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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미학과 구도求道의 시학
―한이나 시인의 시세계
황치복(문학평론가)
구도求道의 일상, 깨달음 향한 도정
1989년 시와 의식의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온 한이나 시인의 시선집이다. 첫 시집인 귀여리 시집부터 최근의 물빛식탁의 대표작들을 간추려 놓아서 시인이 그동안 추구해 온 시세계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시선집의 매력일 것이다. 시편들 또한 이렇게 수작들이 많은 시선집을 살펴보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작품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데, 그동안 시인이 얼마나 한편 한편의 시작품에 공을 들여서 창작에 임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이나 시인의 시적 매력은 절제를 통한 담백한 시적 여백의 구축,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의 정신이라고 생각된다. 담백하고 여유 있는 시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시인은 최대한 언어를 절약하고 있으며, 동양의 수묵화와 같이 농밀한 감정이 탈색된 언어를 통해서 담백한 품격과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의식은 매우 치열해서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 평정의 마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가열한 정신이 요동치고 있다. 시인의 구도를 위한 노력은 일상 생활에서부터 예술적 창작과 향수에 걸쳐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품격과 격조가 작품의 심미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시인의 내면에는 구도를 위한 가열한 시정신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자잘한 일상 또한 다음과 같이 구도를 위한 수행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마음을 몸에 붙이지 못했던 날들 뒤로 가고
꽃으로 꾸며진 경전 길 곡선 따라
믿을 신信 한 자 꼬옥 붙잡고
생각의 생각조차 내려놓고 걷는 학교 가는 길
길섶 풀씨가 익어 터지는 소리를 보다가
둑길에 애기똥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읽다가
시냇물 흐르는 물길을 내 안에 들이다가
버들치 피라미 붕어와 분탕질 치다가
유희삼매에 빠져
해찰하며 해찰하며 가는 길
늦은 나이 늦은 학생이 천,천,히
무심걸음 떼어놓는, 화엄 발자국
새로 돋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금강 언덕 오르며 온 마음을 내려놓는다
텅 빈 그 속에 움이 트는,
몸이 마음이 있지 않다
―「화엄 발자국」, 전문
학교에 가는 평범한 사건이 구도의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꽃으로 꾸며진” 길을 시적 주체는 “경전 길”로 인식하고 있는데, 학교 길이 경전 길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고,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시적 주체는 이 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이치를 읽거나 받아들이며,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이나 마음을 내려놓는다. 예컨대 이런 식인데, 시적 주체는 “길섶 풀씨가 익어 터지는 소리를 보”기도 하고, “둑길 애기똥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읽”기도 하며, “시냇물 흐르는 물길을 내 안에 들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풀씨가 터지고, 애기똥풀이 흔들리는 등의 자연 현상이라든가 시냇물이 흐르는 물길 등의 형태는 어떤 이치와 섭리의 상징으로 작동하면서 시적 주체에게 독법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시적 주체는 이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그것을 읽어내려고 하며 “새로 돋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시적 주체는 이를 위해서 “유희삼매에 빠져/ 해찰하며 해찰하며”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니까 학교에 가야 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침잠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시적 주체는 “생각의 생각조차 내려놓고 걷는 학교 가는 길”이라고 명명하기도 하고, “금강 언덕 오르며 온 마음을 내려놓는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시인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텅 빈 그 속에 움이 트는”이라는 시안詩眼에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을 텅 비운 마음속에 생명의 기운이 움트기를 기원하는 것인데, 일상이 바로 구도를 위한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이 시인의 시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듯하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의 재봉틀 작업을 보면서도 “어머니 재봉틀 앞에 경經 읽듯 앉아/ 온 맘 온 힘을 보태 한 땀 한 땀/ 삼베조각보자기 요호청 베개보 무시로 길을 만든다”(「어머니와 재봉틀」)라고 하면서 재통틀에서 ‘경經’을 발견하기도 하고, ‘길’을 읽어내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시인의 이번 시선집에서 세상을 파악하는 행위를 ‘독서’로 간주하고 그것을 구도의 주요한 방법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루의 끝을 짚으며/ 나를 밀어내고 들어앉은 남이 나로 바뀔 때까지/ 무거운 책 속의 다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내 몸의 아픔도 잊고 밀밭 사이로 걷는 독서/ 저 진흙 세상에서 마악 빠져나오려는”(「걷는 독서」)라는 구절이 대표적인 표현인데, 시인에게 독서는 ‘다른 길’을 발견하는 행위이기도 하며 ‘진흙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구도의 과정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기에 그것은 고통의 단련으로 이해된다. “쇳물이 되었다가 뜨겁게 열 가한 칼날이/ 도라지꽃으로 푸른빛을 띨 때/ 때려 펴고 갈아주길 무수히 반복하면/ 고통의 한 가운데/ 녹슬지 않을 금강의 시간들”(「파릉의 취모검」)이라는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구도의 과정은 때리고 펴는 과정의 반복이며 고통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지난한 고행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구도의 과정이 앞에 인용한 시에서도 그렇지만, 자연의 현장에서 발현된다는 점이다.
