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애지 봄호에서
일상을 견디는 시, 발효되는 언어의 향기
유지현
늘 있는 사건 하나. 그것의 감내. 일상적 당혹 한 가지.
- 프란츠 카프카, <일상의 당혹>
박용숙 시의 덕목은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다. 일상의 섬세한 관찰은 글쓰기의 긴요한 바탕을 이루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일상에 누적된 부정적이고 소모적인 삶의 모습 또한 끌어안아야한다. 박용숙 시의 세심한 관찰은 세속적인 누추함을 거쳐갈 수밖에 없는 씁쓸함을 안고 있기도 하지만 일상의 비루함을 꿰뚫어나가겠다는 의지가 발현되는 바탕이기도 하다.
루돌프 아른하임이 『시각적 사고』에서 지적한대로, 사고라는 인지작용은 지각보다 상위에 있는 정신적 과정이 아니라 지각 자체를 이루는 본질적 요소이다. 섬세한 지각을 통해 일상을 관찰하고 이를 성찰로 성숙시켜가는 박용숙 시는 스쳐 지나가는 일상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그리하여 일상에 대한 지각이 예민해질수록 삶을 들여다보는 성찰적 사고는 강렬해진다.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중략>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공동경비구역> 부분
시 <공동경비구역>은 안온한 주거공간을 ‘공동경비구역’이라는 낯선 공간으로 명명하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공동경비구역’은 서로를 탐색하고 견제하는 공간이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는 구절은 공간이 주는 긴장감을 감각적으로 포착해낸 표현이다. ‘공동경비구역’으로 비유된 아파트 ‘엘리베이터’의 공간적 거리감에는 시적 자아가 지각한 일상의 당혹스러움이 내포되어 있다.
긴장되고 불편한 공간에는 일상의 속물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있어 시적 자아를 불편하게 만든다. ‘공동경비구역’의 긴장감은 일상을 살아가는 시적 자아가 뚫고 지나가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이를 다루는 자아의 노력은 자연의 섭리를 원용하는 것이다. ‘무장 해제’가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자연의 섭리는 ‘봄꽃’의 화사함이다. 시적 자아는 인간 노력과 자연의 섭리가 합치되는 지점을 희구하는 것이다. ‘봄꽃’의 화사함이 함축하는 의미는 시적 자아가 지향하는 바를 구체화하여 보여준다.
시는 속물스러운 인간의 일상을 비유하면서 ‘거울’이라는 시적 장치를 놓치지 않는다. 섬세한 지각의 시선은 세속적인 일상을 포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외면’과 ‘무표정’을 지나 ‘거울’에 이른다. ‘거울’은 우리가 사물의 섬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여 변화하고 반성하는 존재라는 것을 되새기게 해준다. ‘거울’을 통해 우리는 한갓 속물스러운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모색하는 사유의 계기를 얻기 때문이다.
박용숙의 시는 일상세계의 진부함이 자리한 공간의 한복판에서 세상의 허위와 모순과 불합리로 가득한 삶을 향해 던지는 질문을 시작한다. 시인은 질문을 예리하게 일상 가운데로 꽂기보다는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에둘러서 간다. <공동경비구역>, <고려장>은 그러한 시적 사유의 한 축을 보여준다.
오랜 기다림에 심장 멎고 목뼈 주저앉은 나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그깟 노잣돈 몇천 원이 아까워
CCTV 깜빡 조는 분리수거장 뒤편에
슬그머니 내다 버렸다
달빛마저 애써 외면하는 밤이었다.
