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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9:57-64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 칼빈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로 아는 생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1. 본문 57절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입니다.
1)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란 말이 주격이 될 수도 있고 호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은 이 중 어느 것과도 다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로 번역하고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나의 분깃이 되시는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로 작정하였나이다’ 라고 번역합니다.
세 번째 번역은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라고 말하거나 결심하리이다’입니다.
네 번째 번역은 ‘여호와여! 나는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나의 분깃이라고 말하였나이다.’ 또는 ‘결심하였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번역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다음은 매우 적절한 해석입니다.
즉 우리의 분깃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생기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몇몇 구절에서 하나님만이 성도들에게 충만하고 완벽한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에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업이 되신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특별한 소유물로 택해주신 것을 볼 때 우리 편에서는 오직 그 분에게서만 만족을 누리는 것이 가장 옳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집중할 것이요, 모든 육체의 욕망을 떨쳐 버리고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기쁨과 확고한 결의가 한결 같이 계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는 이미 이 해석이 본문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말한 마지막 네 번째 번역은 더욱 간명합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분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있음을 깊이 깨달았나이다’
이 번역은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 는 말씀과도 잘 어울립니다.
시편 119 편
다윗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사람들의 야망을 사로잡는 공상적인 선을 대조시킵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 것을 갈망하고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여 그러한 것을 내 분깃으로 삼지 아니하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탁하겠나이다.’
2. 본문 58절은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아직도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 없는 믿음은 활력과 생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히브리 사람들 가운데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모습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자기 앞에 나오게 하실 때에 매우 익숙하게 사용하시는 방법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다윗의 기도 결과, 즉 그가 바라는 것의 모든 것은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확실한 소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게으른데서 일어나 기도로서 우리의 믿음을 실천합시다.
둘째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값없는 은혜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환난을 보시고 구원해 주시도록 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각별히 구해야 할 것은 다른 모든 복의 근원이 되는 긍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의미 없는 기도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약속으로 우리에게 기꺼이 빚진 자가 되어 주시고 있음을 배우도록 합시다.
3. 본문 59절은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선지자가 자기의 생활 방법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로 율법의 교훈을 따르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하기를 ‘사람들이 곁길로 나아가고 충동과 맞서다가 그릇된 미혹을 받게 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자기 생각을 기뻐하여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 자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성향이 자신을 이끌고 나가면 그 어느 곳에나 가장 큰 관심과 자기의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시편 119 편
그러나 모두가 다 자기들이 추구해야 할 대상을 선정하는데 눈이 가려져 있어 눈이 닫쳐진 사람처럼 분별이 없이 분주하게 쫓아다니거나 불가피하게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의 깊게 자기 행위를 생각해 보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우리에게 거룩한 생활의 시작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거나 최소한 자기의 행위가 무엇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폭넓게 묵상하는데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사람이 선한 열심을 가지고 자기 생활의 길이 잘 열리기를 바랄 때에는 주님께서 지정해 주신 교훈을 따르는 길 외에 더 좋은 방도가 없다는 점입니다.
얼빠진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택해 주신 것을 자기 생활의 안내자로 일반적으로 그리고 만장일치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4. 본문 60절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입니다.
과거 시제로 표현되었지만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사실을 신속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근면과 신속한 일의 처리는 선지자의 열심을 말해 줍니다.
다음에 선지자가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히브리어의 관용법을 따른 것으로 내가 “신속히 하고” 라고 한 말씀의 사상을 강력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말씀하시고 잠잠치 마소서’라는 말을 거침없이, 거리낌 없이, 모르는체하지 않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처럼 ‘신속하고 지체치 아니한다’는 말을 의심이나 지연됨이 없이 신속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나태함과 사단이 우리의 길에 놓아 두기를 그치지 않는 올무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말씀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의를 행해 보고자 원하는 사람은 바울 사도가 말씀한 대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않음’(롬7:15, 19)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외면적인 장애물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신속하게 지키기란 심히 어렵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은 선지자는 여기서 자기 생애의 대부분을 지체한 자와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주저하고 우물쭈물할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빈둥거리는 자들, 또 자기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지 않는 자들을 비교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섬기기를 바울보다 더 신속하게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의 전부는 자기가 길에서 모든 장애물들로 에워쌈을 당하고 있는 동안에 신속하게 길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자신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나태함을 가볍게 여긴 채 세상 사람들이 놓아둔 장애물이나 우리 자신의 연약에서 놓이기만을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요, 무익한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5. 본문 61절은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입니다.