가을 월정사 전나무의 참빗 바늘잎 숲길
저 육백 살 전나무 고목 등걸
슬픔을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는
속이 텅 빈 밑동이다
채움에서 비움으로 가는 중이다
비로자나불 봉우리 구름바다에 묻힌
첩첩단풍 속,
걷다보면 자연 경전의 수많은 경구들
바늘나뭇잎
참빗되어 나를 씻는다
―「나를 씻는다」, 전문
구도의 노력은 “씻는” 행위로서의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것은 또 비움과 통한다. 비움은 또한 “슬픔을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는”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의 간난신고艱難辛苦에서 오는 슬픔을 모두 겪어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운다는 것은 곧 “돌처럼 딱딱하게 뭉친 슬픔의 응어리 죄다 풀려나와/ 심죽에 흡인되는 한순간을 보셨는지요”(「심죽心竹」)라는 표현처럼 온갖 응어리진 감정의 찌꺼기들이 죄다 풀려나와서 텅 빈다는 것이며, “속내를 앓다가 다 비운 자리에/ 그만큼의 소슬한 바람으로 채운다”(「대꽃」)는 것을 의미한다. 소슬한 바람으로 채워진 내면이란 곧 자유와 해방으로 가득 찬 텅 빈 충만의 공간일 것이다.
그런데 시적 주체는 이러한 원리를 자연이 체현하고 있는 모습에서 깨닫는다. “저 육백 살 전나무 고목 등걸/ 슬픔을 채운 자만이 비울 수 있는/ 속이 텅 빈 밑동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또한 “걷다보면 자연 경전의 수 많은 경구들/ 바늘나뭇잎”이라는 표현처럼 자연은 하나의 경전이기도 하며, 세부적 모습들은 그 경구들이기도 한데, 시적 논리에 의하면 ‘바늘나뭇잎’이 하나의 경전이자 경구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참빗이 되어 나를 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씻는다는 것은 세속적 욕망과 티끌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정화라는 것이 곧 비우고 채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음을 시상의 전개가 이미 피력하고 있다.
이처럼 한이나 시인의 시편들은 일상과 자연의 세세한 국면들이 함축하고 있는 깨달음의 상징에 주목하고 그것을 읽어내려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 구도의 과정은 곧 독서의 과정이기도 한 셈이다. 시인에게 인생과 자연이란 오묘한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거대한 한 권의 책으로서 그것을 읽어내는 과정이 곧 구도의 과정이기도 하다. 구도 과정은 궁극적으로 “나를 씻는다”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정돈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음 작품이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능엄경 밖으로 사흘 무단가출해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안
으로, 조용히, 불러 들였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혹사
시킨 말의 상처, 그 뭇매를 맞은 죄 없는 마음을 치료하려,
곰취 잎사귀에 뿌리를 넣어 녹즙을 냈어요 뿌리로 독을 빼
낸, 푸른 물 한 컵, 공복에, 쭈욱 들이켰어요 그리고는 식탁
에 앉아 잠시, 찰나삼매에 빠졌지요 평상심, 그 편안한 느낌
을 금방 알아챘어요 현재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하나, 바깥
의 마음을 보았지요 마음을 허방에 빠뜨리고, 껍데기만 거
리를 오고 가면서, 왜 그리, 허둥대고 사방 분주하였던지요
나를 알아차림 후에는, 진정 흔들림 없고 치우침 없는, 고요
가 올까요 이제 마음을 몸에 붙여, 참하게 길들이기로 하겠
어요 몸통이라는 그릇에 담은 본 마음, 있는 그대로 그대를
그리고 나를 보기로 합니다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 전문
능엄경이란 불교의 이치와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불교 경전이자 불교 입문 교재인데, 시인은 이를 해석하여 마음을 다스려서 평정에 이르는 방법으로 수용하고 있다. 마음이란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혹사시킨 말의 상처”로 인해서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치료가 필요한데, 시인은 “곰취 잎사귀에 뿌리를 넣어” 만든 “녹즙”을 마시며 “찰나삼매”에 빠지는 과정을 통해 치료의 방법을 찾아낸다. 찰나삼매의 구체적인 내용은 허방 다리에 빠져 허둥대는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마음, 즉 “현재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하나, 바깥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허둥대며 방황하는 자신의 마음에서 잠시 벗어나 그것을 바라보는 바깥의 마음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평정에 도달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인데, 바깥의 마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맹목과 아집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이러한 해방의 과정을 “나를 알아차리”는 자아 각성의 순간으로 이해하며, 그러한 각성은 “진정 흔들림 없고 치우침 없는, 고요”에 도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흔들림이 