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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찬송은 성도의 권리와 의무이다
장코뱅 추천 3 조회 341 25.02.08 09:28 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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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02.08 09:51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울러 더 다양하고 깊은 이해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주석 등 댓글을 첨부합니다.

  • 25.02.08 11:20

    주석이 없거나 찾기 어려운 분들께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 25.02.08 15:04

    @노베 네, 저에게 도움이 많이 돼요.

  • 작성자 25.02.08 09:54

    환난에서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시편 40:1-5), <매튜 헨리 주석>

    이 대목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시편 기자가 빠져 있던 극심한 궁지와 환난. 그는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으며(2절). 그 혼자 힘으로 헤어나올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으로 점점 더 빠져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본문에서 그의 신체적 질병이나 자기 원수들의 모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가장 큰 고통이 바로 모종의 내적 불안과 심령의 당혹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물러가신다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유래된 낙담과 영원한 형편에 대한 점증하는 의구심과 불안감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웅덩이와 진창투성이의 수렁이 아닐 수 없으며, 하나님이 애지중지하시는 많은 자녀들에게도 항상 그러해 왔다.

    Ⅱ.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겸손한 기다림과 그렇게 깊은 곳에서도 그로부터 구원이 오리라고 기대하는 믿음, "내가 여호와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니, 기다리고 기다렸도다"(1절). 그는 다른 자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구해 주심을 기대하였다. 찢으셨던 바로 그 손이 치료해 주어야 하며, 치신 바로 그 손이

  • 작성자 25.02.08 09:55

    싸매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호 6:1),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고쳐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그가 기대한 것은 구원이었고, 그는 시간이 되면 구조가 도래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은채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하나님께는 자기를 신뢰하는 모든 백성들 중 가장 약한 자라도 도와주실 만한 넉넉한 은혜가 있다. 그러나 다윗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으니, 이는 그 구원이 일찍 도래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는 구원이 오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도래할 때까지 믿음과 희망과 기도를 계속하리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나님께 기대하는 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으나 동시에 인내로써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 아주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그의 고뇌는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상에서나 다 같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은 기가 막힐 웅덩이였고 수렁이었다. 그 당시에 그의 영혼은 고통을 당하였고 비상한 근심에 차 있었다. 그 당시에 그의 영혼은 고통을 당하였고 비상한 근심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리스도는 기도하였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아버지여, 나를 구하소서."

  • 작성자 25.02.08 09:55

    그리하여 그는 그의 아버지께 대한 자기의 관계를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하면서 계속 유지하였고 그와 같이 끈기 있게 하나님을 기다리셨던 것이다.

    Ⅲ. 곤경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의 유쾌한 경험,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예와 그 자신과 타인들의 격려를 위해 기록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는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하나님을 끈기 있게 기다리는 자들은 설사 그 기다림이 오래 지속될지 몰라도 그것이 헛되이 되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히 5:7).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항상 들으신 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셨다.

    2. 하나님께서 다윗의 불안을 침묵시키셨고 영혼의 동요를 잔잔케 하셨으며, 그에게 안정된 양심의 평화를 주셨다(2절). "그는 나를 낙담과 절망의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끌어 올리셨고, 구름을 흩으셨으며 그의 은총의 확신으로써 내 영혼 위를 밝게 비추셨다. 그뿐만 아니라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종교적 우울증에 접하여 지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해소하게 된 자들은

  • 작성자 25.02.08 09:55

    자신에게 아주 감동적으로 적용할 수가 있다. 그들은 무서운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워진 것이다.

    (1) 자비는 저들의 발을 반석 위에 놓게 함으로써 이루어 졌고, 그들은 그 반석 위에서 저희 보행이 견고하다는 것을 발견하여 이전에 저희가 지옥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천국을 원했던 것보다 더 간절히 원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한 영혼이 굳게 설 수 있는 반석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그의 중재 위에다 어떤 공고한 희망이나 만족이라도 건축할 수 있다.

