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거제도 삼장사 화상(巨濟三壯士畫像)과 활약상. 2018년 3월 작성
거제(巨濟) 삼장사(三將士)란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거제의장(巨濟義將) '신응수(辛應壽)', '윤영상(尹榮祥)', '김희진(金希璡)'를 일컫는 말이다. 아래 시는 안덕문(安德文)선생께서 1700년대 말(末)에 거제도를 유람할 때 우연히 거제 삼장사의 화상(畫像)을 보고 느낀 점을 표현하신 글이다. 그림 속에는 삼장사가 전쟁 중에 화살과 돌을 던지는 모습과 군졸을 지휘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림 속 가장자리에 멀리 바다가 보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현성 전투를 표현한 것 같다. 안덕문 선생은 그림을 보면서, 싸우고 있는 두 장사의 모습을 중국 역사에서 순절한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을 비교하였고, 지휘하고 있는 다른 한 장사의 모습은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라는 뛰어난 재상과 흡사하다 한다.
1) 거제 3장사 화상(巨濟三壯士畫像). / 안덕문(安德文 1747∼1811) 의암집(宜庵集)
三爲壯士一元戎 세 명의 장사들이 한 군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生死堅盟矢石中 생사를 함께하자 굳게 맹세하고 화살(신응수)을 쏘고 돌팔매(김희진)를 하며,
巡遠心無先後異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거리낌 없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이하네.
蕭曹計有指揮同 소조가 헤아리듯 하며, 지휘(指揮)하는 모습(윤영상)이 전하는 바와 같구나.
海濱逖矣均天化 바닷가는 멀리 있다. 하늘이 널리 감동받은 듯,
圖上昭然特地忠 그림 위, 뛰어난 위인처럼 밝게 빛난다.
帶礪山河功可忘 국토(나라)에 충성하고 하산대려(河山帶礪) 맹세로 남쪽 변방을 지킨 인물!
南藩人物障吾東 그 공적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우리의 동쪽 경계를 지켜내었다.
[주1] 순원(巡遠) :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名臣)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수양성(睢陽城)을 굳게 지키다 순국하였다.
[주2] 소조(蕭曹) :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일컫는 말. 진(秦)나라 말, 소하(蕭何)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을 도와 반진(反秦)의 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유방을 도와 진(秦)을 무너뜨리고 항우(項羽)의 초(楚)와 천하를 다투었던 5년 동안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소하가 죽자 그의 천거로 조참(曹參)이 승상에 올랐다. 그는 소하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소하가 만들어 놓은 틀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면서 오랜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심을 치유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 결과 한나라는 백성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급속도로 안정되어 갔고 이른 바 문경지치(文景之治)에 이어 무제(武帝)라는 걸출한 제왕을 탄생시킨다.
[주3] 대려산하(帶礪山河) : 하산대려(河山帶礪), 황하(黃河)가 허리띠같이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만큼 작아진다 할지라도 변(變)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盟誓)의 말.
2) 거제(巨濟)삼장사(三將士)의 임진란 활약상
임진란(壬辰亂) 당시, 거제(巨濟) 고을에 삼장사(三壯士)가 있었는데 한 장사는 칠원 윤씨 윤영상(漆原 尹榮詳)이며 자는 국서(國瑞)요 호는 둔암(遯巖)이며 많은 지혜가 있었다. 또 한 장사는 영산 신씨 신응수(靈山 辛應壽)로, 호는 와은(瓦隱)이고 김희진장군이 처남이다. 세상에서 칭하기를 활을 잘 쏜다고 했다. 출생지는 거제면 명진리, 묘는 거제면 법동리 바닷가 근처에 있었다. 둔덕 상둔에 계묘가 있다. 마지막 장사는 김희진(金希璡), 김해김씨(金海金氏)로서 휘(諱)는 희진(希璡), 명묘(明廟) 임술(壬戌)생이며, 호는 구수암(龜睡菴)이고 담력과 지혜가 뛰어 났다고 한다.