חבלי (헤블레이)란 말을 ‘슬픔들’이라고 번역하는 자들은 별로 자연스럽지 못한 해석을 하여 자신들도 어리둥절할 뿐 아니라 문맥까지도 왜곡시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어도” 나 ‘ 악인의 무리가 나를 탈취했을지라도’ 입니다.
우리가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간에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사단이 극심한 유혹으로 자기 영혼의 신앙의 절조를 공격해 왔을 때 조금도 요동함이 없는 한결같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실행하기를 계속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줄” 이란 말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해됩니다.
첫째는 악인들이 선지자를 자기들의 사회에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해 놓은 기만적인 쾌락이나, 둘째로 악인들이 선지자를 파멸시키려고 사용했던 부정한 수단을 가리킵니다.
처음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다윗은 악인들이 그를 자기들의 그물에 빠뜨리려 할 때도 계속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자신의 진귀한 미덕을 말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עוד(이벳) 동사는 ‘탈취하다, 빼앗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다음의 해석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선지자는 악인들의 군대에 공격을 당하여 그들이 바라는 것을 탈취, 또는 강탈당한 이후에도 결코 자신의 위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선지자가 담대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흔치 않은 위험이나 그릇된 일을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는 곧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유익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질 때에는 우리가 법적으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이러한 충동을 받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기억을 쉽게 잊어버리고 내다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를 우리가 악인들에게 몰려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일지라도 계속해서 그침없이 율법을 사랑하고 의를 실천하는 것이 순전한 경건의 증거라고 합니다.
시편 119 편
6. 본문 62절은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입니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온 마음을 다하여 인정하여 받아들였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에게 이 큰 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감사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율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실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사실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입을 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자리가 가장 합리적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약간씩 변하거나 곁길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입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자기의 뜻을 따라 처리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감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율법과 모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된 진리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와 율법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는 이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적지 않은 유익을 얻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밤중에 일어나” 이렇게 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기 소망의 간절함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 자지 않고 연구해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필히 영혼의 간절함을 내포합니다.
선지자는 주의 율법에 성실했던 자신을 증거하되 허례와 과장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자기를 보아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선지자는 남 모르게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최고로 찬송하기 때문입니다.
7. 본문 63절은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입니다.
선지자는 단순히 형제간의 사랑이나 참 성도들간의 조화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어떠한 사람과 어느 때에 만나든지 간에 그의 손에 우정의 증표를 주었으며 자기가 하나님의 종 가운데 한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을 도와 주는 자 중에 하나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합(和合)은 분명코 모든 성도들에게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피차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이 거룩한 연합으로 성도들이 피차 하나님을 섬기며 참 거룩을 행하는 자들과 세상 어느 곳에나 침투해 있는 악인들의 단체의 묵시적인 비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무리를 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뒤엎으려고 피차에 협조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시편 119 편
그러므로 더욱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한 연합체를 지속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성도들에게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고 둘째로 율법을 지키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모든 의의 근원이며,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8. 본문 64절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온 세상에 반영되어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자를 행사하사 자기를 하늘의 지혜의 보배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라고 구합니다.
이 기도는 매우 강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는 가장 간절하게 표현입니다.
선지자는 다른 곳에서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증거로 세상 어느 곳에서고 일반적으로 다 볼 수 있는 것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사람들에게만 임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짐승들에게도 임하였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무엇이라 하는가?