없고 치우침이 없다는 것은 곧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고, 미혹과 의구심에서 해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깨달음의 과정이란 자아라는 주관의 아집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여(如如)의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여여(如如)란 분별심이 끊어져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파악되는 마음 상태, 혹은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몸통이라는 그릇에 담은 본 마음, 있는 그대로 그대를 그리고 나를 보기로 합니다”라는 구절이 그러한 여여의 깨달음의 경지를 서술하고 있다. 불교적 상상력에 의지하는 시인의 구도의 자세가 이러한 작품에서 한 극점을 이루고 있거니와 시인은 종교적 구도의 자세 뿐만 아니라 예술에 임하는 자세 또한 구도의 그것을 취한다.
2. 예술, 하나의 도에 이르는 길
느릿느릿 붓끝에 먹물 묻혀 사군자를 친다
창호지에 새벽 푸르름이 묻어올 때까지
선을 따라 대를 그리고
마디를 넣고
이파리를 하나 하나 채워가는 딴 세상
먹참선 대나무 그림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는다
마디 마디 나를 느낀다
두루적막 속 먹향기는 멀어질수록 향기롭다
―「먹참선」, 전문
먹물로 사군자 중에서 특히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치고 있는데, 시인은 제목을 통해서 대나무를 그리는 과정을 ‘먹참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인의 다른 시편인 「다선일미(茶禪一味)」, 즉 차를 마시는 다도와 불교의 수련 과정인 참선이 하나로서 다르지 않다는 발상을 발휘하여 사군자를 그리는 수묵화의 작업이 깨달음을 위한 참선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붓꽃 춤」이라는 작품에서는 서예의 활동에 대해서 “붓 끝에서 피어나는 묵향”이라고 하거나 “마음절벽에서 써내려 가는 붓글씨”라고 하면서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단순한 쓰기 작업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도 먹으로 사군자를 치는 행위에 대해서 “선을 따라 대를 그리고/ 마디를 넣고/ 이파리를 하나 하나 채워가는 딴 세상”이라고 하면서 수묵화를 그리는 활동이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는다”라고 하면서 잡다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어떤 몰입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마디 마디 나를 느낀다”라는 대목을 보면, 묵으로 그린 대나무의 마디 마디가 단순한 대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림 속의 대나무와 자신이 합일된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는 이 대목은 대나무를 그리는 행위가 곧 자신의 어떤 정신이라든가 혼을 투여하는 과정임을 표상한다. 자신이 대나무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혼의 예술을 표방하는 다른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자.
구름무늬 한지에 문장을 다 써도
붉은 낙관 하나
차마 찍지 못한다
저 구부러진 글자들의 살아 숨 쉬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글자의 살갗 위 혈관이 만져지지 않는다
글자의 뿌리 그 뼛속 사무침도 보이지 않는다
구름무늬 한지의 먹빛 문장
궁서체 한 호흡만큼
울음의 구름장 너머 저편이
어둠보다 깊고 멀다
마음의 바닥에서 울려오는 비명소리
그 번개 낙관을
한밤내 기다렸다
―「번개 낙관」, 전문
잘 알려져 있듯이 낙관(落款)이란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뒤 작품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 그린 장소와 날짜 등을 쓰고 도장을 찍는 일을 뜻한다. 그러니까 낙관이란 어떤 작품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한지에 글씨를 써넣고도 차마 낙관을 찍지 못한다. 시인이 글씨를 쓰고도 낙관을 찍지 못하는 행위 속에는 글씨가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것, 즉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글씨가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곧 자신이 쓴 글씨가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즉 글씨가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신의 글씨가 기운생동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다양한 표현을 통해서 강조하는데, “저 구부러진 글자들의 살아 쉼 쉬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라든가 “글자의 살갗 위 혈관이 만져지지 않는다”, 혹은 “글자의 뿌리 그 뼛속 사무침도 보이지 않는다” 등의 표현들이 예술의 절대적 경지에 들지 못한 자신의 작품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에 묘사되어 있는 “마음의 바닥에서 울려오는 비명소리/ 그 번개낙관을/ 한밤내 기다렸다”는 구절은 구도의 정신을 담고 있는 바, 어떤 초월적 경지의 예술적 영감이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을 더 읽어보자.