임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대승하니, 5월9일 거제현령 김준민이 진주성 방어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면서 성주(城主)에 윤승보(尹承輔), 현승엔 김후석(金厚錫), 주장(主將)엔 신응수(辛應壽)를 지명하고, 젊은 3명의 의형제인 김희진(金希璡)을 남문장에 윤영상(尹榮祥)을 북문장에 지명하고 떠났다. 이때 제국(諸國)과 반중경(潘仲慶)은 거제에 남아 싸우는 것보다 이순신 막하로 가서 우국의 대의를 위해 상책이라고 떠나가고 윤,김,신 3장사가 끝까지 고현성을 수호하며 살아서는 한마음이요(生則同心) 죽음은 한날이다(死則一日)이라고 맹세했으나, 5월7일 옥포해전에서 패한 후 선박을 잃은 왜놈들이 몰려와, 3일동안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5월12일 고현성이 함락 되었고, 성주(城主) 윤승보(尹承輔)는 전사한다. 이 후 거제는 일부 서부지역과 부속도서, 바다를 제외하고 대부분 적의 소굴이 된다.
그리고 윤영상은 남여산(南呂山 연초면 다공리), 김희진은 계룡산, 신응수는 국사봉 굴속에 숨어서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왜병을 습격하였다. 하청(河淸)장터에서 분탕질하던 왜군을 습격하여 섬멸하였으니 이를 설욕전이라 전하며 이 당시 넘던 고개가 연초면 덕치(德峙)고개라 전한다. 삼장사 서거 후 연초면 다공리에 삼충사(三忠祠)를 건립하고 봉안향사 하였다한다. 삼장사 모두 행어모 장군 훈련원 정 첨정(行禦侮將軍 訓練院 正僉正) 선무원종 일등공신 녹권을 받았으며 삼장사가 돌아가신 후 당상관의 직위를 받았다.
3) 거제 제씨 오비촌 죽지사(烏飛村竹枝詞)
오죽재(烏竹齋)는 예전,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에 위치했었다. 임진왜란 선무원공신 칠원 제(諸)씨 형제들의 후손인 제경직(諸景直)이 장수지소(藏修之所, 학문을 통한 수양한 곳)하던 곳이다. 이 마을 이름이 오비촌(烏飛村)인데 마침 대숲 속에 거주하고 있는 푸른 대숲 집을 '오죽재(烏竹齋)'라 호칭하니 의아해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후기, 진사 소금산인(小琴散人) 이용근(李容根)의 글에 따르면, 어느 때 남으로 바다를 건너 기성(거제) 오비촌(연초면)에 왔더니 산은 빼어나게 아름답고, 물은 한결 맑아 고운 것이 내 마음에 흡족했다. 더구나 사람들이 모두 순하고 마음에 맞아 더욱 기뻤다. 어느 날 오비촌에 거주하는 제경직(諸景直)이, 소매 속에서 종이 조각을 끄집어내어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길, "내 일찍이 내가 사는 이 좁고 조그마한 집을 이름하여 '오죽재'라하고, 한 문인의 글을 빌려 자(字)로 하였으니, 자네 또한 여기에서 살지 않겠는가?" 하며 묻기에, 내 이르기를 "이상하다?" "자네 집 이름 '오죽(검은 대나무)'이란 뜻이 어찌된 영문인가?“ 옛 중국 소상(潚湘)의 대를 반죽이라 하는 것과 기오(淇澳)의 대(竹)가 연죽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푸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직장(劉直長)이란 자는, 누워서 대를 보니 희게 보여 백죽(白竹)이라 하였고, 문여가(文與歌)는 먹으로써 대를 그려 묵죽(墨竹)이라 하였으며, 그 밖의 풍죽(風竹), 우죽(雨竹), 형죽(炯竹), 수죽(水竹)이란 말은 있으나, 모두 그 이름만 있고 그 실은 없는 것이다. 지금 자네 집을 둘러싼 몇 천개의 정정한 푸른 대(竹)를 검은 대나무 오죽(烏竹)이라 부르며, 그 편액에 써 놓고 있으니 내 묻기에 이른 것이다.