선지자는 온 피조물에게 미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에게는 한 가지 것, 즉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선지자가 깨달음의 은사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귀한 보배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판단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두드러진 증표라고 할진대, 우리에게 이것이 부족한 것은 우리의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부터 멀어져 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다음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즉 덕망있는 교회의 가르치는 자들이 최고의 열심을 가지고 더욱더 하나님의 법도에 익숙해지기를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피상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열심을 다해 더 많은 것을 깨닫고자 하지 않을 때에는 가장 수치스러운 나태함에 빠져 있는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지자는 여기서 겉으로 보이는 가르침을 말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인 마음의 내적인 조명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이 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조명을 받기 전에는 그것이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초자연적 감화를 통해 효과있게 깨우침 받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시편 119 편
시119:65-72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본문은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한 줄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1. 본문 65절은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입니다.
혹자들은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그것을 좋게 받아들여 그것이 마침내는 자기 복이 될 것을 말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언약을 말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은혜를 베푸심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선지자가 찬송한 것으로 확신합니다.
선지자는 ‘주님은 신실하사 주의 종들에게 헛된 말로 속이지 않으심을 내가 실제로 경험했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모든 복이 우리에게 실상은 그 근본 원천은 아니지만 수도 파이프와 같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해 주시도록 하는 유일한 근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먼저 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손에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본문 66절은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입니다
다윗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심을 알았다고 고백한 다음 이 구절에서는 64절에 내포된 것과 같은 간구, 즉 자기 판단의 정당성이 성숙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용어에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64절에서는 “주의 율례” 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명철과 지식” 이라고 합니다.
동사 טעם(타암)은 ‘맛보다’ 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이 동사에서 온 명사는 마땅히 ‘맛’ 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마음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윗은 건전한 분별력과 판단력을 수반한 지식이 자기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인자하심과 명철’ 이라고 따로 데어 번역하는 사람들은 전체 문맥을 망쳐 놓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충분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반절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라고 말합니다.
다윗이야말로 율법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자신을 배우기를 잘 하는 자요 순종 잘하는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순종하게 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시편 119 편
그러므로 다윗은 또 다른 은혜가 자기에게 임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구한 것은 건전한 명철과 선한 지식의 은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즉 올바른 감정과 선한 지식은 생활을 적절히 다스리는데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열심에서 나온 율법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은 그에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정당한 이유에서 분별없이 곁길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의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신 이후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 이것으로 우리의 열심을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합시다.
3. 본문 67-68절은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입니다.
1) ענה (아나)라는 동사는 때때로 ‘말하다, 입증하다’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기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주의 계명을 묵상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번역은 지나친 억지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술 더 떠 이 구절이 의미한 것은 선지자가 그릇 행했을 때에 하나님께 아무 답변할 것이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애매한 점이 없으므로 이런 잘못된 견해에 대해 좀 더 말해야겠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서, 온 인류는 똑같이 이 일을 행함에 있어 방탕하거나 반역하는 자들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채찍으로 굴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 자신 맡기기를 끝까지 거절하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없습니다.
또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항상 오만함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까지도 강력한 수단에 의해 자기의 그릇됨을 바로잡으려 했다면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권징이 더욱 필요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순종의 첫 단계는 육체를 죽이는 것인데,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이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환난을 주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을 기억하게 해 주신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의 육체란 대대로 제어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속 채찍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심이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시편 119 편
하나님께서 채찍을 사용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가난으로, 때로는 수치로, 때로는 질병으로, 때로는 가정의 환난으로,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우리를 겸손케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하는 죄악의 다양한 종류에 따라 그때 그때 적절한 해결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제는 이 고백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유익한지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예레미야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멍에에 익숙치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렘31:18) 라고 했습니다.
선지자가 말해 주고 있는 반역의 모습은 모든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채찍이 우리의 고난을 약화시켜 주거나 경감시키지 못하면 실로 매우 감사할 줄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려 대적하는 한 우리는 가장 심각한 비참한 상태에 놓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시는 유일한 방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채찍으로 가르치시는 것뿐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직접 자신을 예로들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것을 기뻐하시며 우리의 괴팍함을 녹이시기 위해 애쓰고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으므로 우리는 최소한 겸손하게 되기를 노력하여 모든 완악함을 버리고 기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어 주시는 멍에를 메야 한다고 합니다.
