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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마대산과 예맥문화는 동양 최대의 석붕유적을 낳았다 다음은 개마대산과 예맥문화의 련관성을 조명한 글이다.이것은 개마(蓋馬)라는 뜻의 근원은 곰(熊)에서 왔다고 보고 주변에 산치되어있는 동양 최대의 석붕유적과 웅악(熊岳)을 연계시켜 연구한 글이다.이글은 이미 2007년에 발표된 글이지만 개마대산의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어 독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보강하여 올린다. 개마대산의 지맥인 웅악(熊岳)에는 범과 곰 형상의 바위가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여기서 멀지않은 곳에 개주 석붕산 유적이 있다 이 바위들은 필자(구산 장동균)가 최초로 발견하여 졸저 《고조선본토기》에 발표하였다.이로서 단군 신화설은 실화로 실증된 셈이다.사진중 곰산의 이름은 태평각(太平角).범산의 이름은 대서산(大西山)이다.개주시 토성향(蓋州市土城鄕) 개주 석붕산 고인돌유적 개주 석붕산 석붕 기원전 <3500년~ 2000년> 지금은 없어진 석붕 주변의 부대시설들 중에는 성모전(聖母殿)이 있었다.이는 웅녀(熊女)를 상징화 한것으로 추정된다.적봉유적의 여신묘와 유사한 시설로 추정된다.
예맥문화(濊貊文化)와 지석묘(支石墓).
개주시 석붕촌에는 고조선 묘제인 석붕산 고인돌 유적이 있다. 규모가 동양에서는 최대여서 천제를 올리던 장소로도 추정이 되는 곳이다. 왜 규모가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고인돌 유적이 개주의 석붕산에 있었을까. 소위 단군신화에서 웅녀설화로 등장하는 곰과 범의 상징인 곰바위와 범바위는 실재로 오늘날까지도 웅악성 주변에 실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곰보다 힘이 훨씬 강한 범은 인내력 시험에서 탈락하여 인간으로의 변신에 실패하였고, 곰은 21일을 쑥과 마늘로 버텨 환골탈퇴에 성공하여 조선족의 모계로 선택받게 된다는 설이다. 이때 시험을 받던 장소가 어두운 동굴이었다. 이후로 곰은 수개월을 먹지 않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 받은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굴 안에서 바깥 활동을 멈추고 동면해야만 가능한 것 이었다.
그렇게 하여 불사의 사신으로 등장하던 곰의 장끼(長伎)는 장기간의 동면 이었다. 살아있는 동물로서 수개월을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하며 긴 동면에서 깨어나면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동물은 몇 종류가 더 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신이 만만하던 인간들은 감히 흉내 낼수 없는 곰의 놀라운 환생 능력에 그들을 숭배하게 되었고, 인간이 죽었을때 곰처럼 환생하기 위해서 곰의 동면 생활을 모방 한것으로 추정 된다. 따라서 사람의 장묘 형태를 곰의 동굴같은 고인돌 무덤으로 만들고 마치 곰이 동면하는 모습으로 시신을 앉은 자세로 묻고 곰처럼 환생하기를 시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매장의 형태도 바뀌고 음양 오행설이 발전하면서 적석총과 피라밋형등의 고분의 형태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단군께서 제단을 쌓고 천제를 올리던 기록이다. 개주 석붕산 고인돌 유적이 천제단 이었다면 충분한 계연성이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는 개주의 남쪽으로 흐르는 속말수(마자수)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천제를 올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제왕 연대기》는 천제를 올리던 제단을 강화도 마니산이라고 주석 하였으나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개주의 남쪽으로 기록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단군기>에서 추출한 기록이다. 개주의 니하가 속말수요 패수였음을 알지 못할때 기록된 것이지만 고대 사서에서는 흔이 찾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진정한 압록강이 패수가 되는 이치를 몰랐던 시대에 기록된 이와같은 《규원사화》를 위서로 몰아 불신을 조장했던 지금까지의 행위들은 하루속히 시정이 되어야 할것이다. 이기록은 단군께서 도읍을 여신후 네번째 이동한것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 패수의 북쪽이란 개주가 된다. 또한 기록중에 천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고인돌 중에서 제일 크다는 석붕산 고인돌은 개주시 이대자농장의 석붕촌 남쪽에 있다. 훗날 고운사라는 절로 흡수 되었지만 여전히 제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와방점 고인돌 무덤: 청동기초 누가형 천제단 고인돌 민족중건 총본부 박종호박사는 이 고인돌을 고조선 초기 신전제단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림은 천기의 변화와 봉황문의 약동을 느낄수 있었다고 합니다. 와방점은 웅악산과 가깝습니다. 석붕산과도 이웃에 위치합니다. 《帝王年代歷》〈崔致遠 編著〉 檀君紀 檀君 甲子十月三日誕降, 戊辰十月三日卽位, 庚子三月十五日昇遐. 