人胡同,亦闤闠鬧處。英宗時爲忠國公石亨賜第,亨敗後,無人敢居。後咸寧侯仇鸞得之,仇勢張甚,不下石氏。其身後正法梟斬見籍,慘禍更甚於亨。此第今爲鑄冶開爐之所,其旁一大宅,即石氏偏傍廳事,亦宏敞過他第數倍,今爲寧遠伯李成梁賜第。
成梁罷鎮還京居之,父子六人,俱爲大帥,皆至一品,貴盛震天下。成梁老病死牖下,長子如松戰歿,松胄子名世忠當襲爵,而頑囂無賴,貲產蕩盡,遂無人肯保任之。今惟正寢停乃祖靈柩,十年不葬,他屋悉質於人,屠酤囂雜。過者歡息,信乎形家之說不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