제경직(諸景直)이 이르기를, "자네 잘 못 보았노라. 내 집이 오비촌(烏飛村) 마을의 죽림(대 숲)속에 있기 때문에 '오죽재(烏竹齋)'라 하였을 뿐이네. 오오지(烏吾誌)에다 '오촌죽(烏村竹)'이라 하였으니 내 집을 이름 함에 그 이름과 실이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네." 내 웃으면서 "자네 말이 옳다." 하며, 내어놓은 술을 '오오(烏烏)'라 하며 즐거이 '죽지사(竹枝詞)를 노래했다.
다음 ‘오비촌죽지사’는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까마귀(烏)와 대나무(竹)를 소재로 사용해 ‘陽‘,‘虞’ 운자(韻字)를 써, 대숲의 정경과 신묘한 까마귀(金烏)가 날아드는 바닷가 마을을 고상하게 읊었다.
<오비촌 죽지사[烏飛村竹枝詞]> 이용근(李容根) ‘陽‘ 韻字
岐東秋事慾蒼茫 기성(거제) 동쪽엔 가을추수가 창망하여
徒倚篁欄愛晩凉 대숲난간에 기대어 늦가을을 즐기누나.
任敎金烏飛入定 금 까마귀 들어와 선경(仙境)에 의탁하는데
海山幽夢落魚梁 바다 산, 고요한 꿈속 어량에 떨어지네.
속운(續韻) ‘虞’ 韻字
摩修楣顔愛及烏 얼굴을 문미에 문지르며 까마귀까지 사랑하니
主人幽事竹同孤 주인의 한가한 일에 대(竹)도 함께 외롭다네.
枝迎爽籟鏗鳴瑟 가지는 바람맞아 비파를 울리고
曄漏園輪活展圖 잎 사이에 햇빛 새어 그림을 그리누나.
不可此君無一日 대나무 없이 하루라도 아니 볼 수 없으니
能令韻士責千觚 시인들로 하여금 수많은 술잔을 비운다네.
明春我有重來約 내년 봄에 다시 올 기약하니
留待淸陰曲檻隅 대(竹)그늘 굽은 난간의 구석이 기다려진다.
◯ 위 ‘죽지사’ 내용에 등장하는 오비촌의 제경직(諸景直)은 칠원 제(諸)씨로서, 임진왜란 때 경남과 거제도에서 맹활약을 떨친 '거제 명가(名家)' 집안이다. 특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제조겸(諸祖謙)의 아들인, 제괵(諸漍), 제억(諸億), 제진(諸璡), 제말(諸沫) 형제와 제괵(諸漍)의 아들 제홍록(諸弘祿)은 거제 고현성 전투, 연초 다공전투, 진주성 방어는 물론 이순신 휘하에서 당포 노량 벽파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은 "어찌 이토록 제씨 집안에 충의가 많은고?"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경남의 칠원 제씨는 대부분 무관을 지냈으며, 제말(諸沫)의 6,7대손 제경욱(諸景彧, 추증(追贈) 통제사), 제안국(諸安國)은 조선 정조 순조 때 큰 공을 세운 무관이었다. 정조 16년 1792년 진주성에 '제씨쌍충비명(제말장군, 조카 제홍록)'의 비각이 건립되어 현재 지방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뒤 거제 후손들이 장목면 송진포리 후룡산 자좌에 장의하였고, 1793년 하청면 중리에 '경충사(景忠祠)'를 건립, 제씨 충신들을 매년 음력 10월 첫 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거창부 가조현에 따르면, "고려 원종12년(1272년)에서 조선 세종4년(1422년)까지 150년간 이곳에서 "기성 반씨(潘氏), 제씨(諸氏), 아주 신씨(申氏), 옥씨(玉氏)" 같은 성씨들이 거제도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았는데, 환도(還島)하지 않고 남아 산 사람도 있었으며 또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으로 함께 거제 본도(巨濟 本島)로 옮겨간 성씨들도 있었다."전하니, 제씨 등이 거제도로 최초 입도(入島)한 시기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