    (2) 자비는 저희의 걸음을 확립하는 데에서도 계속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변치 않는 희망을 주신 곳에서는 꾸준하면서 규칙을 어기지 않는 행위가 있어야 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자비의 복된 열매라면 우리는 넘치는 감사로써 그의 은혜의 풍부함과 능력을 고백함이 옳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 평화와 아울러 기쁨으로 그를 채우셨다.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도다. 그는 나에게 기뻐할 만한 원인을 주셨으며 환희에 넘치는 마음을 주셨다." 말하자면 다윗은 신세계로 데려가졌으며, 그것은 다윗의 입을 새 노래로 가득 채우게 했고,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으로

  • 작성자 25.02.08 09:56

    충만하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모든 노래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의 영광을 기릴 수 있도록 불리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에는 받아보지 않았던 특별히 새로운 자비는 새 노래를 요구한다.
    이것은 낙원으로 영접되시고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시며 그 앞에 주어진 희락과 영광에로 올리우신 우리 주 예수님께 적용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지심을 받고 반석 위에 세워지셨으며 그의 입에 새 노래가 담기워졌던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하심을 나타내셨던 이 사례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익한 활용.

    1. 다윗의 체험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다수의 성도들에게 격려가 될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그는 여기에 자기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그들은 여호와와 그의 공의를 두려워할 것이니 이는 그의 공의가 다윗과 다윗의 자손을 기가막힐 웅덩이로 던지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푸른 나무에게도 이 같은 일이 행해졌은즉 마른 나무는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다윗과 다윗의 자손의 입을 기쁨과 찬미의 새 노래로 채우신 일을 보고는 여호와와 그외 선하심을 경외할 것이다.

  • 작성자 25.02.08 09:57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심은 그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 희망의 기초가 된다. 저희는 최대의 난경 중에서 그를 두려워하여 피할 것이 아니라 경외하면서도 그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곤경 중의 다윗이 한 것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크나 큰 격려가 된다. 그리스도가 상처를 입고 우리 죄를 위해 슬픔을 당하심으로써 여호와가 기쁨을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빛을 그에게 청구하셨던 것이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자기 우편에 앉도록 하셨을 때에는 그리스도가 지불하신 것을 열납하시고 그 지불에 만족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배하고 "그를 의지하는 일"에 있어서 그보다 더 큰 격려가 어디 있겠는가? (롬 4:25; 5:1, 2)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복되다고 선포함으로써 자기가 행하였듯이 타인들도 하나님을 저희 희망으로 삼도록 권유하고 있다(4절). "여호와를, 오직 그만을 의지하고(그는 크시며 선하시다고 생각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헌신하는 것), 교만한 자를 돌아보지 않으며,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는 자들 같이 하지 않고 타인들에게도 자기 자신만 신뢰하도록 하라고 교만하게

  • 작성자 25.02.08 09:58

    부추기는 자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자나 교만한 자를 의지하는 자는 양자가 다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나가는 모든 자들처럼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신앙에 적용될 수 있다. 복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움만을 신뢰하고, 그의 의로우심과 경쟁하여 저들 자신의 의를 세워 두면서도 저희 의로움의 명령에게는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존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롬 10:3) 불신적 유대인들처럼 거짓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유혹을 모면해 나가는 자들은 복이 있다.

    2.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다른 많은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써 관찰하도록 인도해 주신 이 자비에 대하여 그가 가지는 기쁨(5절).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새 노래를 두시는 때에라도 우리는 이전의 노래들을 망각해서는 안 되고 그 노래들을 되풀이해서 불러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와 다른 자들을 위해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나이다. 이 일은 그 많은 일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 섭리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매일 입은 혜택은 많다.