2) 68절 앞에 나오는 여덟 구절의 내용과 거의 같으므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시되, 재물이나 명예나 쾌락을 많이 누리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고 율법에 대한 지식에서 더 자라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에게 인자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때에 자기들을 경제적으로 풍성케 하여 자기들의 육체가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그 소망의 내용들이 채워지기를 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는 이 한가지만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한 만족을 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4. 본문 69-70절은 “(69)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70)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자기가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악인들이 악의에 찬 해석을 가하고 이 계교를 사용하여 자기가 가는 길에서 돌이켜 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의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 편
죄가 없음에도 비방과 누명을 당하여 악한 말로 공격을 당할 뿐 아니라 거짓된 구실 같은 것으로 악인들에게서 세상의 미움을 사는 경우에는 극심한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통 때에는 선한 사람이요 의롭게 사는 사람이지만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경우에는 실망하거나 심한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선지자가 보여주는 예를 더욱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비방에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소문이 우리의 피조물들 앞에서 여지없이 떨어지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건함이 사람들의 비방으로 무시되어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판단을 의존하는 한, 항상 동요하는 상태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름다운 영광을 얻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계속하면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하늘로 돌려 사람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퍼뜨리고 있는 모든 악한 비방들을 눈여겨 보지 않는 것을 배우도록 합시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이 받아야 할 보상을 즐기는 것을 내버려 두도록 합시다.
우리가 받을 면류관은 하늘에 있고 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계속해서 우리를 방해하는 올무를 놓아 두고 있는 사단의 계교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동사 טפל (타팔)은 경우에 따라 ‘서로 연합하다’라는 의미를 갖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맺다’ 또는 울타리를 ‘치다’는 의미를 아름답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의 원수들이 야비한 비방을 퍼부었을 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기 위해 죄를 범하되 심히 교활하게 범하였고 진리의 색채를 가장 암담하게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이러한 함정으로 선지자를 얽어매려 했어도 선지자는 그의 타협할 줄 모르는 한결같음으로 이것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마음을 엄격히 억제해 계속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지켜 나갔습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교만한 자” 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말한 사람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명예와 재산에 자신을 가진 이름 있는 자들이 더 대담하게 선지자를 대적해 일어났다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선지자의 말은 분명히 그들이 마치 죽은 개를 밟듯이 교만에 가득 찬 멸시로 자기를 발로 짓밟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이 해석은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라는 말씀과 일치합니다.
시편 119 편
이 말씀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죄악이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악인들이 자기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종들을 대적하여 오만한 마음을 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어리석음이 그들의 마음을 뒤엎음으로 말미암아 우매하게 되어 자기의 오만함을 광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기이하고도 가장 찬송을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자기의 모든 기쁨을 찾았다고 하는 선지자의 찬송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마치 자기가 먹은 음식처럼 즉 자기에게 가장 생기를 회복시켜 준 음식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의 마음이 이 율법에 매어 있지 않고 모든 더러운 쾌락을 씻어 버리지 못했더라면 선지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 본문 71-72절은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여기서 우리가 앞에서 생각해 보았던 내용, 즉 하나님의 채찍으로 자기가 굴복되어 점점 마음을 돌이키고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께 순종케 된 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으로 자기도 온 인류가 감염되어 있는 완악한 교만에서 제외된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제외된 자였다고 한다면, 선지자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낮아짐에 있었다고 말한 것이 단지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본래 강퍅함을 망치로 깨뜨려 부드럽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 중 아무도 기쁨으로 하나님께 자기의 몸을 숙여 순종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르게 해주심에서 나오는 열매를 계속해서 맛보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서 심히 패역하고 변덕스러운 우리 자신을 제어시킬 수 있습니다.