허공 한지에 고백처럼 선 하나 내리그었네
거친 생각이 무심한 듯 허공에
빗발치는 선
수도승처럼 수천수만 번 붓질하면
얻어질 반야의 저 색채요법
저를 비울수록 색이 깊네
내 안의 말을 줄이고
들끓는 색을 지우고
한밤내 긋고 또 긋는 붓질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패랭이꽃 치자꽃 자연을 닮은 묘법의
한 획
나 절필해도 좋으리
―「아득한 묘법」, 전문
서예(書藝)를 통한 묘법의 경지가 펼쳐지고 있다. 작품의 논리에 따르면 선 하나를 내리긋는 것은 단순한 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수도승처럼”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과 닮아 있으며, 그래서 서예의 궁극적인 목적은 반야, 곧 깨달음을 통해 얻게 되는 근본적인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묵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기에 “저를 비울수록 색이 깊네”라든가 “내 안의 말을 줄이고/ 들끓는 색을 지우고/ 한밤내 긋고 또 긋는 붓질”이라는 묘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자신을 비우는 수도의 과정이며, 묵언 수행을 통해서 번뇌를 끊는 고행의 과정인 것이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서예의 궁극적 목표는 자연에 귀의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패랭이꽃 치자꽃 자연을 닮은 묘법의/ 한 획”이라는 표현 속에 그러한 경지가 표상되어 있는데, 그토록 자신의 마음을 고백처럼 내리 그었던 붓글씨는 “자연을 닮은 묘법의/ 한 획”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이 자연과 같아지는 것인데, 이는 앞서 말한 여여(如如)의 경지와 다르지 않다. 있는 것을 조금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것을 글씨 자체를 통해 체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심, 반야, 자연, 여여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었지요
칠백 년만에
버들잎 관음도 속으로 들어가 마주 서 있었지요
어둠 저편 나를 만나려 고려에서 건너온
관음의 눈빛 쓸쓸함을 보았지요
수없이 각기 다른 색을 포개어
풀어낸, 비단 화폭의 고고함
슬픈 듯 깊고 깊은 고요로 빛났답니다
나의 고단함을 보살핀다는 자비의
버들잎 부처를 보았지요
손가락 끝에서부터 연꽃무늬 옷자락 치마 끝까지
흐르는 선, 차분한 농담의
아름다운 극치
겉으로 한 벌 걸친, 한바탕 꿈속의 짧은
꿈세상을 보았다니요
버들잎 관음도 밖으로 걸어나와 거닐은 국립중앙박물관
떡갈나무의 마음이 꾸며낸 환상 붉은 가을이
다시 꿈속이었다니요
―「버들잎 관음도」, 전문
버들잎 관음, 혹은 양류관음(楊柳觀音)이란 불교에서 병고(病苦)를 덜어주는 관음으로,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버들잎 관음도는 그러한 관음의 상을 그린 불화인데, 불교 예술의 백미로 꼽힌다. 시인은 이러한 “아름다운 극치”에 도달한 버들잎 관음도에 대해서 “수없이 각기 다른 색을 포개어/ 풀어낸, 비단 화폭의 고고함”이라고 묘사하는가 하면 “슬픈 듯 깊고 깊은 고요로 빛났답니다”라고 하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깊고 깊은 고요로 빛나는 버들잎 관음도를 보면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장면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애달프고 구슬픈 정동에 휩싸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시인은 “흐르는 선, 차분한 농담의/ 아름다운 극치”라고 하면서 절정의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작품을 찬탄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어떤 절정과 극치에 도달한 예술품은 시인으로 하여금 꿈 속 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었지요”라든가 “겉으로 한 번 걸친, 한바탕 꿈속의 짧은/ 꿈세상을 보았다니요”라는 표현들이 바로 그러한 예술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고 있는데, 꿈세상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꿈세상이란 차안에 없는 세상, 곧 피안의 어떤 유토피아적 세상을 암시한다. 예술은 시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없는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데, 그 세상에는 고통과 번뇌가 없는 세상일 것이다. 고통과 질병에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버들잎과 물병을 든 관음도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버들잎 관음도 밖으로 걸어나와 거닐은 국립중앙박물관/ 떡갈나무의 마음이 꾸며낸 환상 붉은 가을이/ 다시 꿈속이었다니요”라는 구절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한 위대한 예술작품은 현실을 정화시켜 마치 꿈속 세상인 것처럼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속악한 현실 그 자체가 살만한 세상, 혹은 꿈결을 거니는 듯이 아름다운 세상, 온 세상이 울긋불긋 아름답게 단풍으로 물든 그런 세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 번뇌와 고통이 있을 리 없다.