  • 작성자 25.02.08 09:58

    (1)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일인바 그의 아낌없는 마음이 주시는 은사일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의 작용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이와 같이 감사하고 또 찬미할 일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2)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기사(奇事)요, 경탄할 만한 계획이며, 우리에게 그런 일을 베푸심을 우리에 대한 그의 경탄할 겸양이다. 영원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찬미하는 데에는 부족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모든 기적들은 우리에 대한 그의 사고의 산물이다. 그는'그의 마음의 원대로"만사를 행하시며(엡 1:11). "그가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그의 은혜의 목적에 의거하여 행하신다(엡 3:11). 그 일들은 무한하신 지혜가 기획한 일이고 영원하신 사랑이 도모하시는 계획이며(고전 2:7; 렘 31:3), 악한 생각이 아닌, 선한 생각이었었다(렘 29:11). 그러한 그의 은사와 소명은 후회가 없을 것이니, 이는 그것들이 갑작스런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심사숙고의 결과인 까닭이다.

    (4) 그런 일들은 무수하다. 그것들은 체계화할 수도 없으며 차례대로 "베풀 수도 없다."

  • 작성자 25.02.08 09:59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우리 시야로 드러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는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지 솜하며 그 다음 것이 어느 것인지도 알수 없다. 그 일들의 순서와 그것에 대한 자연의 창조물과 의존물, 그리고 황금 사슬의 연결이 어떻게 접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그 휘장이 찢어져서 하나님의 신비가 종언을 고할 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일들은 셀 수도 없으니 그들 중 큰 항목조차도 셈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경이로움을 최대한으로 묘사한다고 했을 경우에도 etcaetra-즉 기타 등등이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되며, 밑바닥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25.02.08 11:27

    @장코뱅 매우 자세한 설명이고 한 편의 설교와도 같이 풍성합니다.

  • 작성자 25.02.08 10:01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시편 40:6-10), <매튜 헨리 주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에 경악을 금치 못한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는 기이하게도 여타 모든 기적을 능가하며 모든 것의 기초와 원천이 되는 놀라운 일의 예언을 수행하게 된다. 그것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속사건에 대한 예언이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일에 관해서 우리를 향해 생각하셨으니, 그 생각들은 가장 진기하고 가장 풍부하며 가장 은혜로운 생각이었다. 따라서 가장 찬미를 받을 만한 생각이었다. 이 문단은 사도에 의해 인용되어(히 10:5 이하)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하신 그의 사업에 적용되었다. 구약의 제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신심(信心)에 있어서도 구약의 성도들이 알고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께 관한 것이 많이 들어 있다. 구세주께서 자기 사업을 자원하여 떠맡으신 것 을사도가 우리에게 제시할 때, 그는 그것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에 관한 책에서 그 설명을 끄집어 낸 게 아니라 계시된 일들로부터 끌어냈다.

    Ⅰ. 하나님과의 화해와 그 안에서의 행복을 위한 속죄에 있어서 율법적 희생 제사는 아주 불충분한 것이다.

  • 작성자 25.02.08 10:01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구속주가 이러한 것들을 바치도록 원하지 않으셨다. 구세주께서는 바칠 것을 가지고 계셔야만 하였으나 그가 가진 예물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히 8:3). 그는 아론 지파의 하나이어서는 아니 되었다(히 7:14). 혹은 메시야의 날에는 번제와 속죄제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의식적 제도들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다니다. 이들 제사에 관한 율법이 한창 실시되던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제사 그 자체를 위해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시거나 열납하신 것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사와 제물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죄의 비행을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한 마리 양의 목숨은 인간의 생명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서(마 12:12) 동등하다고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와 법의 명예를 보전하며, 인간의 죄로 인해 그 명예에 입혀진 손상을 수선하는 방편으로 자처할 수는 더구나 없었다. 그것들은 양심을 무마시킴으로써 죄악의 공포를 제거할 수도 없었으며, 본성을 성화시킴으로써 죄악의 능력을 탈취해 가지도 못하였다. 그것은 불가능하였다(히 9:9; 10:1-4).