在位九十三年, 壽二百七十年. 갑자년 10월 3일 탄강하셨으며, 무진년 10월 3일 제위에 오르시고, 경자년 3월 15일 승하하셨다. 제위에 있으신지 93년이요 향년이 270년이다. 戊辰,[1] 國人推戴神人爲君, 定國號曰檀,[2] 頒敎令,[3] 設壇祭天.[4] 무진년에 나라 사람들이 신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니 나라의 이름을 ‘단’이라 정하고 교령을 반포하였으며, 제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를 올렸다. [1] 唐堯二十五年. [2] 上古有桓因時代, 桓雄時代, 稱神市氏. 上元甲子, 有神人持天符三印, 降于太白山檀木下, 設神敎化, 民歸者如市. 戊辰十月, 團衆推戴爲壬儉, 國號曰檀. 是爲檀君始敎, 以男女?父子?君臣之道, 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命彭吳治國內山川, 開通險夷, 以奠民居. 娶河伯之女爲后, 生四子: 曰扶婁, 曰扶虞, 曰扶蘇, 曰扶餘. 民有疾病, 命扶虞以醫藥治之; 山多猛獸, 命扶蘇以火獵攘之; 契兪作亂, 命扶餘討平之; 命神誌掌書契, 命高矢治田事, 以余守己爲濊君長, 以緋天生爲南海長, 分掌諸郡. [3] 渤海.天統, 注贊《三一神誥》, 卽此也. [4] 江華.摩尼山.
다음은 예맥족과 고구려족의 관계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견해다. 2007년 5월 3일~4일에 열린 고구려 연구회와 경성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국제 학술토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이다.
* 중국학계의 고구려 기원에 대한 논의 [중국학계에서 고구려 관련문제 중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가장 활발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부분이 바로 고구려의 기원 문제이다. 고구려 족원에 대한 중국학계의 전통적인 견해는 예맥설과 부여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일찍이 동북역사학자인 金疏黻이 東北通史에서 “고구려는 동북 예맥족계로부터 기원한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의 기원연구에 서문을 열었고 이러한 견해는 이후 중국학자들에게 계속 견지되어 왔다. 고구려가 예맥으로부터 기원한다는 ‘濊貊說’의 대표적인 학자는 장박천, 손진기, 동동, 손옥량, 이전복, 이종운 등으로 이들은 대부분 한서「왕망전」, 후한서「동이전」, 후한서「광무제기」, 삼국지「동이전」 등에 보이는 예, 맥, 예맥, 소수맥에 관련 기록을 ‘예맥설’의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 孫進己는 “고구려의 족원에는 貊人 뿐만 아니라 濊人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으며 佟冬은 “고구려는 예맥의 한 지파로서 혼강과 압록강 유역에 주로 분포한다”고 하여 고구려는 예맥의 후예라고 하였다.
**김악은 “고구려는 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여 부여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광개토대왕비문과 모두루묘지명의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出自했다는 기록과 논형.후한서,삼국지. 위서,양서등 16개 사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이들 사서들이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증명한다고 주장하였다.
1990년대 들면서 예맥설, 부여설 외에 고이설, 상인설, 염제설, 다원설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면서 고구려의 족원문제는 어느 때 보다도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高夷說의 대표적인 학자인 王綿厚는 孔晁가 생존했던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에 웅거했던 전성기였다고 하는 점을 들어 당대 史家들의 그 시대에 존재했던 민족에 대한 注解는 권위와 실증성에서 근거가 있는 것이기에 쉽게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
첫댓글 백랑님의 주장대로 일본인들이 중국의 지도를 얼마만큼 조작하였는지는 모르지만 특정한 형상으로 인하여 부쳐진 지명까지 왜곡할 수는 없다.그 어떠한 물증보다도 확실한 웅악(熊岳)이란 지명은 왜곡시킬 수 없다.따라서 고조선의 역사상 등장하는 단군설화와 고주몽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웅심산등 예맥문화의 심장부가 바로 개마대산이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요.
어쨋건 웅악은 요동군의 남쪽인 번한현 부근이였을 청 시기 봉천성 봉천부 개평현에 있었고 개평현 치소에서 서남쪽으로 60 리 지점에 웅악방수위를 설치하였고 <청사고/지리지> 말로는 옛 요성이라 하며 개평현 치소 북쪽에 어니하 곧 패수가 있고 남쪽에 웅악하 곧 대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한 시기 요동군과 청 시기 봉천부 위치가 지금의 란하 중류 동쪽이라는 것이고 한 시기이건 청 시기이건 대요수.염난수.요하는 지금의 란하였다는 것입니다.
허! 내 글도 희미하네.
구산님!!!!
글이나 바탕에 색 좀 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