3. 깨달음의 경지, 혹은 해탈의 마음
지금까지 우리는 한이나 시인이 추구한 종교적 구도의 시의식과 예술적 구원의 시의식을 살펴보았다. 시인은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이나 자연의 평범한 현상들이 어떤 깨달음의 메시지를 간직한 상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읽어내려고 하는데, 그러한 독서의 행위가 곧 구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시인은 수묵화라든가 서예와 같은 예술 활동이 단순히 심미적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적 과정이 아니라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절대적 경지, 혹은 아름다움의 극치에 도달하기 위한 고행의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종교적 구도와 예술적 구도의 과정을 통해서 시인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
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
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
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
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전문
물론 이 작품이 시인이 추구하던 종교적 구도와 예술적 극치의 어떤 경지를 그린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추구하던 평정의 마음, 혹은 어떠한 고뇌와 번민도 없는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다.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란 곧 그늘의 세계인데, 그것은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람”인 그가 추구하는 세계와 대립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그늘에 상주하는” 존재로서 그늘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그늘에는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이라는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정도의 우울함이 있기도 하고,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라는 구절에서 추출할 수 있는 슬픔의 정서가 스며 있기도 하다.
그런데 시인이 추구하는 그늘이란 “삼십 년 된 목백합 한그루가 창을 가린다”처럼 목백합에 둘러싸여 있는 그늘이기도 하고,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열면 나타나는 “내 안의 다른 길”이자 “비밀의 정원”으로서 시인의 은밀한 소망과 가치가 스며 있는 무의식적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녹색의 장원”, 혹은 “푸른 그늘”이라는 표현처럼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으로 표상되는 그늘이기도 한데, 이러한 묘사들은 그늘이 자연의 어떤 이면으로서의 이치라든가 섭리 같은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그늘은 일본의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음예 예찬」이라는 글에서 말한 음예(陰翳)의 개념을 연상시키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라는 개념은 그윽하고 아득한 어둠으로서 예술적 창조력의 원천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 작품은 좀더 직접적으로 깨달음의 경지가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탑은 날지 못하는 새
그는 길고 긴 폭풍우길 번개길에도
외로움을 안쪽으로 가두고 서 있는 그림자
설움도 켜켜이 쌓아 삭힐 줄 아는 질그릇
상처마다 사리를 품고 생멸을 견디는 고요
탑이 되기 위하여
진흙을 밟고 선 연꽃 받침대 위에 나의 영혼을 얹고
일곱 마디뼈를 일으켜 세우는,
탑 뒤로 내 몸 그림자 길게 기울어진다
내일이란, 탑 앞을 흘러가는
저 가벼움의 흰 구름
무한허공을
무심히 떠가는 한 마리
새가 된 나의 탑
―「탑은 나의 새」,전문
“탑은 나의 새”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탑은 시적 화자의 내적 열망을 대변해주는 분신인데, 새로 비유하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것이 시적 화자의 해방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체현하고 있는 대상임을 알 수 있다. 탑은 물론 여러 층이 중첩된 건물이라는 점에서 어떤 가치를 위해서 쌓아온 노력과 고투를 표상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용도라든가 영험한 공간을 뜻하기 위한 목적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적인 가치를 암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설움도 켜켜이 쌓아 삭힐 줄 아는 질그릇”이라든가 “상처마다 사리를 품고 생멸을 견디는 고요”라는 묘사들이 탑이 내포하는 정신적 가치라든가 인품의 격조 같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탑이 되기 위하여/ 진흙을 밟고 선 연꽃 받침대 위에 나의 영혼을 얹고”라든가 “일곱 마디뼈를 일으켜 세우는/ 탑 뒤로 내 몸 그림자 길게 기울어진다” 등의 비유적 표현들은 탑이 표상하는 그러한 정신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한 고행과 고투의 과정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완성된 탑의 모습은 ‘흰 구름’이라든가 ‘새’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내일이란, 탑 앞을 흘러가는/ 저 가벼움의 흰 구름”, 그리고 “무한허공을/ 무심히 떠가는 한 마리/ 새가 된 나의 탑” 등의 표현들이 그것들인데, 이러한 표현들은 시적 화자가 완성한 탑이 곧 자유와 해방의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작품을 더 읽어보자.