  • 작성자 25.02.08 10:01

    그들 안에 가치 있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저희의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뿐이었으니 그 제물은 그에게 대한 예표였었고 음영이었다. 참으로 그 제물은 장차 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였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신앙과 순종에 대한 시험이었고, 율법에 대한 저희의 복종과 복음 안에서 갖는 저들의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 허상에 대한 실체가 와야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께는 그 영광을 가져오며 인간에게는 그 은혜를 가져 오시는데 이런 일을 그들 희생 제물이 해낸다는 것은 도대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Ⅱ. 우리 주 예수에게 중보자의 사업과 직능을 임명하셨다. "주께서 나의 귀를 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 기획에 배정하셨고(사 50:5, 6), 그로 하여금 그 일을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안되게 하셨다. "주께서 나의 귀를 뚫어서 영영 종살이하게 만들던 당시의 법과 관습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출 21:6 참조). 우리 주예수께서는 자기의 사업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것으로부터 무단히 물러나고자 아니 하셨고 영원히 이 사업을 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우리를

  • 작성자 25.02.08 10:02

    "최대한도로, "끝까지 구원하실 수가 있으시니"이는 그가 자기를 붙잡아 주시는 아버지를 끝까지 섬기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사 42:1).

    Ⅲ. 이 사업에 대해 그는 자발적으로 동의하였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있나이다 하였습니다. 제사와 예물이 오히려 그 일을 망쳐 놓은 것 이상으로는 아무 효험을 보지 못하는 그 때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흑암의 권세와 일전을 겨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떨치고자 내가 왔나이다." 이것은 세 가지 일을 시사해 주고 있다.

    1. 그는 그 자신이 원하던 업무보다도 먼저, 하등 수행할 의무도 없었던 이 봉사에 자기 자신을 거리낌 없이 바쳤다. 이 일이 그에게 제안되자마자 그는 더 할 수 없으리만치 흔쾌하게 동의하였고 그 계획을 놀라우리만치 환영하였다. 만일 그가 이 일에 완전히 자발적이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 구원의 보증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희생 제물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히 10:2). 왜냐하면 우리가 성별당하는 것은 바로 이 의지 animus offerentis-즉 제공자의 마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이일에 대해 스스로 굳게 의무감을 지녔다.

  • 작성자 25.02.08 10:02

    "나는 오리라. 나는 때가 차면 올 것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가 이 약속에 실제적인 주의를 기울이신 것은 그가 이 세상에 들어오신 때였고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았다.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일을 완전히 수행해내기 전에라도 그 기획을 떠맡는 영광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값은 치러지지 않았으나 그런다치더라도 이 지불될 것은 확실하였으니, 그는 세상의 기초가 정해진 때부터 이미 살해 된 양이었던 것이다.

    3. 그는 자신이 약속된 자임을 속히 인정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오리라"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구약 성도들에게 줄곧 말하였는데 그들은 그 때문에 o]erco,menos,-즉 와야만 할 분으로 이해하였다. 이 말씀은 구약 성도들이 자기들의 신앙과 소망을 건축하였던 기초였으며 저들이 그 성취를 대망하고 동경하였던 것이었다.
    Ⅳ. 그가 자기의 기도(企圖)를 추구하기 위해 오게 된 이유, 그가 온 것은 "그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기" 때문이었다.

    1. 하나님의 법령과 의향에 관한 은밀한 두루마리 안에,

  • 작성자 25.02.08 10:02

    그의 귀가 열렸다는 것과 "내가 왔나이다."고 그가 말하였다는 것도 거기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구속의 계약이 기록되었으며 성부와 성자간의 평화로운 협의도 기록되었다. 또 그는 자기가 행한 모든 일 중에서 특히 그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은 명령에 유의하였다.

    2. 구약에만 특유한 전매 특허증에,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은 그에 대해 증언하였다. 구약 성서의 모든 두루마리에는 그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모든 것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유의하셨던 것이다.(요 19:28).