<고려장> 부분
시 <고려장>은 과학이 삶의 편의성을 점증시켜가는 시점에서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비양심적인 행태를 보이는 현대의 시류에 대한 따끔한 일침을 담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옛 ‘명성’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최신형 제품에 밀려나 ‘뒷방’에 초라하게 들어앉는 신세가 된다.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편리성이 지배적인 시대에 ‘대숲의 바람’이 주는 옛 정취는 이제 차지할 자리가 마땅치 않다. 많은 것들이 손쉽게 새 것으로 대체되고 쉽게 버려진다. 시는 폐기물이 버려지듯이 ‘CCTV 조는’ 틈에 양심 또한 쉽게 버려지는 세태를 짚어낸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버려지는 과정에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윤리일 것이다. 폐기물의 무단투기는 옹호될 수 없는 윤리적 무책임이다. 시 <고려장>은 ‘달빛도 외면’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통해 윤리에 무감각해진 일상을 조명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사를 들여다보는 찰스 길리스피의 다음 발언은 음미해 볼 만하다.
과학의 영향은 단지 생활에 안락을 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공 생활이나 개인 생활에서, 과학이 윤리를 수립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1)
시 <고려장>은 파렴치한 인간의 행태를 비꼬며 과학의 발달에 반비례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조준한다.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안락함과 편리의 증진만큼 윤리적 각성 또한 발맞추어 나아가야한다는 성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성찰이 무겁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쇠퇴한 문물을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 설정하고 구성진 목소리로 극화하여 재치있는 시적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일보하는 과학기술에 걸맞게 윤리적 깊이를 확보해 가야한다는 과제를 박용숙 시는 전하고 있다.
인사 앞둔 십이월의 술 항아리도
달큰하게 입맛 다시는 것인데
서열 흐릿한 나는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가는 목소리로
노랫말 시부렁거려 보는 것인데.
<동지 무렵> 부분
조직화되고 서열화된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오롯이 차지하기란 쉽지 않다. 존재 내면과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겪는 어긋남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시적 자아의 기대와 어긋나는 조직화된 경쟁사회의 체계는 자아에게 좌절감을 안긴다. 시는 세상에 관한 기대와 좌절을 견디는 내면의 절제를 섬세한 감각으로 형상화한다.
‘회전의자’의 주인이 되는 일은 사회적 성공을 의미할지 모르나 내면의 자아와 부합하는 일은 아니다. 설령 ‘회전의자’의 주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자아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노랫말 시부렁’거리는 태도는 ‘회전의자’와는 구별되는 주체의 공간을 희구하는 진솔한 내면을 드러낸다. 사회적 좌절을 견디고 평정한 자아의 내면을 다지기 위한 ‘노랫말’은 위무의 언어일 뿐 아니라 우월함을 뽐내거나 과장하는 세상에 대응하는 자아의 정직한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내게도 빵빵하던 시절 있었던가
어언 삼십 년, 바람 빠질 때도 되었지
이제는 먼 미래 빌려 와
중도하차,
어디에 짐 풀어놓을지
들썩이는 바람이
힘 빠진 중년 재단하고 있네
<명예퇴직> 부분
‘털썩 주저 앉히는 세상’을 좌절로 규정하지 않는 시의 자아는 ‘어디에’ ‘먼 미래’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지 기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체를 무기력한 존재로 함부로 규정하는 세상을 향한 의미 있는 도전을 꿈꾼다. ‘하수종말처리장’의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 도전은 ‘바람’ 빠진 ’공’으로 비유된 자아의 내면을 일으켜 세우고 ‘들썩이는 바람’의 동력으로 이끌어간다. ‘바람’은 부정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내면의 정체성을 다시금 점검하고 성찰하려는 삶의 과업을 구체화하는 동력이 된다.
박용숙의 시는 좌절을 견디는 위무의 목소리에서 그치지 않고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결연함을 지닌다. 세속적 명예를 갈구하기보다 한층 심오한 생의 근거를 찾아 주체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스스로의 자리를 재발견하고 다시금 창조하려는 의지가 내면 깊은 곳에서 발화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지의 표현을 다음의 시 <지각은 없고 출석은 있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직도 배워야 할 세상 공부 그리 많으신지
마지막 수업 열 시 종을 쳐도
애써 시계 외면하신다
입동 지난 십일월,
달도 추워 두꺼운 구름 외투 두른
집으로 가는 길
덩그마니 불 꺼진 방은 아직 저만치인데
가방 든 양손에 얄궂은 찬바람이 먼저 와 안긴다
복잡한 세상, 무거워진 머리
자꾸 땅 쪽으로 향해가지만
늦은 걸음이면 어떠리
내년 봄에도, 내후년 봄에도.