2) 72절 말씀도 역시 해석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 말씀은 이 시에 매우 빈번하게 나오는 문제를 말하고 스스로 충분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부귀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인생들 대부분이 심히 통탄스럽게도 집착하고 있는 무분별한 소망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택했다고 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는 자기 모든 기업보다도 하나님의 법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 편
시119:73-80 주의 손이 나를
본문은 시편 기자이며 선지자의 여러 가지 소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73절은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생각으로 자기가 간구하고 있는 은혜를 받고 자 하는 기대를 크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등 동물 역시 소유하고 있는 생명력을 주셨을 뿐 아니라 여기에 덧붙여 이해력과 이성까지도 주셨으므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 하나님께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하나님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단순하게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여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수하기를 구합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건전한 이해력이 모두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근원을 구하지 않고는 무엇이 옳은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기 전에는 그 교훈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볼 때에 우리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이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명 배우기를 기도할 때마다 판단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온 인류가 소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성령의 조명뿐입니다.
2. 본문 74절은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입니다.
이 구절이 73편과 연결되어 있거나 혹은 73편이 말하고 있는 복 이외의 또 다른 하나님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한가지 특별한 복만 말하든지 아니면 일반적인 복들을 말하든지 간에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높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하고 모든 순전한 성도들도 똑같이 그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이 기쁨이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 편
즉 두드러진 방법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많은 은혜를 누림으로서 그의 소망이 충분한 보상을 받은 사실에서도 기쁨은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의 종들에게 똑같이 자신을 신뢰하도록 불러 주시고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자기 은혜의 표적을 보여주심으로서 자기는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것과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실망시키지나 않을까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입증하십니다.
3. 본문 75절은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입니다.
이 시에서 “판단” 이라는 말을 우리는 율법의 교훈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곧 이어서 자기는 정당한 채찍을 맞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선지자는 이 말을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가하는 형벌을 대신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반절의 צדק (체닥), 즉 “판단” 과 하반절의 אמונה (엠무나), 즉 “성실” 이라는 말은 여기서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상반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심판을 행사하시어 악인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아무도 하나님이 잔인하다거나 가혹하다는 불평을 하지 못하게 하심을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공평을 그들에게 행하시어서 우리를 권면하시되 이것을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다음으로 선지자는 자기 자신으로 이에 대한 실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위선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징계하실 때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신다고 찬송합니다.
또 자기들이 직접 관련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지엄하심에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이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과오를 더 신랄하고 엄격하게 비평하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안다’는 자신을 엄격하고 진지하게 살펴보았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선지자가 자신의 죄를 잘 저울질해 보지 않았더라면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의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판단이란 말을 보통 의미로 본다면 본문의 의미는 ‘여호와여 나는 주의 법이 거룩하고 정확하며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신 것만큼 엄하심을 아오니 나로 계속해서 이 진리를 붙들게 하소서’ 가 될 것입니다.
이는 내가 환난 중에서도 주의 말씀의 내용과 부합하는 의를 분별함이니이다.
시편 119 편
4. 본문 76절은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마땅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깨닫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위로를 통해서 자기의 괴로움이 덜어지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의 괴로움을 없애주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그 인자하심을 간구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화목케 된 것을 느끼기 전에는 그들에게서 괴로움이 제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신 말씀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겪기 쉬운 모든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적지않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지금 마치 행위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가 선포되는 것처럼 ‘실제적인’ 인자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한 선지자는 이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교통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에서 나오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소망은 하나님께서 조만간 우리의 구원자로 나타나지 않을 때는 실망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기에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선지자의 기도는 ‘주여 주님께서는 나를 신속히 구원해 주시기로 은혜로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성취하사 주의 말씀이 선하게 되게 하소서’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그의 전 앞에 나아가는 것은 철면피한 행위일 뿐입니다.
선지자는 “주의 종에게”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오직 자기에게만 내려 달라고 하여 자기에게만 특별한 약속이 주어진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온 교회에 약속하신 것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말씀해 주신 자 중에 한 사람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고 믿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신뢰로서 하나님을 부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5. 본문 77절은 “주의 긍휼이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앞 절에서 구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것을 반복해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조금 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에게 임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자기의 괴로움이 제거될 수도 없고 기쁨이 회복될 수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는 세상 사람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노를 발하신다 해도 자기의 쾌락만 좇기를 그치지 않는 자들과 자신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화목하신 것을 알기 전에는 산 것 같으나 죽은 자였음을 명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실 때에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자기가 얼마 동안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긍휼의 증거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그 증거를 빼앗기지 않았었다면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라고 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구한 것을 얻었음을 밝히기 위해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방도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요 복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두고 하나님과 갈라선 자들은 비참한 자요, 정죄를 받아야 할 자임을 아는 자 외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진실되게 아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선지자가 율법에서 배운 진리입니다.