    Ⅴ. 그가 자기 사업의 착수에서 갖는 즐거움, 그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그 일에 내맡겼기 때문에 약해지지 않았고 낙심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에 대해 최대한 만족해하면서 계속 행하였다(8,9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나이다." 자기에게 지정된 일을 계속하여 행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는 먹고 마실 그의 양식이 되었다(요 4:34). 그리고 그 이유가 여기에 주어지고 있다.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기록되어 그것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법이 거기에서는 능동적인 지휘 원리가 된다.

  • 작성자 25.02.08 10:03

    그것은 중보자의 사업과 직분, 즉 그가 무엇을 행하며 어떤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관한 법을 의미한다. 이 법은 그에게 소중하였으며 그의 사업 전반에 걸쳐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기록될 때는 우리의 의무도 즐거움이 될 것이다.

    Ⅵ. 인간의 자손들에게 "대 회중에서" 복음을 공표함(9,10절). 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구속을 베풀어주신 동일한 분이 예언자로서 맨 처음엔 그 자신의 선포에 의하여, 그 다음엔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큰 구원이 주로 말미암아 말씀되기 시작하였다"(히 2:3).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에 주목하라.

    1. 선포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의로움"이니(9절), 곧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며(10절).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영원한 의로움이다.(단 9:24; 롬 1:16, 17 참조), 그것은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성"과 오랫동안 기다렸던 "구원"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 말씀대로 따르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와 자비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 사업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이 얼마나

  • 작성자 25.02.08 10:03

    밝게 빛나는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들 하나하나에 대하여 찬사를 던지지 않으면 안된다.

    2. 그것이 선포되는 대상은 누구인가? "대 회중에서"(9,10절에서 다시 반복됨)이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한꺼번에 수 천명씩 되는 다수 대중에게 설교하셨다. 복음은 유대인에게와 이방인에게 이 양자의 큰회중을 향해 선포되었다. 엄숙한 종교적 집회는 신성한 관례이며, 그 집회 중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영화와 인간들의 교훈을 위해 그리스도의 앞에서 찬미되어야 한다.

    3. 그것이 어떻게 선포되는가? 그것은 자유로이, 그리고 공개적으로 행해진다."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않았나이다. 나는 그것을 숨기지 아니하고 은익치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에는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기도하는 자는 누구나가 그것을 숨기고 비밀로 은폐시키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리라는 것이 암시되고 있으니, 이는 복음이 큰 논난과 함께 격심한 반대의 면전에서 설파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위해 부르신 자들은 그 얼굴을 "부싯돌같이"하여(사 50:7) 그 사업을 수행해 나아갔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 작성자 25.02.08 10:04

    됨으로써 우리 눈은 환희의 빛을 보게 되었고 우리 귀는 기쁜 소리를 듣게 되었으며,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영영 그것을 모르는 채 멸망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25.02.08 11:36

    @장코뱅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그리스도가 동일인이고, 여호와를 주(主)로도 표기한 기초 지식을 알고 읽으면 더 잘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작성자 25.02.08 10:05

    <호크마 주석>, “시편”
    =====40:3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40:4
    교만함 자 - 원문에 복수형인 '레하빔'(* )으로 되어 있는 이 단어는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 작성자 25.02.08 10:06

    그러나 그 단수형 '라하브'(* )는 자기 자신의 힘을 소문내듯 소란스럽게 잰체하듯 의존하는 자를 의미하는 애굽 이름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실망속에 낙담할 힘을 의존하는 교만한 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Perowne). 한편, 어떤 학자는이 '라하브'를 신비스러운 바다 괴물인 라합으로 보고 이를 '이방 우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같은 해석은 70인역(LXX)의 지지를 받는다(Da-hood). 이 두 해석 중 전자가 신뢰할 만한데 그 이유는 전(前) 문맥이 '의존'의 개념을 말하고있기 때문이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 - 문자적인 뜻은 바른 길예서 이탈하는 자, 즉 영적인 의미로는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자이다. 그러나 '거짓'으로 번역된 '카자브'(* )가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왜곡된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임을 고려할 경우(Ander-son)이 단어는 '하나님을 배교하는 자'의 개념으로까지 볼 수 있다(Perowne).