<지각은 없고 출석은 있어> 부분
‘도서관’이라는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시적 자아는 나이를 한계로 삼아 주저앉히려는 일상에서 스스로를 구출하여 자신의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된다. ‘도서관’이 의미를 더하는 것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배우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존재의 성실함 때문이다. 성실한 열정을 기반으로 하여 ‘한 평도 안되는’ 공간의 협소함과 ‘식어버린 도시락’이 함축하는 일상의 누추함으로부터 쇄신의 길을 열어간다.
보르헤스가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을 우주로 상징화하였다면, 박용숙의 시 <지각은 없고 출석은 있어>는 도서관의 현재와 미래적 가치를 현실적 공간으로 구체화하여 제시한다. ‘팔순도 넘어’ 온몸으로 열정을 밀고 가는 ‘어르신’은 시적 자아가 이상화한 자아의 형상이다. ‘어르신’의 길을 통해 주체의 도약과 성장을 이끌어가는 가볍지 않은 동력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겨울’로 비유된 노년의 시간이 주체의 도약을 막아서지 못한다. ‘불 꺼진 방’, ‘얄궂은 바람’은 자아를 주저앉히려는 세상의 난관들이다. 무엇보다 물리적 시간 또한 주체의 의지를 압박한다. 그러나 ‘애써 시계를 외면’하는 자세를 통해 물리적 시간의 제한과 신체적 시간의 한계를 넘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설령 실패하거나 복잡한 세상에 엉키어 들어가더라도 그 자세 자체로 이미 도약과 변화는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인간이 정한 시간의 한계를 뚫고 번져나갈 것이다. ‘내년 봄’과 ‘내후년 봄’을 관통하는 시간 속으로 확대되고 ‘봄’의 활력으로 피어오를 것이다. 이 시가 매혹적인 것은 일상이 옭아맨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의 시간을 재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시간과는 구분된 ‘도서관’의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이 시를 관통하고 있다.
그 시간과 열정은 자아를 변화시키고 주변을 물들이고 세상으로 번져간다. 관찰자의 관점으로 세세하게 묘사된 행로는 시적 자아가 미리 내다본 미래의 초상화이다. 시에 담긴 선명한 감각과 시간의 궤적은 일상의 한계와 누추함을 딛는 나아가려는 의지를 구체화하여 드러내 준다. 이토록 생생한 ‘도서관’에서 연마해온 지성이야말로 인류를 현재까지 견인해온 소중한 자산이 아닌가.
박용숙의 시는 자아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그 호흡을 숨가쁘게 만드는 흐릿하고 번잡한 일상에서 태동한다. 시인은 작은 감각의 조각이라도 좌시하지 않는다. 무디어지지 않는 지각이야말로 일상의 소모를 견딜 수 있는 성찰의 원천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일상의 지각을 사고의 깊이로 발효시켜 잡다한 세속에서 자아를 견딜 수 있도록 해주는 무기로 벼려낸다. 그 시간을 거쳐 시적 자아는 삶에 내재된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일상의 마모되어가는 시간이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 박용숙의 시를 가까이 읽기를 권하고 싶다. 소모의 시간에서 묵묵하게 성찰하는 존재의 뒷모습을 살필 수 있으니 말이다.
1) 찰스 길리스피 지음, 이필렬 옮김, 『객관성의 칼날』, 새물결, 2005, 190면 참조.
유지현 약력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및 고려대 대학원 문학박사
현재 한경국립대학교 인문융합공공인재학부 교수
199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2019년 서정시학 시 부문 신인상 당선
저서
평론집 <현대시의 공간 상상력과 실존의 언어>
평론집 <언어의 형상과 성찰적 상상력>
편저 <만해 한용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