나무의 갈색에서 선의 색깔을 본다
갈색은 절정을 휘돌아 나와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늦가을
불문곡절 혼자 튀어 주목받지 않아도 좋은
나무감정을 추스려 내공을 쌓은 기도
정서를 풍요롭게 만드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짙어지는 찬란
점잖게 늙은 느티나무의
말 없음
벼를 다 베어버린
들판의 텅 빈 충만
공空에 이르는 길,
괜히 쓸쓸하여도
때가 되면 회자정리를 하는 이의 색
비워져 다시 돌아오고자
―「갈. 색.」,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갈색을 보면서 “공空에 이르는 길”이라고 비유하고 있지만, 시인이 주로 주목하는 대상은 공空보다는 색色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다른 곳에서 “이제 나는 어둠 속에 있기를 희망한다”고 고백하면서 “가장 까만 검정색은/ 섭씨 천 이백도/ 슬픔의 불을 태운 자만이 얻는 색경”이라고 하면서 검정색을 예찬하기도 하고, “죽음 같은 통점/ 가장 까만색을 알아버린 사람만이 얻는/ 황홀한 절망, 색의 경전”(「색경色經」)이라고 하면서 검정색이 지닌 역설과 아이러니를 발견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흰색에 대해서는 “하늘과 바다의 파란빛에 들어있는 저 흰빛/ 순결과 공포의 색/ 모든 색의 시작이며 끝인 색/ 죄없이 바다에 수장된 영혼의 그림자”(「너라는 귀신고래」)라고 하면서 오묘하고 신비로우며 어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을 그것에 부여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시에서는 갈색에 대해 주목하면서 “갈색은 절정을 휘돌아 나와 본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늦가을”이라고 하면서 갈색이 불교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본래면목을 체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진면목(眞面目),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인위적인 행위가 가해지지 않은 것으로 시비가 없고 분별이 없으며 조작이 없고 생멸이 없이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나무의 갈색에서 선의 색깔을 본다”는 구절에서 선이란 곧 선(線)이 아니라 선(禪)으로 읽을 수 있는데, 선에서 추구하는 수행이 바로 이와 같은 자신의 본래면목을 파악하고 자각하는 행위이고, 선의 깨달음이 곧 본래면목의 터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래면목의 구체적인 속성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짙어지는 찬란”, 혹은 “점잖게 늙는 느티나무의/ 말 없음”이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발현하는 것, 혹은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실현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본래면목의 진정한 속성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미래를 미리 당겨 예측하면서 “이쪽과 저쪽의 경계 오래 바라보며 순종과 초월을 새겨야지”(「나에게 건배」)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때 순종과 초월이 바로 본래면목의 실현을 구체화하는 실천일 것이다. 본래의 본성에 따라 순종하면서 어떠한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초월이 바로 본래면목의 실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갈색에 대해서 “벼를 다 베어버린/ 들판의 텅 빈 충만/ 공空에 이르는 길”이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묘사 역시 있는 그대로의 천지자연이라든가 인생역정이 지닌 본래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진면목일 것이며, 이러한 본래면목을 수용하는 것은 곧 집착과 아집에서 해방되어 ‘텅 빈 충만’의 내면적 풍요에 도달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한이나 시인이 구축한 종교적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의식과 예술적 완성을 위한 구도의 정신이 구축한 해방과 자유의 내면 풍경을 더듬어 보았다. 시인은 일상과 자연에서 깨달음의 상징을 해석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인생과 자연의 본래면목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 구도의 정신이 가열하지만, 시인의 시편들은 언어를 최대한 절약하여 여백의 공간을 극대화하고 있으며, 최대한 농밀한 정서를 배제함으로서 담백한 시적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절제와 담백의 시적 공간으로 인해서 시인이 추구한 구도의 정신이 더욱 실감나고 리얼하게 다가오는데, 이러한 시적 공간이 집착과 미련을 떨쳐버린 시정신의 맑은 격조를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