  • 25.02.08 11:41

    @장코뱅 주석이 설령 없어도 40:4는 공동번역과 새번역을 보면 뜻이 더 잘 파악됐습니다.

  • 25.02.09 16:12

    @노베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2.08 10:13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

    비공유적(有的) 속성들이란 피조물들 안에 유추할 만한 대상이 없는 신적 완전성들이다. 이 속성들은 하나님의 절대 독특성, 그분의 초월적 위대성을 강조한다. 다음과 같은 속성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1. 하나님의 독립성 혹은 자존성

    하나님께서 독립 혹은 자존하신다고 말할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에 따르는 필연성에 의해서 존재하시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 자신 이외의 다른 대상에 의존하여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일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덕(virtue)들과 행위들에서도 독립적이시며,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개념이 여호와라는 이름에 담겨 있고, 요한복음 5:26에 표현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생각에서(롬 11:33, 34), 의지에서(단 4:35: 롬 9:19: 엡 1:5: 계 4:11). 권능에서(시 115:3), 계획에서(시 33:11) 독립적이심을 분명히 암시하는 단락들에 지적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로부터 독립해 계시고, 만물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선언에도 암시되어 있다

  • 작성자 25.02.08 10:13

    (시 84:8 이하; 사 40:18 이하: 행 17:25).

    2. 하나님의 불변성

    성경은 하나님의 독립성뿐 아니라 불변성도 가르친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고 따라서 존재와 완전성들과 목적들과 약속들에 조금도 변화가 없으시다. 이 점은 시편 102:27: 말라기 3:6; 야고보 1:17 같은 구절들이 분명하게 가르친다. 동시에 하나님께 변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한 구절들도 많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타나시고 숨으시고, 오시고 가시며, 뜻을 돌이키시고 바꾸시는 듯이 묘사된다(출 32:10-15; 욘 3:10; 잠 11:20;12:22 시 18:26, 27).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께 어떠한 움직임도 없음을 뜻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은 내적 존재와 속성들과 목적들과 행위의 동기들과 약속들에서 변함이 없으시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께 대해서 뜻을 돌이키고 변경하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분명히 인간적인 표현 방식이다. 실제로는 하나님께 변화가 없고, 다만 인간에게,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변화가 있을 뿐이다.

    3.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이란 일반적으로, 만물이 그분의 존재에 속하도록 하는

  • 작성자 25.02.08 10:14

    1분의 본성(nature)의 완전성이 한계도 없고 한량도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완전성, 영원성, 광대성, 단순성).

    루이스 벌코프,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 pp.57~58.

  • 25.02.08 11:53

    @장코뱅 담백한 배움을 제공하는 좋은 내용의 댓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25.02.08 12:15

    찬송이 전도가 될 수 있고, 회개와 연관된다는 말씀에서 신선한 분별을 얻고 매우 공감합니다.

  • 25.02.08 12:16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대해서 격조 높은 설명에 공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와 번제가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으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의 변화를 주문하게 된 것은 제사의 본질이 회개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범죄 때문에 죄 씻음을 위해 짐승의 피를 대신 흘리고, 옷을 찟고 재를 뒤집어 쓰고 뿌리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이 동일한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 후에는 기쁨과 찬송으로 연결되고, 성도 만이 드릴 수 있는 격조 높은 찬송의 위력은 뭇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어 감동을 주고 전도의 효과를 불러온다는 사실이 매우 은혜롭습니다.
    찬송은 성도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말씀을 잘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5.02.08 12:19

    비교적 긴 내용을 간략하게 잘 요약하면서도 논점과 논지는 그대로 잘 있는 좋은 댓글을 올려 주셔서 배우고 공감합니다.

  • 25.02.08 15:09

    깊고 풍성한 내용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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