6. 본문 78절은 “교만한 자가 무고히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입니다.
우리는 이미 히브리어에서 미래 시제는 종종 여기에서처럼 가정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수치를 당할 것이라’ 대신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입니다.
교만한 자가 나를 해롭게 이유없이 괴롭혔기에 주께서 저희에게 보응해 주실 것이라. 그러나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기도로 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해석을 떠나 이 말씀은 특별히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선지자가 왜 하나님께 ‘자기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원한으로 악하게 선지자를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짓으로’ 로 번역한 שקר (셰케르) 를 어떤 자들은 ‘이유 없이’ 로 번역합니다.
시편 119 편
그러나 이 번역은 선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에 절반밖에 맞추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악인들이 다윗을 멸하려고 고안해 낸 계교와 술책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악인들에게 그릇되어 핍박을 당할 때마다 직접 하나님께 보호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무례함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들이 제아무리 세력을 가중시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을 꺾고 낮추셔서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꾸러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승리를 얻기 전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 더 우스운 것도 없음을 자기들이 예가 되어 가르쳐 주게 될 것입니다.
하반절의 동사 אשיח (아시아흐)는 ‘내가 묵상할 것이다’ 로 뿐 아니라 ‘내가 말할 것이다’ 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선지자가 승리를 얻었을 때에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선포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말하는 것’은 율법을 선포한다는 말과 의미가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켜주시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안전하게 구원해 주시며,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학대를 얼마나 올바로 갚아 주시는지를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7. 본문 79절은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 입니다.
앞 절과 연결되어 있는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자기가 받은 구원이 경건한 자 모두에게 똑같은 교훈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우리 처지는 얼마동안 악인들의 오만함을 더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의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으나 이제는 용기를 얻어 저희가 이 즐거운 광경으로 저희 눈을 돌이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들어 선지자는 순전하고 거룩한 성품을 지닌 참된 성도들을 분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합시다.
선지자는 상반절에서 ‘하나님을 경외 또는 두려워하는 자’ 를 말하고 곧 이어서 이들에게 ‘주의 증거를 안다’는 말을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상 숭배자들도 일종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요,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경외심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목적 없이 자기들의 생각을 쫓아다니기에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의 경배에는 관심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그러므로 참된 종교와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그 근거를 믿음에 두고 있기에 하나님과 관계된 믿음, 곧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운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8. 본문 80절은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조금 전에 건전한 지혜 갖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기에 지금은 같은 방법으로 마음의 신실함을 구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지식과 애정은 사람의 영혼의 두 가지 근본 능력인데, 선지자는 자기의 지식이 조명을 받기를 구함과 동시에 그의 마음도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함으로서 이 두 가지가 모두 부패하고 그릇되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황주의자들이 자유 의지에 대해서 떠벌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명백하게 논박해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자기의 의지가 연약하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할 뿐 아니라 조금도 주저함없이 마음의 정직함은 성령의 선물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배울 점은 율법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겉으로만 하나님의 법에 따라 생활을 해 나아가면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성실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경배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처럼 תמים(타밈)이란 단어는 ‘건전한’으로 번역되기에 ‘건전한 마음’은 이중적인 마음이나 속이는 마음과 반대가 됩니다.
이 말은 선지자가 숨김이 없는 사람과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라야 진실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지자가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면서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있는 모든 교만한 자들은 필히 이러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모든 위선자들도 행렬을 하는 동안에는 화려한 광채를 나타냅니다.
요컨대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주관하사 우리로 의무를 수행하도록 함으로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율례에 바로 서지 않으면 수치가 얼마동안 감추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게 될 것이지만 마침내 수치와 치욕에 떨어짐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